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로프스키 왕자님
“공주님!”
“…….”
“공주님, 일어나요.”
“…….”
“공주님, 그만 주무시고 얼른 일어나세요.”
“…….”
잠결에 누군가가 계속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입김이 귓가는 물론 귓속을 마구 간질였다.
‘아잉, 누구야? 정말 귀찮아 죽겠어.’
그 누군가가 잠을 깨우려들수록 고운이의 몸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둥둥둥둥, 둥둥둥둥…….’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서 아련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갑자기 풍선처럼 가벼워져 두둥실 떠오르더니 북소리가 들려오는 그 곳으로 자석에 끌려가듯 이끌려갔다. 의식 또한 더욱 깊은 꿈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공주님!”
이번에는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한층 더 커진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공주님, 저랑 함께 가야 할 데가 있어요. 얼른 일어나세요.”
“싫어, 안 일어날래. 졸립단 말이야.”
고운이는 잠결에서도 잠을 깨우는 존재가 엄마라 여겼다. 그래서 발끈 짜증을 내며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고운이는 한번 잠에 빠져들면 도깨비가 떠메고 가도 모를 정도로 잠꾸러기다. 때문에 잠을 깨우려는 엄마와 이불 속에 잠깐이라도 더 머물려는 고운이와의 전쟁은 이른 아침마다 늘 벌어지는 일상이다.
“공주님, 눈을 떠보세요. 얼른요. 저랑 함께 가야한다니까요.”
순간, 시커먼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이 커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고운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 강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휘위이잉~!’
몸은 소용돌이에 휩싸여 팽이처럼 팽팽 돌았고, 회전하는 속도도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어지럼증에 머리가 혼미해지면서 가슴도 벌렁벌렁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듯했다.
“아아……. 엄마, 나 좀 살려줘!”
가위에 눌렸다가 소스라치게 깨어난 고운이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괴상한 털북숭이의 얼굴이었다. 얼핏 보니 테디베어와 쏙 빼닮았다.
‘웬 인형?’
그런데 두 눈을 힘껏 비비고 다시 바라보니, 분명 인형의 얼굴은 아니었다. 왕방울 같이 툭 불거진 눈을 껌뻑이고, 주둥이 양 옆으로 길게 뻗은 몇 올의 빳빳한 털들이 움찔거리는 것이 사람, 아니 동물의 얼굴이었다.
“누…… 누구니, 너는?”
뜻밖의 상황에 고운이는 말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그 낯선 방문자에 대한 경계심은 금방 허물어졌다.
‘사슴? 아니야, 사슴은 머리에 뿔이 달렸잖아. 그렇담……, 노루? 캥거루? 다람쥐?’
웬일일까?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인데다 흰색과 금갈색, 검정색 무늬의 털로 뒤덮인 얼굴이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귀엽기까지 했다.
“공주님, 이제 잠에서 깨어나셨군요.”
털북숭이는 고운이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 봐. 첨 보는 나더러 공주님이래. 그러는 너는 누구냐구?”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한 고운이가 따지듯이 되물었다.
“저는……, 그러니까…… 로보로프스키 왕자랍니다.”
털북숭이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떠듬떠듬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고운이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겉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로보로포키…… 왕자? 푸훗…… 무슨 왕자?”
고운이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을 정중하게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스웠지만, 괴상하게 생긴 동물이 스스로를 왕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모든 햄스터들이 꿈에 그려왔을 그런 따뜻한 남쪽나라에 햄스터가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질서도 생겨났고, 계급도 생겨났으며,‘도와프’라 명명된 왕국이 탄생하였다.
이후 도와프왕국은 현명한 왕들과 정직한 각료들, 그리고 부지런한 백성들로 인해 수십 세대를 이어오면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가 있었다.
도와프왕국엔 두 종족이 함께 살아왔다. 그들은 흰색 바탕에 갈색무늬 털 코트를 입은,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시리안족과 흰색과 금갈색 바탕에 검정색무늬 털 코트를 입은, 몸집은 작지만 대신 머리가 좋은 도와프족이다.
그 오랜 평화도 두 종족 간의 불화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시리안족이 도와프족을 몰아내기 위해 전면 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시리안족을 대표하는 브루투스는 도와프왕국의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이자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이다. 브루투스는 도와프왕국의 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높은 지위를 도와프족이 독차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에 시리안족은 힘든 일만 죽어라 해도 출세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며, 시리안족을 선동했다.
“우리 시리안족이 도와프족 보다 수적으로 서너 배 이상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리안족 가운데에서 왕이 나와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의 우렁찬 연설에 수많은 시리안 햄스터들이 박수를 치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맞고요.”
“우리 시리안족이 도와프족 보다 힘으로나 덩치로나 훨씬 세고 훨씬 월등하지요. 그런데 왜 높은 자리는 모두 도와프족이 차지합니까? 그럼 안 되지요.”
“암요, 안 되고말고요.”
“도와프족은 편하게 놀고 지내면서도 좋은 집에서 살고, 맛있는 음식도 배불리 먹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리안족은 적들로부터 왕국을 지켜가며,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우고 성벽도 쌓고 우물도 파는 등 아주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별로 좋지 않은 집에서 살아야 하고, 또 맛도 별로 좋지 않은 음식만 먹어야 합니다.”
“듣고 보니, 정말 불공평하네요.”
“그럼, 우리 시리안족 모두가 힘을 합쳐 도와프족을 몰아냅시다!”
“몰아냅시다!”
그리하여 도와프왕국 거리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몰아내자, 도와프족!”
“몰아내자, 로보로프왕가!”
시위군중이 내지르는 함성과 그들이 내닫는 발자국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이게 뭔 일이래요?”
도와프왕궁을 중심으로 대저택이 밀집한 블룸블룸가의 도와프 햄스터들이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거대한 함성과 지축을 뒤흔드는 발자국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축제라도 있나요?”
“축제요? 지금이 어느 땐데.”
“아니면, 왜 이리 시끄럽지요? 인간들이 쳐들어왔나요?”
“글쎄요.”
밖을 내다 본 도와프 햄스터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찌 저런 일이?”
순식간에 그 넓디넓은 블룸블룸광장은 더 이상 발 디딜 데가 없을 정도로 시리안 햄스터들로 그득 찼기 때문이다.
“몰아내자, 도와프족!”
“몰아내자, 로보로프왕가!”
콩나물시루처럼 광장 안에 그득 찬 햄스터들이 발을 쾅쾅 구르면서, 한손을 높게 치켜들고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쳐댔다.
“자세히 알아보니, 시위 주동자가 브루투스라하옵니다.”
“뭐, 브루투스 사령관이 주동자라고?”
“네.”
“이유가 뭔데?”
“왕의 자리도 내놓으라 하고, 또 높은 자리도 몽땅 내놓으라 하옵니다.”
로보로프왕은 각료들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전해 듣고, 생각에 골똘히 잠겼다. 아무리 궁리해도 묘책이라곤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로보로프스키 왕자가 나섰다.
“아바마마, 제가 브루투스를 잘 설득해 볼 테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하여 왕자가 직접 브루투스를 상대하게 되었다. 왕자가 다윗이라면 브루투스야말로 골리앗으로 비교될 만큼 기골이 장대했다. 그렇지만 왕자는 품위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그와 맞섰다.
“장군의 주장대로 체제가 바뀐다면,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 온 이 나라의 평화와 번영이 앞으로도 잘 유지될 것이라 믿고 있는지요?”
“왕자님, 우리 시리안족이라 하여 도와프족만 못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행복이니 평화니 하는 것들은 내가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을 때에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네. 그런가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또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기꺼이 할 때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기도 합니다. 즉 자신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네, 그렇군요.”
“그리고 시리안족이다, 도와프족이다 하여 편을 가르지는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종을 초월하여 하나의 햄스터 가족이니까요.”
왕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브루투스는 한 순간 왕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시리안 햄스터들을 선동했던 잘못을 깨닫고 왕자에게‘시위를 중단하겠노라’약속했다.
“왕자님! 제가 성을 지키는 수문장으로서, 또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가장 대응하기 힘든 상대는 인간이랍니다. 인간이 우리 햄스터들을 자꾸 납치해 가서 모든 햄스터들이 불안에 떨고 있답니다. 지혜로운 왕자님께서 잘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 저런! 그럼 내가 나서서 인간을 설득해 보리다.”
왕자는 브루투스 외에 로보로프왕과 모든 각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인간세계의 아름다운 공주와 혼인을 하여 인간으로부터 도와프왕국을 지키겠노라’큰소리를 쳤다.
로보로프스키 왕자는 천신만고 끝에 인간세계의 고운이 공주를 신부로 맞이하게 됨으로서 그의 큰소리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도와프왕국은 역사상 유례없던 큰 축제로 활기에 넘쳤다. 넓디넓은 블룸블룸광장에 도와프족과 시리안족을 가리지 않고 햄스터란 햄스터는 모두 모여들었다. 모두들 세기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였다.
정오를 가리키는 태양 직사광이 오벨리스크 첨탑 위 제단의 성화를 점화하여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 순간 캠벨스 대제관이 주재하는 가운데 신랑 로보로프스키 왕자와 신부 고운이 공주의 장엄하고도 화려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로보로프스키 왕자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눈부신 신부를 맞아‘영원토록 사랑하겠노라’했다. 그리고 고운이 공주 또한 자그마하지만 늠름하여 꽤 믿음직스러운 신랑을 마찬가지로‘영원토록 사랑하겠노라’했다.
결혼식을 마친 로보로프스키 왕자와 고운이 공주는 신혼여행에 나섰다. 그들을 태운 쌍두마차가 구름 사이에 드리워진 일곱 빛깔 무지개다리를 막 건너려는 순간, 무지개다리는 물론 쌍두마차까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고운이는 구름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엄마야! 나 좀 살려줘!’
이불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고운이는 때맞춰 고운이의 늦잠을 깨우러 들어온 엄마가 이불을 활짝 걷어주는 바람에 가위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아니, 우리 딸 오늘은 뭔 일이래? 단숨에 벌떡 일어나다니.”
“…….”
“우리 딸, 이마의 이 땀 좀 봐. 꽤 더웠나 보지?”
“…….”
엄마는 고운이의 이마에 송송 맺혀있는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다행히 열은 없네.”
그때 고운이 입에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우리 로보로프스키 왕자님이 무척 피곤했었나 봐.”
“어머, 어쩜…….”
손바닥 안에는 언제부턴가 자그마하고 귀여운 햄스터 한 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햄스터는 곤한 잠에 빠져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2014/02/22/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