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고자 한 여러 직업분야의 종사자들이 모여 길담서원이라는 모임이 생겼고, 그 중 몇명이 '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7명의 저자가 각자의 언어로 돈을 이야기 하며 외치는 것은, 인간은 돈의 노예로 살고 있으며 이제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본과 돈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양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파훼법을 마련해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제도와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창조적 존재이며 우리는 이 자본으로 부터 우리의 삶을 지켜낼 '숨구멍'을 필요로 한다.
만족은 욕망의 크기에 반비례 하다. 욕망이 과할 때 삶은 불행해 지며 욕망이 적어질 때야 비로소 삶은 행복해진다. 인류역사상 오랜기간 동안 사람을 억압했던 것은 주관적 폭력, 물리적인 폭력이었다. 이제는 그 폭력의 자리를 돈이 대체 했다. 돈은 사회의 전반적인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어떠한 영역이던 간에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그 새로운 폭력체계인 돈으로부터 반드시 사수해 되야하는 영역을
저자는 농업과 교육이라고 말한다. 특히 교육은 인간에게 있어 가능성이자 미래이다. 이전에는 가난한 사람이 공부를 통해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다는 뜻으로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표현이 있었으나 더 이상 용이 나올 수 없는 구조가 되가고 있다. 학생들의 성적이 재산의 많고 적음과 정비례하는 시대이다. 이미 강남의 학생과 시골의 학생은 출발점부터가 다르며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구도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리고 돈을 쥐고 있는 기득권들은 입시난이도가 낮아지는것을 원하지 않는다. 만일 사교육없이도 성적이 잘 나올수 있는 교육제도가 마련된다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의 메리트가 교육부분에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돈을 가진 사람이 유리한 방양으로 입시제도가 지속된다면 가난의 대물림 역시 고착화 될것이다. 농업 역시 돈의 횡포로 부터 지켜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농업은 이미 사양산업이다.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점점 돈을 밑지는 장사를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fta와 같은 자유무역주의가 확산되면서 미국등을 통해 값싼 곡물이 수입되고 국내의 곡물들은 가격경쟁력을 상실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oecd국가중 최하위 수준이다. 만일 우리의 농업이 사장되고 이상 기후 등으로 세계적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면 그때 우리는 식량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것이다. 이처럼 교육과 농업같이 돈으로만 따져서는 안 되는 분야가 있으나, 현실에서의 돈은 너무나 위력적이다. 돈이 이렇게 절대 권력을 차지 한것은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상업이 활발해지고 십자군 전쟁은 무역로를 개척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프랑스 대혁명 역시 왕.귀족등과 갈등을 빛던 상인들의 지원으로 더 파급력이 있어졌다. 돈은 어느순간 부터 인류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동력이 되었다. 과거 조선에는 청빈함이 선비의 중요 덕목이었고 근대이후까지도 노골적으로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자본주의의 급부상은 돈을 절대적으로 만들어버렸다.
20세기 후반 서구사회주의가 스스로 자멸하면서 자본주의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승리를 거두었고, 사회주의 체제 안의 장점들은 구시대의 유물이고 자본주의가 절대적 가치로 격상되었다. 교육마저도 서비스가 되버리고 학생의 성적과 성과가 학교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가 되버리면서 학교는 공장이고, 학생은 상품처럼 취급당하고 있다. 한 개인의 교육과 성장은 단기간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닌 각각의 시간과 때에서 다른 유형으로 발현되는 것이나 이제는 그렇게 사회에서 개인을 길러낼 수 있는 구조도 인내심도 없다.
사회는 성장중심의 경제정책을 장려하고 그에 따른 이론이 '파이론'이다. 분배이전에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이론이 정당해지려면 분배역시 정확해야 하는것인데 승자가 파이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물론 수십년 전처럼 끼니가 없어 굶어죽는 절대빈곤의 시대는 벗어난듯 하나, 자살률은 끈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돈은 인간의 편리를 위한 종이에 불과했지만 욕망의 매개물이 되었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공공재로 여겨졌던 많은 부분들이 사사화 되고 있다. 학교마저도 자본가의 소유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청년들이 이 사회적 문제를 자각하고 권리를 찾기위해 배워야 한다.
우리는 보통 정해진 날 정해진 돈을 취득하여 정해진 기간동안 소비하며 생활한다. 효율적인 소비습관을 필요로 하지만 자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소하게는 붕어빵을 사먹을 때 마저도 5개에 1000원,2개에 500원이라면 5개가 필요치 않아도 우리는 5개를 구매한다. 편의점에서도 마찬가지다 필요하지 않은것도 2+1이라는 이유로 구매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같은 크기의 이익과 손실 앞에서 손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손실을 피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것을 손실 회피 심리라고 한다. 반드시 생활을 위해 고정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돈이 필수 지출 비용이라면 자신의 기호에 따라 소유하고 싶은 것을 구매할 때 사용되는 비용을 욕구지출비용이라 한다. 청소년들이 성장하며 경제관을 확립해 나갈 때한정된 돈 안에서 필수지출과 욕구지출을 잘 분배하는 습관을 기르는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당연히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단순히 절대 액수를 가지고 삶의 만족도를 평가할 수는 없는것이다. 각자의 돈의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달에 일하고 받는 월급 즉 통장에 찍히는 돈이 명목소득이다. 여기서 고정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돈인 세금과 채무등을 뺀 나머지를 놓고 비교를 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고소득층이 채무와 관리비 세금 그리고 사치품 소비에 대한 강박이 더 크기 때문에 더 큰 빚을 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눈에 보이는 소득이 높다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다른 계층에 비해 위험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돈의 크기로 서로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됬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필수 비용을 재하고 재량껏 쓸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가 중요하다. 자신이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냐에 따라 행복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삶과 미디어가 주입하는 지도층,유명인들의 삶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고 비교를 한다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소외하게 되는것이다. 비교로부터 자유로워 저야 한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기업은 사람들의 필요를 분석하여 제품을 생산했고, 왜 제품이 필요한가를 홍보했다면 지금은 기업이 직접 욕구를 창출해내고 욕구를 주입한다. 이에 젖다보면 사람들은 내면의 욕구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욕구에 사로잡힌다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소비자로 대상화될 수 밖에 없다. 내면의 욕구를 분석하는것이 중요하다.
통계적으로 소득 상위 3프로를 제외한 상위 10프로의 자산상태는 열악한 경우가 많다. 집과 차를 필요수준보다 높은 가격대 상품을 구매하며, 지출비용도 더 많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빚에 사로잡힐 경우도 높다. 집값이 오른다 한들 처분하지 않은 돈은 자산은 될 수 있으나 현금은 아닌것이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 돈을 빌리고 빚과 이자에 허덕임을 반복한다. 이 소비습관은 미디어에서 부추겼거니와 하나의 트렌드가 되버려 여유로운 소득을 빚갚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많은 고소득자들이 부자병에 사로잡혔고 이를 사회적 용어로 어플루엔자 라고 한다. 돈을 벌고 모아서 쓰는것이 아닌 쓰고 버는 형태의 경제습관이 자리잡히면 사람은 채무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내 안에 건강한 소비습관과 가치기준을 마련하는것이 시급하다. 남들이 하는 것은 나도 해야 된다 라는 생각을 전문용어로 동조현상이라고 한다. 이 동조현상을 겪을때 사람은 뇌의 편도체 활동이 증가한다. 뇌의 편도체는 사람이 공포를 느낄 때 활동이 증가하는데 사람은 타인이 소비하는것을따라하지 못할 때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스스로 명확한 가치판단을 하는것이 중요하다. 행복은 결핍감이 해소되었을 때 오는것이다. 소비를 통해 구매를 하고 개인의 불편함이 해소될 때 오는 쾌락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소비를 할때 신용카드는 너무나도 달콤하다. 돈이 없어도 카드를 긁는 행위만으로 나의 결핍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신용카드라는 편리한 시스템과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건전한 소비문화를 마련하는것은 힘들고 이런 소비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한 물건을 구매하더라도 신용카드가 아닌 저축으로 소비하는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사람은 동기를 실현할 때보다 동기가 실현될것을 예상할 때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 저축은 이를 동기 상태 이론이라 하고 저축은 이 행복을 더 지속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소비할 때 이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무조건 많이 가진게 행복이 아니다.
돈은 평화와도 상관관계가 있다. 평화와 평안에서 사용되는 평자는 평평하게 하다 즉 평등을 뜻한다. 누군가 빈곤을 겪는다면 그 사람은 평화롭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비록 요즘 사회에서 밥을 굶는 절대빈곤층은 적겠지만 끼니가 해결됬다고 해서 평화롭다고 할 수는 없는것이다. 환경,돈,인권,교육문제 등이 평화와 관련이 있다. 일용할 양식과 깨끗한 물 잠자고 쉴공간이 있고 몸과 마음까지 건강한것이 안녕이고 평화이다. 사람이 평화로우려면 학교나 돈을 버는 직장이 행복한 곳이어야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못하다. 인도의 평화학자 다스쿱타는는 평화의 반대는 전쟁, 전쟁의 반대는 평화 라는 일반적인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이 없는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평화없음 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없어도 빈곤,기아,영양실조,질병,환경문제 등이 남아있다면 평화없음 상태이고 이러한 비평화 요소들이 제거되야만 비로소 평화라는 것이다. 탁월한 해석이다.
평화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바탕으로 전쟁에 대해 살펴보자면,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사회학적 원인, 심리학적 원인, 정치적 원인, 군사적 원인 등이 있지만
경제적 원인 역시 중요한 전쟁배경이 된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전쟁 상인들이 있다 그들은 정치권력과 결탁하고 있고 전쟁에 이런 경제적 동기가 없다면 인류의 전쟁은 절반이 줄어들 것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비용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는 세금이다. 서민들이 내는 세금의 비율은 80프로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돈은 대부분 우리 같은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국가가 나서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수정 자본주의 이론이 있다. 대표적 학자로는 케인스가 있는데 이 케인스가 말하길 실비오 게젤 이야 말로 막스보다 인류에 더 기여를 할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비오 게젤은 노화하는 돈 이론을 주장한 학자이다. 실비오 게젤은 돈이 단순히 물건의 가치를 보관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과거의 물물교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돈이 축적되고 돈이 돈을 낳게되고 특정 계층에게 집중되는 이유는 결국 돈이 영원히 가치를 보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게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도 음식처럼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줄어 언젠가 소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시스템이 아닌 새로운 화폐제도가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실재로는 돈의 독제 채제 아래 살고 있다. 그렇기에 화폐제도 개혁은 선거제도 개혁 이상으로 중요한 과제이고 이러한 의식의 변화속에 은행도 변하고 있다. 사회적 은행의 출현이다. 사회적 은행은 공공성을 띈 사업이나 개인에게만 돈을 빌려준다. 대표적 사회적은행인 네덜란드의 트리오도스 은행은 무기 산업이나 전쟁관련 기업 환경을 훼손하거나 인권을 경시하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역시 무보증 무담보 서민대출로 서민경제에 선순환을 끼치는 대표적 사회적 은행이다. 필요한 것은 제도와 교육이다. 은행이라는 시스템을 개편하고, 화폐제도가 바뀌면서 교육과 돈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비로소 평화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