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의 착취를 뒷받침하는 힘
국가, 법, 폭력. 이 셋은 마지막 ‘폭력’으로 수렴되는 것같아요. 이 셋이 힘을 합쳐 자본가를 비호하고, 노동자, 또는 더 약한 생명을 착취하는 구조 자본주의를 유지보수한다는 논리적 귀결이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 빼앗길 것인가, 빼앗을 것인가
자수성가한 사람도 착취한 사람이 된 것이라는 현실이 냉혹하게 다가와요. 누구라서 착취의 대상이고 싶을까요. 착취당하는 자리에서 빠져나가고자, 기를 쓰고 ‘위’로 올라가려는 욕구가 너무나 당연하죠. 그러나 이 구조 안에서는 위로 올라가려면, 누구를 밟아야 해요. 그 현실이 생각할수록 기이합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안에서의 공정함’ 만으로는 도무지 생명과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요. 그 공정함의 추구와 함께 근원적인 ‘새판’을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네요.
- 화폐를 화폐답게 두는 것
지난 주 공부 후, “나는 화폐를 물신으로 대하진 않았을까?” 돌아보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마을밥상에 참 고마운 마음 많았습니다. 특히 육아품앗이할 때, 밥상이 없었다면 품앗이가 대체 가능하기는 했을까? 돌아보면 거의 어려웠으리라 생각되거든요. 그런데 최근 제가 경제생활을 멈춘 기간이 있었고, 그 동안 가정이 외벌이 상황이 되었어요. 그런 후 아이들과 함께 하루 두 끼 밥상에서 밥 먹는 것에 경제적 부담을 느꼈어요. 그래서 실제로 자주 집에서 밥을 해먹이곤 했어요. 그러나 당장 지내는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통장 잔고가 있었죠. 그럼에도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스스로를 성찰하며 한심하고 부끄러웠어요. 옆지기(아내)와 이 부분 나누고 함께 성찰하니 더욱 분명해졌죠.
그래서 그 이후로 오히려 전에 안 하던 달밥(한 달 밥상 신청)을 신청하게 되었어요. 차라리 한 달 밥값을 미리 내버리니, 밥값 지불하며 느끼던 경제적 부담이 사라졌어요. 이게 신용카드 메커니즘과 비슷한 것 같았어요. 그러나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은 물신주의에 귀의하는 행동이라면, 운동에 동참하는 달밥신청은 화폐의 신적 작동원리를 분쇄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환가치 또는 상징물일 뿐인 화폐가 역전되지 않도록 그것 본래 자리에 두려면, ‘돈’이라는 정체성에 맞게 막히지 않도록 적절히 순환시켜야 한다는 것,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어요.
불안과 욕망을 동시에 자극하는 자본주의 사회, 나 자신 착실하게도 배워왔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 듭니다. 화폐를 대할 때, 판단이 불분명한 부분이 생긴다면 흐지부지 넘기지 말고, 제대로 성찰해야 하겠다 다짐합니다. 또 지속해서 그리 살기 위해, 착취가 전제인 구조를 넘어서는 관계 속에 머물며, 끊임없이 성찰하고 구체적인 일상 속에 새로운 대안 찾으며 살겠다 다짐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