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노동 말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과정이 있진 않을까?’ 맑스는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것을 수식으로 증명했습니다. 내가 돈 내고 사는 상품에는 노동자의 수고와 더불어 다양한 재료와 다양한 생명의 숨결이 들어가지만 착취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노동의 대가를 적게 주고(자본가가 많이 착취하고), 많은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일자리 수도 점점 줄이고,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는 자리에 스스로를 앉히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유일한 생존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점점 노동의 대가는 줄어들고, 반대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많아지게 만듭니다. 더 많은 소비를 부추깁니다.
저의 10대 어느 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늦은 저녁에 집으로 가는 어느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길에서 흔히 마주할 법한 평범한 직장인의 퇴근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생기는 찾아볼 수 없고,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러나 굉장히 평범한 그런 사람이 새삼 가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웒하지도 않는 공부를 억지로 하고 있는 이유가 저런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란 생각에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그 시스템 속에 있으니 어느덧 그런 도시 직장인이 되기를 갈망하며 취직에 목 메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도시 임금 근로자가 되었습니다. 내 적성이나 좋아하는 것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일 이외의 직업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나도 모르게 학습된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했던 탓이겠지요.
낙오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월급을 받는 맛으로 한 달, 한 달을 버티며 살았습니다. 그 회사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지금 회사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싫지만 꾸역꾸역 다니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월급 때문이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백수(산업예비군)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거나 가족의 끼니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직장을 다닙니다. 그 와중에 눈치를 보아가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다른 직장에 간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건 없습니다. 월급이 조금 오르고 불리는 직책이 조금 달라질 뿐입니다. 결국 직장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 노동의 의미는 꿈과 낭만 이 되어버렸고, 그런 것들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매일 아침 지하철과 버스 속에 자기 몸을 우겨 넣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기 없이 희망과 생기 없이 연명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 하나뿐인 소중한 인생을 돈으로 맞바꾸고 있는데, 그나마 이것밖에 안되나 싶었습니다.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나는 고작 월 얼마의 인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돈을 덜 받아도 더 재미있고,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의미 있다고 생각한 일을 해보았지만 별로 다를 것 없었습니다. 그 의미라는 것도 한계와 문제가 명확했고, 실제적으로 내가 하는 노동은 그 전의 노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때 함께 모여 마을을 만들고 대안사회를 만든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삶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개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을 때는 정부에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국가 권력을 좀 착한 이들이 잡으면 좋아질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라는 중재자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는 이미 태생부터 자본가와 권력자 카르텔의 사유재산을 지키는 일을 위한 수단 일 뿐입니다. 간혹 노동자들의 수많은 희생과 치열한 운동을 통해 마지못해 조금 중재의 역할을 하는 듯 하지만 이내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수탈의 방편이 됩니다. 저는 2009년 용산철거사건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자기 터전에서 내쫓기고, 다치고, 죽는 일이 국가에 의해서 벌어졌습니다. 아마 그 시기가 국가가 쓰던 “민주, 혹은 중재자”라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주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저는 “밝은누리 인수마을밥상” 이라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직장에서 월급을 받듯, 매달 생활비를 받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예전 직장과 별 다를 것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토록 찾던,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만끽하며 일을 합니다. 운영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합니다. 함께 일하는 이들을 깊이 신뢰하고 배려하며 지냅니다. 다치거나 아프면 서로 더 품을 내어 빈자리를 기꺼이 메웁니다.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노동 시간을 조율합니다. 심지어 급여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내어 일을 돕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고마운 이들을 생각하면 정성을 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정성을 알아주고 고마운 마음으로 우리의 수고를 받아갑니다. 소비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고마움과 더불어, 재료가 되어준 생명들과 자연에 고마운 마음으로 노동의 결과물을 대합니다. 그 결과물이 결코 돈 얼마로 머릿속에 그리지 않습니다.
얼마전에 어떤 분이 지나가다가 밥상에 들려서 반찬을 둘러보시고 얼마인지 물으시고 그냥 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은 반찬이거나 교환가치를 따지며 다른 선택을 하신 것이겠지요. 하지만 지금 밥상을 주로 이용하는 분들은 반찬에 따라 먹고 안먹고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돈이 얼마인지에 따라 먹고 안먹고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정성껏 지은 밥과 반찬이라는 믿음, 온 생명을 더불어 살리는 밥이고 나를 살린다는 믿음이 있기에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고마운 마음으로 밥을 먹습니다.
이런 일터와 소비자가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새로운 대안 사회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돈으로 보지 않고 생명으로 볼 수 있고, 돈을 더 벌려고 하지 않고 내가 더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결정하고 선택합니다.
이번 강의를 함께 공부하며 처음에는 자본론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배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나와 내가 일하는 일터를 살피는 것이 저에게 중요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보는 마음, 온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 고마움을 아는 마음, 나의 소유라 여기지 않고 공유하는 것이라는 마음이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삶의 자세라는 배움을 얻었습니다. 잘 간직하고 배운 바대로 살아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배움을 피어내고 또 다른 이들이 피어내는 것을 함께 기대하겠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서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