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는 방법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타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마타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위해서 수행하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지혜가 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걸 원하시나요?
고요해 지길 원하시나요?
지혜가 나길 원하시나요?
그 목적이 다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방법도 틀리고 견해도 틀리고 다 틀립니다.
요기(수행자) 스스로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내가 고요해지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지혜가 나고 싶어 하는가?
고요해지고 싶으면 고요해지도록 수행을 해야 되고,
지혜가 나고 싶으면 지혜가 나도록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럼 그 두 가지가 뭐가 어떻게 다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고요해지게 하려면 대상에 유의해야 됩니다.
지혜가 나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다가 유의해서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마음에 탐, 진, 치가 들어 있을 것 같으면
지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요해지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한 대상에만 집중해야 됩니다.
지혜가 나기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많은 대상과 관계해서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볼 것 같으면 지혜의 힘이 약합니다.
많은 것을 알아야만 지혜가 납니다.
지혜의 힘이 좋아집니다.
고요해지고자 수행하는 사람은
한 대상을 집중해서 잡고 그것을 놓지 않고 봐야만 고요해집니다.
그것은 힘을 주어서 한 대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것은 되게 하려고 해야만 됩니다.
지혜가 생기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대상에 너무 집중하지도 않고
대상을 꽉 잡지고 않고 오히려 그걸 놓으려고 합니다.
힘을 줘서 특정 대상에 집중해서 수행해서는 안됩니다.
▪지혜롭게 해야만 됩니다.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롭게 해야만 됩니다.
지혜롭게 계속적으로 알아야만 됩니다.
관찰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봐야 됩니다.
보는 마음에 조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견해가 발라야만 됩니다.
알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알고자하는 마음이 로바로서 알고자하는 마음이 아니라
어떤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로바로서 알고자 한다면 마음에 힘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힘을 주어서 집중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사띠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항상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아침에 깰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해야 합니다.
너무 집중하는 사람은 힘들어서 하루 종일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몸 전체를 한번 보십시오.
그냥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뭐가 있나요?
앉아 있는 것 알 수 있나요?
닿는 느낌을 아나요?
시원하고 더운 것을 아십니까?
만약 이런 몸의 느낌과 관련된 것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했다면
그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것만 알아차리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정대상을 봐야겠다고 정해놓으면 다른 대상은 들어오질 않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른 대상엔 아예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하는 것,
그런 다른 대상들이 있지만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한가? 동요하는가?
긴장하는가?
들떠는가?
그런 것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앞에 이야기 한 것을 알기위해서 얼마나 집중을 해야만 되겠습니까?
별로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힘들게 수행하면 안 됩니다.
알 수 있는 대상을 어떤 대상이든지 알아차리면 됩니다.
사띠가 있기만 하면 됩니다.
좌선을 할 때도 그렇게 알아차리면 되고
경행을 할 때도 먹을 때도 방에 있을 때도 그렇게 알기만 하면 됩니다.
첫댓글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사두ㅡ사두ㅡ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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