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집단에 짓밟힌 개인에 대하여
"지금 우리 사회의 집단의식, 거대 담론은 마치 장님 코끼리 더듬는 것 같이 공허하다. … 내 소설적 고민은 거기서 출발한다. 남들이 우우 몰려가는 데는 같이 가기 싫다. 눈 감고 코끼리 다리를 어루만지기보다는 말을 타 보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으니깐." 표제작을 비롯한 7편을 묶은 세 번째 소설집 <어떤 우화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추측>(사진·전망)을 4년 만에 내놓은 박명호 부산소설가협회장이 작가의 말을 통해 한 말이다. 박 작가는 다양한 작품 속에서 소규모 집단은 물론 사회, 국가에서 개인의 신념이 어떻게 묵살되고 왜곡되는지, 소수 의견은 어떤 과정 속에서 처참하게 짓밟히는지를 담담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박명호 작가 4년 만에 신작 소설집 '어떤 우화… '펴내 풍자로 현실의 불합리 지적 '비(碑)'는 묘비에 '대도호부사 박만우'가 새겨진 10대조 할아버지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할아버지의 행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통해 집단의 이해관계 속에 무릎 꿇는 개인을 그려냈다. 군 전체의 자랑거리인 묘지 명당을 관광명소로 하려는 군 당국과 문중의 지원으로 자료 조사에 나선 결과 모든 것이 허위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소설가인 주인공과 역사학자인 주인공의 사촌. 이들이 소설가와 역사학자라는 위치에서 벌이는 날 선 공방은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대학 진학을 목표로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리는 한 고등학교에서 떠도는 자살 유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아낸 '역(易)'에선 교육제도의 모순을 은근히 비트는 것은 물론 사랑, 국가와 민족, 추상적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례를 통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반문하기도 한다.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을 위해 목숨을 던져라면, 아니 그 무엇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가장 나쁜 선동'이라는 대목에 시선이 머문다.일본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정년퇴임 후 일본에 귀화한 국문학 교수와의 만남을 담아낸 '고이노보리'도 같은 맥락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을 싫어했지만, 서양 것으로 도배질 된 우리 땅보다 조선적 문화를 더 닮고 간직하고 있는 일본을 선택했다"는 교수의 말은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연재 형식으로 따로 발표된 글을 중편으로 묶은 표제작 '어떤 우화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추측'은 풍자를 통해 현 사회의 불합리성을 꼬집는다. 인질극을 벌이며 월드컵 4강전 한국 대 프랑스의 재경기를 요구하는 한 사내에 의해 촉발된 반미·반일 감정과 차라리 독도를 일본에 돌려주자는 맹랑한 소설가 '쥐뿔'에 대한 국민의 공개 처형, 흡연자 처단, 고려장부활추진위원회, 20대 여성의 자살과 그로 인한 오해로 빚어진 광기 어린 시민들의 분노 등 다양한 주제가 흥미롭게 이어진다.박 작가가 주목한 이 시대의 작은 목소리들. 거대 담론에 더 이상 묻히지 않고 다채로운 의견으로 남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윤여진 기자 only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