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밀양출생 *밀양초, 밀양중, 밀양 농잠고 졸업. *1967년 ‘아카시아 이별’로 가요계 데뷔. 2000여 곡을 작곡한 한국 가요사의 산증인. *어릴 때 ‘신동’으로 불려 조영남의 <옛생각>을 밀양여고 뒷산에서 작곡. *중2 때 <가고파>에 매료되어 꿈에 그리던 김동진 선생에게 사사.
-밀양, 지역주의 타파없이 미래없고, 향우 <2023밀양 방문의 해> 적극 동참해야!-
정풍송 선생은 어릴 적 아동산 기슭의 영남루 주변에서 뛰놀며 대나무를 꺾어 구멍을 내어 피리와 퉁소를 만들고, 미군 전화선에서 강철 줄을 뽑아 하프 비슷한 악기를 만든 다음 배운 적 없는 연주를 해 주변으로부터 ‘신동’이라 불렸으며, 83세가 된 지금 한국 대중음악계의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정풍송 선생은 지난해 11월 22일 서울 은평문화회관에서 한국가요작가협회가 주최한 <제15회 가요작가의날 시상식>에서 작가대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작사·작곡가들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상이다.
그리고 그달 30일에 서울 여의도 63빌딩 그랜드볼륨에서 열린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선생은 ‘한국을 빛낸 작곡상’을 수상했다. 2020년 10월에는 ‘트롯 100년 어워즈 작가상’(TV 조선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21년 3월에는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한국연예예술총연합합회)에 이은 최고 권위의 상들을 수상함으로써 57년의 대중음악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런 정풍송 선생을 구랍 22일 오후 서울시 중구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빌딩에서 만났다. 선생은 8년 째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어린이들의 참상을 보면서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이란 제목의 노래를 작사, 작곡, 편곡을 해 가수 김다현의 목소리로 영어·한국판을 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선생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게 보이고 활력이 넘쳤다. 이에 대해 정풍송 선생은 평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는 습관 때문이라고 했다.
밀양초등총동창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모교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향우로 회자되고 있는 선생은 이날 “고향 언론인”이라며 특유의 화법으로 본 기자를 정겹게 맞아 주며 그의 음악인생을 들려주었다.
올해로 대중음악계 입문 56주년을 맞이한 선생은 가수의 음반 취입용 노래, 영화 음악, 방송가요 등으로 지금까지 작곡한 노래는 2000여 곡에 이른다.
정풍송 선생은 1967년에 가수 이영숙의 <아카시아의 이별>을 작곡하며 대중음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노래는 1965년 청룡부대 대원으로 베트남에 파병됐을 때 만든 노래다. 한상일이 부른 <웨딩드레스>는 1969년 <아마도 빗물이겠지>를 타이틀곡으로 발표한 첫 작곡집 앨범에 담긴 12곡 중의 한 곡이다. 당시로선 드물게 이 두 곡이 동시에 히트해 주목 받았다.
1980년 지구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거기서 조용필을 만나 그의 인생에 황금 시대를 열었다. 하루는 조씨가 찾아와 “크게 히트할 곡을 부탁합니다”라고 해 새 곡을 만들려다 이미 작사, 작곡해 뒀던 <미워 미워 미워>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음반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100만장 넘게 팔린 것이 공인되면서 미국 암펙스 골든릴상을 받았다. 일본 소니 측이 일본에 음반을 내고 일본 A 급 가수 16명이 리메이크할 정도로 대박을 치기도 하였다.
이어서 선생은 조용필 씨에게 <허공>을 주기로 했다. 1982년 반주음반을 녹음했지만 <미워미워미워>의 히트로 조 씨가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느라 3년 뒤 노래를 녹음 해 음반을 내놓자마자 폭발적 인기몰이를 하며 국민가요가 될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노래로 1986년 골든디스크 상을 받았다. <허공>은 일반인들이 모르는 사연이 있는 노래다. 이 노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기대했던 민주화가 12·12쿠데타 신군부 등장으로 물거품 되자 허망하고 참담한 심정을 삭일 수 없어 펜을 들어 만든 곡이라고 하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
당시 군사정권 공연윤리위원회 사전 검열에서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로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 게 뻔해 고민 끝에 ‘민주’를 ‘그대’로 바꾼 것이었다.
정풍송 선생은 1969년에 발표한 <잊으려 했는데>부터 작사가 필명으로 ‘정욱’을 쓰기 시작했다. 혼자서 작사, 작곡, 편곡, 지휘, 디렉팅까지하고 히트곡이 늘자 주변에서 핀잔이 있어서였다. 선생이 작곡한 <밀양시가(密陽市歌)도 작사는 필명인 정욱으로 돼 있다.
이렇게 해서 선생은 가요계 입문 56년 동안 <허공><갈색추억> <미워 미워 미워> <미움인지 그리움인지> <진정인가요> <웨딩드레스> <옛 생각> <석별> 등 2000여 곡을 작사, 작곡했다.
나훈아, 이미자, 조용필, 패티김, 조영남, 최희준, 최진희, 홍민, 한혜진, 주현미, 윤수일 등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들이 정 씨의 작품을 노래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정씨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란 평을 받는다.
그런데 오늘의 정풍송 선생을 있게 한데는 중학교의 친구와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인 고 김동진 선생의 영향이 컸다. 밀양중 2학년 때 친구가 가곡을 불렀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노래를 듣는 순간 정선생은 몸에서 전율이 느껴졌다고 한다. 순간 나도 저런 노래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양초등 1·2학년 때 뒷마당에 있던 대나무를 꺾어 구멍을 내 퉁소와 피리를 만들고, 미군 전화선에서 강철 줄을 뽑아 하프 비슷한 악기로 따로 배운 적이 없는 연주를 해 ‘신동’이라 불린 바 있는데, 될성부른 떡잎의 재능이 그때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던 셈이다.
김동진 선생에게 작곡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밀양농잠고를 나온 그는 곧바로 김 선생이 교편을 잡고 있는 서울 돈암동의 서라벌 예술대 음악과 작곡 전공에 지원해 합격했다. 김동진 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입학 후 첫 개인레슨 시간에 김 선생이 “정풍송이 누구냐”라고 하자 정풍송 학생이 “접니다”라고 했더니 김 선생은 “이름이 고약해서”라며 의미 심장하게 웃었다고 한다.
김동진 선생은 “입시 때 남들보다 작곡을 빠르고 잘했던데 누구에게 배웠느냐”고 물었다. “혼자서 했다”라고 하자 “그러면 천재인데 너 같은 재능을 처음 본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 선생은 “직접 편곡, 직접 지휘하지 않으면 자기작품이 아니다”며 40여 년간 쌓은 작곡의 노하우를 레슨 때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오늘의 대한민국 대중음악 최고의 작곡가를 탄생시킨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김동진 선생의 가르침이 적극 반영된 노래인 <웨딩드레스> <석별> <옛 생각> 등은 그가 아꼈다고 한다. 김 선생은 공개 석상에서 가장 아끼는 제자로 정풍송을 꼽았다고 하며, 이런 인연으로 정풍송 선생은 김 선생이 94세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매년 1월 1일과 생일인 3월 22일 찾아 뵙고, 문안 인사를 드렸다고 했다.
정풍송 선생은 늘 메모지와 펜을 들고 다니며 가사나 멜로디가 떠오르면 바로 곡을 쓴다. 100년, 20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언제 들어도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는 명곡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정선생은 또 고향에 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박일호 시장이 등장하면서 산업, 문화, 관광, 농업 등 몰라보게 성장한 고향의 변화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올해 [밀양방문의 해]와 [고향세] 시행에 맞춰 향우들도 이젠 고향을 위해 뭘 할 것인가 고민하고 실천할 때가 됐다고 했다. 특히, 시민들은 배타적·폐쇄적 사고로는 미래 없다는 신념으로 모두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 큰 밀양을 만들게 다같이 노력하자고 말했다.
-<밀양시민신문> 기사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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