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전에 3장을 읽으며,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으니까 그들의 실존은 처음부터 알몸이었던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살도록 하신 거죠. 하나님은 어째서 ‘참나’를 볼 수 없게 눈을 가리신 걸까 궁금했습니다.
우선 강의를 듣고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니, 안다/모른다로 구분하는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 근대 철학에 기댄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 방식으로 오직 ‘내가’ 주체로서 모든 걸 생각하고 구분하고 판단하면 질문도 그 틀에서 나올 수 밖에 없더군요. 우리 땅에 이어져온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태초에 사람은 알몸(없음)과 걸친몸(있음)이란 경계가 아예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지고 똑똑해지면서 알몸이란 규정이 생깁니다. ‘나는 걸친 게 없구나, 난 안돼, 난 형편없어.’ 또는 ‘쟤랑 달리 난 잘 입었어, 난 멋져, 난 꽤 잘 하고 있어.’ 라는 자기 규정이 이런 사고틀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걸 보았습니다. ‘나’를 제시받거나 나를 정의하는 ‘사고틀’을 제시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뱀이 문제설정의 지점을 교묘하게 바꾸고 하와에게 제시하자 사고방식이 달라지는 것처럼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 눈으로 온전한 자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모든 시대가 적용되는 답은 없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의 뜻을 분별하여 나름의 길을 찾아야겠지요. 이번 강의에서 질문하는 벗님들 기운을 보며 거기에서 ‘나’를 보았습니다. 거울로 볼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건 ‘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못 보게 하셨지만 또 ‘나’를 보게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 몸, 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시대에 잃어버린 ‘참나’도 발견하고 경험하며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습니다.
첫댓글 자기 규정, 사고틀, 분별지 등 이런 말이 '율법'이라는 말에 들어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성과 속, 시와 비, 미와 추, 수치와 자긍 등에 눈 뜨게 하지요.(이걸 나쁘다고 말할 수 없죠.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또 다른 율법이 작용한 거겠죠?) 처음 사람은 그런 것 없이 오직 하나님의 명과 그 뜻에만 마음 두고 살았는데 존재의 왜곡과 변화로 인해 전혀 다른 정체성과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의 존재와 인식으로는 예수를 따를 수 없죠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죽음 속에서만 가능하니 그것 함께 공부하며 같이 예수 따르는 것에만 마음 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