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명 여류시인 이옥봉에 대해 ~ - 혜음령 능선 아래에 서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夢魂 : 몽혼 /꿈속의 넋) 임은 요즘 어떠신지요? 창문에 달 비치면 새록새록 임 그리워, 꿈길 따라 발자국 남기기로 하자면, 임의 집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외다. 언제 올까 남편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그린 ‘몽혼’이라는 제목의 시다. 만일 사람의 넋이 흔적을 남기며 다닐 수 있다면 임을 향한 혼백은 수백 아니 수 천 번이라도 대문 앞을 들락거려 문 앞의 돌이 닳아서 모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시의 작자는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이숙원(李淑媛)의 시다. 그의 호가 옥봉(玉峰)이어서 이옥봉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3대 여류시인이라하면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을 든다. 이중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은 한시를 썼고 황진이는 시조를 쓴 점에 착안하여 한시를 쓴 옥봉을 넣어 허난설헌, 신사임당, 이옥봉을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는 문학작품의 장르의 분류에 따른 것으로써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옥봉은 조선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였다. 그 이후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다. 당시는 적서의 차별이 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정식 중매를 넣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선조 때 승지에 오른 조원(趙瑗)을 흠모했다. 조원은 효성이 지극하고 자손의 교육에는 단엄(端嚴)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옥봉은 조원의 첩이되기로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조원은 거부한다. 하는 수 없이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조원의 장인인 판서대감 이준민(李俊民)을 찾아가 사정을 하게 된다. 조원은 장인의 청도 있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옥봉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조건을 하나 달았다. 그것은 옥봉이 향후 시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조건은 시대적 아픔을 시로써 달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옥봉에게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이후 그녀가 써준 시 한편이 관가의 사법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겪는다. 사연인즉, 조원 집안의 산을 관리하는 산지기가 억울하게 파주 관아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옥봉이 그 억울함을 밝히는 시를 지어 보냈는데 시를 읽은 파주목사는 산지기를 풀어준다. 이 사건은 옥봉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존여비와 적서의 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첩이 시를 짓고 관아에 로비를 한다는 일은 사대부의 눈에는 가당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못마땅했을 것이다. 이는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도전이고 남존여비, 적서차별에 따른 사회제도를 허무는 행동으로 비쳤을 것이다. 마침내 조원은 조건 위반을 이유로 옥봉을 친정으로 내쳤다. 위의 시 몽혼에도 그 당시의 심경이 잘 그려져 있다. 여성으로서 문필활동과 사회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버린 지아비를 못 잊어하는 평범한 여인의 성정을 고스란히 가지기도 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자기를 내친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이불속에서 훌쩍이는 옥봉의 지극히 여성스러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평생동안 이별의 한으로 병이 들어 술이나 약으로도 다 소용이 없네 이불속 눈물은 차디찬 얼음장 밑의 물 같고 밤낮을 울어도 그 누가 알아주나 平生離恨成身病(평생리한성신병) 酒不能療藥不治(주불능료약불치) 衾裏泣如氷下水(금리읍여빙하수)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離恨 : 리한 /이별의 한) 안타까운 일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옥봉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녀의 생몰연대도 모르고 사망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중국의 어느 바닷가에 시편을 몸에 감은 시신이 떠올랐다는 이야기만 설화처럼 전해져 오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 줄 뿐이다. 중국과 조선에서 펴낸 시선집에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과 함께 옥봉의 시가 실릴 정도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그녀의 시 32편이 남편 조원이 쓴 가림세고(嘉林世稿)에 부록으로 전한다는 점이다. 후세의 종중원들은 옥봉할머니가 자기를 내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사랑을 마냥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2017년 4월 남편인 운강공 조원의 묘지 바로 아래에 옥봉의 묘소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때를 잘못 타고난 옥봉은 종법제도가 지배하던 조선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추상같이 준엄했던 지아비로부터는 내쳐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였다. 마침내 그녀의 혼백은 후손들의 도움으로 파주 혜음령 고개 아래에 남편 곁에 묻히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 보다 깊은 사랑은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