창세기 3장 공부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체념'보다 큰, 예수의 죄사함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는 '나'를 날마다 부인하고, 의심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소망하고 열망하는 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서면 내가 욕망하고 있는 것이라 스스로 착각하기도 하고, 이건 욕망이 아니라 정말로 필요한 거야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말한것처럼 나는 이미 죽었는데 왜 반응하지? 반응하는 나는 뭘까.
예수가 죽지 않았거나, 예수가 죽었어도 효과가 없거나 둘 중 하나라는데,,, 나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고 뱀이 충동질하면서 참소하는 걸까? 여러가지 질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나옵니다.
선포하기로는 나는 이미 죽었다고 하지만,,,아직 사건으로 경험한 실재적인 죽음이 없어서 그런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함께 죽은 나', 그래서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는 나를 '참 나'로 여기겠습니다.
뱀이 아침 눈 뜰떄부터 잠 들때까지 끊임없이 충동질하는데 과연 혼자의 힘으로 이런 충동질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촘촘한 관계 가운데 있다면 지체를 통해 권면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들어도 무반응 일 것 같은 제 모습이 상상되기도 합니다. 해보지도 않고 체념하는 모습이네요.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을 통해 한 사건이 떠올라 감사했습니다.
집단과 구조가 죄를 방기하기 때문에 죄가 관계 안에서 드러난다는 말씀.
하와 옆에서 침묵했던 아담과 같이 있었던 저를 보게 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해왔던 '나'를 버리고 새롭게 관계 맺어가야겠습니다.
외부의 힘으로부터 충동질 받고 있는 생활양식과 환경을 정리해야겠습니다.
부자청년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질문이 많아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첫댓글 '들어도 무반응 일 것 같은 제 모습이 상상되기도 합니다.'라는 글이 흥미롭습니다.
촘촘한 관계 가운데 있는 관계의 힘을 모르고 할 수 있는 말이죠. 그 관계의 힘은 우리의 예상보다 권세 있고 능력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살아내고 살려고 애쓰는 지체들의 권면은 매우 힘이 있지요.
아담의 침묵 없이 서로를 돌아보고 비춰주는 촘촘한 관계는 죄의 유혹과 권세를 능히 극복하고 쫓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귀신을 쫓는 권세가 너희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성령의 권능 성령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계속 공부하며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자유를 깊이 경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