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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矢禮(고시례)
高:높을 고, 矢:화살 시, 禮:예도 례.
어의: 고시에게 드리는 예, 단군시대에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고시에게 예를 차린다는 뜻이다. 농민들이
들녘에서 참을 먹거나 점심을 먹을 때 맨 처음 술이나 밥을 주위에 던지며 외치는 말이다.
출전: 한국민속담(韓國民俗談)
고시(高矢)라는 말은 단군(檀君) 왕검이 나라를 세운 후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내린 직책으로 지금의 농림부장관과 같은 직위였다. <신시본기(神市本紀)>의 기록에는 당시의 농민들은 고시의 지시에 의하여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 사람들은 그 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하다가 참을 먹거나 점심 식사 때 먼저 예를 갖추는 고사(告祀)를 지냈던 것을 오늘날의 고시례(高矢禮)라고 한다. 그런데 혹자는 음식에 따라온 귀신을 쫓고 들판에 있는 잡귀를 좇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유래가 지금은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떼서 던지며 ‘고시례’ 하고 외치는 풍습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관습이 나중에는 남의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도 먼저 한 쪽을 떼서 던지며 ‘고시례’ 하는 의례적인 관습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는 중국 신화에서 농사를 주관하는 염제 신농씨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더러는 이를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귀중한 민속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선조들이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아 자연과 더불어 친화적으로 나누고자했던 심정적인 미덕도 같은 범주의 예라 할 것이다.
명절이나 제사의 차례상(茶禮床)을 올릴 때에 차 대신 술을 먼저 모사에 조금씩 세 번 따른 뒤 신주 앞에 올리는데, 이 또한 고시에게 예를 표했던 것처럼 조상님께 에를 표하는 행위다.
위에서 말한 차례(茶禮) 또한 우리 선조들이 술 대신 차(茶)를 조상께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예물에서 가장 귀한 예물이 차였음은 차가 조선시대의 혼례 필수 예물이었던 점만 봐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앞서 가신 선인들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를 이처럼 잊지 않고 표했던 것이 우리 민족이다. 그러니까 위의 예는 우리 선조들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 고시의 공을 감사히 여기는 마음에서였다. 지방에 따라 ‘고시례’나 ‘고수례’ 등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나 뜻은 위와 같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曲逕凌遲(곡경능지)
曲:굽을 곡, 逕:소로 경, 凌:능가할 능, 遲:늦을지.
어의: 곡경은 부정한 사유로 세력을 잡는다는 뜻이고, 능지는 능지처참의 준말로, 죄인의 사지를 베는 극형을
말한다. 부정하게 권세를 잡아 영화를 누리면 끝에 가서는 극형을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출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조선시대 쌍리(雙里) 이이첨(李爾瞻.1569~1625)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해군 때에 정권을 잦아 정국을 좌지우지하다가 능지처참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여 권력의 문에 들어섰다,
선조(宣祖)의 후사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대립하자 그는 광해군(光海君)을 옹립하려는 대북의 영수가 되어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는 소북(小北)을 논박하다가 선조(宣祖)의 노여움을 사 갑산(甲山)으로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아들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이이첨은 일약 예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권세를 얻게 되자 그는 죽령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잡혀 온 박응서(朴應犀)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자백을 하게 했다.
그렇게 누명을 씌워서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 증살(蒸殺. 삶아 죽임)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사사하게 했으며, 인목대비도 서궁에 유폐시켰다. 그 후 계해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극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세 아들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이첨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어느 날, 관아에서 일을 마치고집에 돌아가다가 의관이 부서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맹인을 만나 그 까닭을 묻자 맹인이 대답했다.
“소인은 점술가인데 공의 아들이 공의 장래에 대하여 길흉을 묻기에 계해년 2월에 흉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더니 화를 내며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이첨은 맹인에게 사과하고 그 대가로 물건을 후하게 주어 보냈다. 그리고 아들을 꾸짖었다.
“너의 물음에 맹인이 점괘대로 대답했는데 그것이 어찌 죄가 된다고 매질을 하였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죄를 짓게 했구나.”
그도 자신의 곡경능지(曲逕凌遲)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정한 방법으로 지위가 높아진 사람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진리에 의해 재앙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公鷄不産卵(공계부산란)
公:공평할 공, 鷄:닭 계, 不:아닐 부, 産:낳을 산, 卵:알 란.
어의: 공계(수탉)는 알을 낳지 못한다. 어떤 일을 성사시킬 수 없을 때 변명의 의미로 쓰인다. 명신 이덕형이
선조에게 ‘저는 수탉이라서 알을 낳지 못하여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한국인의 야담(野談).
조선 14대 선조(宣祖)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조회(朝會)를 하고 있었다.
승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뒤늦게서야 도착하여 조용히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데 참석한 대신들이 저마다 품속에서 계란 세 개식을 꺼내 상감마마 앞에 정중히 바치는 것이었다.
‘이상한 지고……?’
지각을 한 터라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한음은 생각했다.
‘무슨 일일꼬? 상감마마께 계란을 바치다니……, 상감마마께서 잡수시려고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고, 분명 무슨 곡절이 있는 거로구나.’
한음은 어제 아내가 앓고 있어서 다른 대신들보다 일찍 퇴청했었다. 때문에 자신이 퇴청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왕이 물었다.
“계란을 안 가지고 온 사람 없겠지?”
한음은 잠시 망설이다 갑자기 엉덩이를 푸드득! 푸드득! 치고 나서 ‘꼬끼오’ 하고 수탉의 울음소리를 냈다.
용상에 앉아 있던 선조는 물론 만좌의 백관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바라보았다.
“이 승지(李承旨)! 승지는 평소 짐 앞에서 실수를 한 적이 없었거늘, 방금 그 괴성은 무슨 소린고?”
“네, 수탉의 울음소리이옵니다.”
“뭐, 수탉의 울음소리? 왜 그런 해괴한 소리를 내는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상감마마께서 방금 들으신 대로 저는 수탉이라서 알을 낳지 못하여 계란을 가져오지 못했나이다.”
만좌의 백관들은 천연덕스럽게 아뢰는 한음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선조도 내심 만족스러웠다. 사실은 선조가 이덕형의 재치를 시험해보려고 꾸민 일이었다.
한음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교섭하여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막게 하고, 자신은 접빈관(接賓官)으로 활약했다.
그 후, 그는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양근(陽根)에 내려가 죽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公事無私(공사무사)
公:공평할 공, 事:일 사, 無:없을 무, 私:사사 사.
어의: 공적인 일에는 사적인 감정이나 정실이 없다. 즉 어떤 일을 함에 개인의 욕심이 없이 공명정대해야 한다
는 뜻이다.
문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事典)
조선 제3대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검찰총장)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59~1438)은 부하인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같이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면서 태종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 일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한주(韓州)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과 도승지 황희(黃喜)의 간곡한 해명으로 풀려나 이조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세종(世宗)이 친히 <태종실록>을 보고자 하자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실록에 수록한 사실들은 먼 훗날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기록입니다. 때문에 이를 보신다 하더라도 내용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들도 전하를 선례로 삼아 모두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관들은 혹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아니 되니, 뒷사람들에게 사실과 신의를 전달할 수 있게 보시지 않는 것이 옳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올바른 충정을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영전시켜 주었다.
그는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공헌을 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정승으로 있을 때에도 집의 지붕에서 빗물이 새고, 고향에 갈 때에도 남루한 차람으로 행차하여 그곳 수령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야유하는 일도 있었다.
시문(詩文)과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청백리에 추대되었고, 효자정문(孝子旌門)도 세워졌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共水騙賣(공수편매)
共:한가지 공, 水:물 수, 騙:속일 편, 賣:팔 매.
어의: 공공의 물을 속여서 팔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판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감쪽같이 속이는 행위를
이른다.
문헌: 한국해학소설집(韓國諧謔小說集)
평양(平壤) 선교리에 봉이(鳳伊) 김선달(金先達)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똑똑하고 재주가 많았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과거를 볼 수가 없었다.
선달이라는 직위는 그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자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주위의 사람들이 편의상 붙여준 것이었다.
김 선달은 자기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벼슬길에 들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선교리 동구 밖에 있는 능라도 주막집에서 소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려한 비단옷 차림의 한양 사람들이 때로 몰려와 평양 거리를 쓸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평양의 특산물을 싸게 싹쓸이 해다가 한양에서 비싸게 팔려는 투기꾼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돈을 전대에 차고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물건을 후려치는 등 볼썽사납게 굴었다.
김 선달은 그들의 행위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골탕 먹일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대동강가로 가는데 갑자기 물장수들을 만나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오른 선달은 모사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물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 주막에 가서 대포나 한잔 합시다.”
“아니 선달님께서 어쩐 일로 술을 다 사십니까?”
“내 술은 술이 아닌가? 마셔 보게나, 아주 달콤할 테니…….”
마침 출출하던 물장수들은 선뜻 김 선달을 따라나섰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아가 입에 침이 돌자 선달이 제안을 했다.
“여보게들! 내가 재미있는 일을 한번 벌여 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겠나?”
“좋지요! 무슨 일입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엽전 다섯 냥씩을 나누어 줄 테니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 갈 때마다 나에게 한 냥씩만 주고 가면 돼! 한 이삼일만 하면 될 게야.”
“그까짓 일쯤이야 협조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드리지요.”
“자, 그럼 내일부터 내가 여차저차하면 당신들은 저차여차해주시오 그럼 내 섭섭지 않게 인사는 하리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다섯 냥씩을 나누어 주었다.
다음 날, 김 선달은 커다란 소쿠리를 챙겨들고 물장수들이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 마을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장수들은 약속대로 엽전을 한 냥씩 소쿠리에 던져 주고 갔다.
잠시 후, 한양의 패거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물장수들에게서 꼬박꼬박 엽전 한 냥씩을 받는 김 선달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아니 영감은 지금 무슨 돈을 받고 있는 거요?”
“보면 모르시오? 물값이오. 물값! 내 강에서 물을 길어 가니까 물값을 받아야 할 것 아니오.”
“아니 저 대동강 물이 모두 당신 것이란 말이오?”
김 선달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허허! 그렇대두요. 남의 장사 방해하지 말고 저리들 가시오. 보아하니 한양에서 온 양반들 같은데 꽤나 답답들 하시구만!”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이 밝았다. 김 선달은 또다시 강가로 나가 어제처럼 돈을 받았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한양 투기꾼들이 다시 몰려 나왔다. 그때 물지게를 지고 오는 사람에게 김 선달이 말했다.
“자네는 밀린 돈이 열 냥인 거 알고 있지? 내일은 모두 가지고 와야 하네.”
“네! 내일은 틀림없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투기꾼들은 김 선달에게 대동강 물을 팔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김 선달은 못이기는 척 물러나며 말했다.
“내 자손대대로 편히 먹고 살 소중한 재산인데……, 하지만 어르신네들의 말씀이니 어쩔 수 없구려, 얼마면 사실 생각입니까?”
“2천 냥이면 어떻겠소?”
“2천 냥? 어디 셈을 한번 해봅시다. 하루에 오십 냥만 치더라도 열흘이면 오백 냥, 그럼 한달 열흘이면 본전을 모두 뽑는데……, 헤헤! 그걸로는 어림도 없소이다.”
“노인장, 그러지 말고 우리들의 성의를 봐서 적당한 선에서 넘겨주시오. 그럼 배를 올려 4천 냥 드리리다.”
“안 되오. 정히 그러시다면 5천 냥을 당장 현금으로 내시오. 그 전에는 아예 말도 꺼내지 마시고……,
투기꾼들은 5천 냥이면 엄청난 돈인데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전대를 풀어 돈을 보이면서 매매를 해버리자고 서둘렀다. 물론 간단한 계약서도 썼다.
김 선달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들을 두고 돈자루를 지고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한양 양반 패거리들은 길목에 천막까지 치고 느긋하게 앉아서 돈을 받으려 했으나 돈을 내는 물장수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왜 물값을 안 내는 거요?”
“물값이라니, 무슨 물값을 내라는 거요? 당신들 미쳤소?”
물장수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빤히 쳐다봤다.
“우리가 저 대동강을 샀단 말이오. 그러니 오늘부터는 물값을 우리에게 내고 가슈.”
젊은 물장수가 나서며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허, 이런 얼간이들을 보았나! 저 대동강 물이 누구의 것인데 누구한테 어떻게 샀다는 거요?”
그러자 투기꾼들은 계약서를 내밀면서 한사코 물값을 내라고 했다. 그러자 물장수가 말했다.
“쯧!쯧! 당신들이 속은 거요. 우리는 그 선달 영감이 여차저차하면 저차여차해달라기에 그렇게 해준 것뿐이란 말이요.”
그제야 한양 양반 패거리들은 땅을 치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김 선달은 이미 물 판 돈 중에서 일부를 물장수들에게 나누어 주고 평양을 떠난 뒤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空心修德(공심수덕)
空:빌 공, 心:마음 심, 修:닦을 수, 德:큰 덕.
어의: 마음을 비워야 덕을 닦을 수 있다는 뜻이다. 찻잔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더 이상 다른 물을 부을 수 없듯
이 아집과 사심을 버려 마음을 비워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욕심을 버려야 덕을 쌓을 수 있다는
뜻.
문헌: <한국인의 야담(野談) 잡기(雜記)>
오재두(吳再斗) 스님이 오랜 수행 생활을 통하여 학문이 깊어지자 세상 사람들에게 바른 삶의 도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법문(法文)을 열었다. 그러자 원근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절 문이 닳도록 붐볐다. 스님은 누가 찾아와도 마다하지 않고 늘 겸손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사는 선비 셋이 스님을 시기하여 헛소문을 퍼뜨리며 헐뜯었다.
“겨우 땡중 주제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염불 몇 줄 외우고, 불경(佛經) 몇 권 뒤적인 주제에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양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틀림없이 그저 사술(邪術)이나 펴는 똘중일 게야.”
그들은 스님의 학덕을 깎아내려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지식이 우월함을 내세우려고 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찾아가 골탕을 먹여줍시다.”
이렇게 작당한 세 선비가 스님을 찾아가서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척하면서 말을 걸었다.
“저희는 산 아래 사는 선비들이온데 스님께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스님은 선비들의 인사를 받고 방으로 안내한 다음 찻잔을 내놓더니 아무 말 없이 찻잔에 뜨거운 작설차(雀舌茶)를 넘칠 만큼 가득 부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은 너무 뜨거워서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그때 스님이 선비들에게 말했다.
“소승이 미련하여 물을 너무 뜨겁게 했군요. 여기 찬물이 있으니 이걸 부어 식혀서 드시지요?”
그러자 선비들은 웬지 자기들이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다.
“여보시오, 스님! 이렇게 찻잔이 넘칠 지경인데 어떻게 여기에 찬물을 더 부으라는 거요?”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소승에게 배우러 왔다는 분들이 자기의 아집과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소승의 말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제 말을 듣기를 원한다면 우선 마음을 깨끗이 비우셔야 됩니다. 마음에 빈 자리가 많을수록 많이 배울 수 있는 법이지요. 자만과 아집이 가득한 마음은 찻잔에 물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스님의 얘기를 듣고 선비들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조차 들지 못하고 암자를 떠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箜篌引(공후인)
箜:공후 공, 篌:공후 후, 引:이끌 인.
어의: 남편이 강물에 빠져 죽음을 슬퍼하여 부른 노래. 고조선시대의 노래 <황조가>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절개를 지킨 백수 광부의 처가 부른 노래다.
문헌: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고조선(古朝鮮) 시대의 시가(詩歌)인 <공후인(箜篌引)>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대동강에서 뱃사공을 하던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어느 날 새벽에 강으로 나갔는데 백수광부(白首狂夫:흰 머리의 미친 사람)가 강을 가로질러 건너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화급히 따라가며 건너지 말라고 소리쳐 불렀으나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물속으로 들어가 결국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강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그래도 임은 기어이 건너가셨네.
墮河而死(수하이사) 결국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하오리.
노래를 다 마친 그녀는 남편이 빠져 죽은 강물로 들어가 목숨을 끊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곽리자고는 집에 돌아와 처 여옥(麗玉)에게 나루터에서 있었던 일을 노래와 함께 이야기해 주었다. 여옥은 그 사연을 듣고 몹시 슬퍼하면서 공후를 가지고 남편이 불러 주는 시가에 곡조를 붙여 <공무도하가>를 완성했다.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노래는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의 <황조가(黃鳥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