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밝은누리 인수마을에 살려고 하는 윤주 입니다.
하루강좌 자기부인에로의 길 강의를 듣고 받은 은혜와 감동을 나누려고 합니다.
자기부인이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고, 들었지만 나의 삶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요..
뭘까? 자기부인이 뭘까? 궁금함이 있었는데, 나름의 내안의 해석이 있긴했지만 확신이 없었어요.
마태복음 16:24,25 말씀을 읇어주시며 3년 사역후 예루살렘 가시기전 출정식의 확인과 평가를 하시고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예수님) 누구인지 물으시지만 사람들은 선지자, 예언자, 선생 정도로 알고 있고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도무지 하나님 나라가 온지 모르겠다고 해요.
자긍심과 자기만족 시대에 타자를 받아들이고 타자의 짐을 짋어지는 것이 맞을까? 도대체 무엇일까?
산상수훈은 가능한 것인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어주고 5리를 가자는 사람과 10리를 가는 것, 이시대와 맞지 않는다,
제 속에서는 절대 할 수없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까지도 버거운 일인데 ... 하는 생각과 성경이 시대의 흐름을 읽으며 시대의 상황에서 해석하는 거지, 하는 생각들이 들었어요.
전에 공부했던 시대의 흐름으로 성경을 해석한 내용들이 틀이 잡혀져 있어요, 동의되지 않는 성경의 해석들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늘은 왠지 끝까지 차분히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애를 채우려는 욕망이 가득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석이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사상이라고 하기에는 좁지 않나? 이런 질문이 들었지만 분명 이곳에서 이 말씀을 듣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거라는 마음이
생각을 비워내고 있었어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곡식을 받지 않는 것에 분노해서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내 힘으로 농사지은 내것으로 여기는 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가인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나를 무시하면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죽이고 싶어하는 건 내속에도 있지, 하며 나를 돌아보며 듣기 시작했어요.
저에게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남이 반응을 해주지 않거나, 예상했던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때 못견뎌하는 것이 있는데, 어디로 부터 왔을까? 하며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인간의 자기애적 욕망이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민족을 이루어 열국이 복을 받게 되는 사건을 들으면서 아브라함이 인간의 의지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라고 알려주시는 부분이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구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이끌어가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선택과 힘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다르구나 ... 다른 방식이구나 하나님의 방식을 배워가지 않으면, 알 수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이삭과 하나님의 뜻을 쟁취하는 것으로 알았던 야곱의 인생 중에서 야곱의 인생 이야기가 저의 사고방식과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동안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쟁취해서 나의 욕망의 결핍을 채우고, 또 채워오지 않았을까?
참 나같다. 이제 더이상 나의 욕망과 생각을 채우던 삶을 비워 철든 삶을 살고 싶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타자를 발견하며, 타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하나님이 왜 고통가운데 있게 하셨을까? 고민하는 요셉을 상상해보았어요.
그리고 나는 왜 이 가정에 있을까? 왜 지금 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며 어제 일이 떠올랐어요.
어제 아빠와 심하게 다투었고, 할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퍼부으며 싸운 모습들이 옳아! 정당해, 내가 참고 있었던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늘 버럭하며 폭언과 분노하는 아빠의 모습과 가정을 돌보지 않고 사업에 몰두하는 아빠 때문에 고생하며 사신 엄마에 대한 연민 , 그로인해 언니와의 관계가 불안했던 나에 대해서 쌓인 분노와 상처가 있어요.
어렸을 때 아빠와 대화없이 자란 저는 지금도 남자와 대화를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가정에 살까? 풀리지 않는 이상한 가족의 모습으로 뿌리 깊은 상처와 피해의식이 제 안에 있었고, 그것이 어제 터지면서
나이가 70세가 되셨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사업에만 몰두하는 모습에 화가난 저는 도대체 왜 하려고 해요? 대답을 해달라, 우리가족이 힘들지 않았냐? 앞으로 얼마나 사실 것 같냐, 자신과 가정을 지키지 못할만큼 그
사업을 해야하는 이유가 뭐냐며 소리소리를 질렀어요.
왜 설명해주지 않는지? 조금 참았어야하는데, 아빠를 몰아세우며 인격에 심하게 상처가 될 말들을 소리소리 지르며 하게 되었어요. 이성을 잃으며, 울면서 소리지른 것 같아요.
더불어사는 삶에 내가 시험거리가 되지 않는 것, 타자중심적 삶과 산상수훈, "사망은 내 안에 생명은 너 안에" 이것이 실제로 살아있는 말씀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이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렸어요 .
왜 눈물이 나는지 잘 몰랐지만, 분명 성령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시고 이끄시는 것 같았어요. (사망은 아빠안에 생명은 내안에, 내가 살기위해서 아빠를 협박하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나를 발견했어요) 산상수훈과는 정반대로
하고 있는 것이니 이 깊고 깊은 말씀을 어찌 알 수 있었겠어요?
아빠에게 대답해달라고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게 얘기해 달라고 협박하고 소리지르는 내가 괴물같이 느껴졌어요. 어쩌면 지금 내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겠다고 씨름하는 야곱과 같다는 생각과
꼿꼿한 내 자아의 강한 힘이 내 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누군가 그 존재를 끌어 안는 사람이 있어야 그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는데, 아빠도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상처가 많은 사람이겠다 싶으면서, 자기 내면의 힘으로 밀려간 사람을 안고 가는 예수님을 얘기하시며
이것이 천국의 열쇠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가진 의문이 풀리면서 천국을 경험해 보고싶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통속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나도 아빠의 고통속으로 들어가야 천국을 경험하는 구나... (그럼 행동을 해야하는데... )
지금도 납득이 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정말 아빠를 아빠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자 중심적 삶인가?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너무 싫으니까요. 나는 나의 주체가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이끄는 것 삶인 것 같아요. 아주 강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체가 있는 것일까? 정말 궁금했던 고민했던 질문의 답을 듣는 시간이었어요.
인간의 주체는 지배하는 무언가가있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지성을 각성시키고 의지를 행동하게 하시고 몸을 깨워주신다는 말씀이
아! 이것이 주체이구나 그리스도에게 의존된 주체성! 이것이구나 하며 와닿았어요.
주님 앞에 무릎꿇는 주체 왜 기도해야하는지 알게되며, 관계를 풀고 행동하기 앞서 기도하자,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주체가 되는 길 "기도" 이겠다 싶어요.
오늘부터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청아 강의 고맙습니다.
강의 반쯤 듣고, 두런두런 밥상교제도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