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효도
(본문 : 엡 6:1)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더욱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봉독한 말씀만 봐도 우리 기독교처럼 부모님께 대한 효도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종교는 드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첫장부터 하나님 섬기듯 어버이를 섬길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효도의 명령은 성경 전체를 통해 변치 않고 강조됩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했듯 불교는 철학의 종교, 유교가 예의 종교라면 우리 기독교는 그야말로 효도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께 효도하며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효도 내용은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버이의 은혜를 먼저 생각해봅시다(레19:3)
1)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신 은혜
어떤 시인은 말하기를 '어머니는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아버지는 나에게 지혜의 빛을 주셨다' 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사실 양육의 은혜만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이 세상에 '나' 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신 분들이 바로 부모님들입니다. 부모님들은 우리들 삶의 가장 큰 시혜자들임을 우리는 관과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의 원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 분들이 바로 어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때로는 우리의 삶의 질곡 속에서 욥처럼 자신의 생활을 저주하며 자신을 낳아 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욥3:1,10) 이 세상에 우리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은 축복된 일인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 저와 여러분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지복스러운 존재가 되었으니 이 모든 복된 삶의 가능성은 바로 부모님의 은혜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부모님들이 사회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자신의 바람에 어긋난 분들이라해도 원망할 수 없고 다만 감사 드려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나의 존재의 시혜자가 되시는 어버이의 은혜를 경시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경의 창조진리와 십자가의 구속 은총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2) 내리 사랑의 은총
어떤 사회학자는 현대사회의 양상을 '상업적 집단' 과 '성적 집단' 으로 이루어져간다고 꼬집었습니다. 사회에서 사람들이 교제를 하게 되는 계기가 이제까지의 고전적 개념과 윤리를 벗어나 어떤 말초적 본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직장은 이해타산의 욕구에 맞는 사람끼리 모이게 되고 친구는 서로의 장점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고 가정은 성적인 매력이 통하는 사람끼리 만남을 이루게 되는 것이 현대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인의 존재 가치가 상업적 가치, 성적 가치, 기능적 가치로만 평가되어 그 가치를 상실했을 때 직장에서, 친구로부터, 또는 가정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 우리 이웃으로부터 소외될지 모르는 삭막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영원한 이웃이 있는데 그분들이 바로 부모님 들이신 것입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조건 없는 내리사랑의 은혜를 늘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980년대 초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모 호텔에서 북쪽에서 온 가족과 남쪽의 가족이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 중에 북쪽에서 온 환갑 나이가 넘은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팔순이 넘어 호호백발이 된 부친을 붙들고 왜 우리를 남겨 놓고 남쪽으로 가셨냐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때 부친은 그들을 토닥거리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시계, 반지 등을 그 환갑이 넘은 자식에게 주는 것이 TV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리사랑 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줄 사람들은 우리들 부모님들밖에 안 계십니다. 이 사랑을 잊지 말고 감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효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봅시다(출20:12)
1) 절대적인 명령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수많은 율법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 중에 상대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가령 동물도 제사를 드리라는 제사 율법만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십자가의 구속 제사를 드린 후에는 폐하여졌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히10:8-10). 그러나 신구약 망라하여 오늘까지도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명령은 바로 십계명과 그 계명에 속한 효도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일반 윤리적인 의무라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절대적인 계율임을 명심하고 지켜야 하며 실행해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심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예수님은 가정 생활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셨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주님과 같은 효자도 드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잘 알고 있듯 목수입니다. 그런데 그일을 누구에게서 배운 것입니까? 바로 그 의부인 요셉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주님의 별명이 바로 '목수 요셉의 아들'(마13:55)이 아니었습니까? 목수라는 직업은 당시 그리 귀하게 여김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목수인 요셉에게서 그 직업을 전수받은 것입니다. 자식이 부친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는 일이 무엇입니까?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는 일 아닙니까? 또 주님은 나이가 서른이 넘으시도록 그 동생들을 부양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모친 마리아의 생활 대책을 걱정하시고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서의 단편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모님께 최선의 효를 다하셨음을 추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조금이라도 불효스러운 생활을 하셨다면 당시 적대적이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위정자들에게 고소당하실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효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셨기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효도 방법을 생각해봅시다(엡6:1)
1) 전인적으로 기쁘시게 함
과연 주 안에서 효도하는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먼저 전인적으로 부모님들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장자는 한탄하기를 사람들이 효도라면 부모님을 먹여살리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와 같은 일은 짐승이나 미물들도 하는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드시고 그 정신이 혼미한 노인일지라도 인격적인 자존을 지니고 계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욱 자존심이 강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의 마음도 빼놓치 않고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기독교적인 효도 방법입니다.
2)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어야 함
기독교적 사랑의 개념은 이상적인 동시에 또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것입니다. 입과 머리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대한 효도도 그러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되 지금 내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형편이 좀 낳아지면…' 하고 뒤로 미루며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을 미루는 성도가 있다면 명심하십시오. 부모님의 마음은 변치 않을지 모르나 그 몸은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고 계신 분 중에도 효도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어 안타까워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부모님 생존해 계실 때 좋은 것으로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처럼 돌아가신 후 제사로써 효도하면 될 것이 라고 여기는 분이 있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는 냉수 한잔도 드릴 수 없다고 믿는 것이 곧 주 안에서 효도하는 자세입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그리스도인으로서 효도하는 방법을 실행해야 합니다. 어버이 주일은 부모님께 대한 불찰이 있다면 회개하고 효도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생명을 전해 주신 은혜를 늘 생각하며 우리 주님과 성경의 교훈을 명심하고 주 안에서 참되게 효도를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