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도체 백혈병 고 손경주 아들 / 연세대학교 신문 기자 손성배 입니다.
반올림 웹진에 기고할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빠 없는 하늘 아래 꿋꿋이 선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날이 선선해지니 아파트 앞 공원에 할아저씨-아저씨-손자가 삼삼오오 산책을 많이 나오더라고요 요즘.
할아버지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우리 아버지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정신줄 놓지 않고 글 쓰려고 했는데 다 쓰고 읽어보니 두서없이 주저리 주저리 신세 한탄한 것 같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매일 감사합니다. 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글은 한글 파일로 첨부합니다.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 반올림 화이팅 손성배 화이팅!
삼성반도체 기흥 사업장에서 생긴 일
1936년 제작된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 모던 타임즈는 단순 코미디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떠돌이 노동자 채플린은 공장 사장에 의해 나사나 볼트를 보이는 족족 조여 대는 정신병에 걸립니다. 그가 걸린 정신병은 회사의 노동환경에서 기인한 직업병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이고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 단순 질병일까요?
지난 8월 마지막 주는 저와 저희 어머니, 그리고 제 동생만의 고난주간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삼성 반도체 기흥 사업장과 화성 사업장에서 약 8년간 근무하시다가 지난 2009년 5월 급성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시다 2012년 8월 31일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올해부터 매년 8월 마지막 주는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지독하고 고약한 백혈병과 마지막 싸움을 하신 고난주간입니다.
우리가족 고난주간의 셋째날인 지난 8월 28일(수)에는 기흥 사업장 후문에서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탄원 서명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날 저는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의 아들이 아니라 대학 학보사 기자로 취재차 기흥 사업장을 찾았습니다. ‘SAMSUNG’이라 쓰인 파란 사원증을 목에 건 많은 공장 임직원들이 후문을 드나들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탄원 서명 운동을 외면했습니다. 이들 대신에 작업복을 입은 현장 노동자들만이 탄원서에 서명하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노동자 인권을 외치는 활동가분들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기흥 사업장 후문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지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선전물을 건네는 이종란 노무사님의 손은 분주했지만 많은 직원들은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순간 가슴 한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 자주 온 곳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혹은 720-3번 버스를 타고 서너 번 정도 와본 기흥 사업장의 공기가 처음으로 역겨웠습니다. 자기 동료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외면하는 파란 사원증을 목에 건 삼성 직원들이 미웠습니다. 이종란 노무사님 옆에 가만히 서서 수수방관 내 일이 아닌 것처럼 한 발 물러서 있는 저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니라 제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죽었다면 아버지도 저처럼 가만히 서 계셨을까요. 아마 제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만사 제쳐두고 기흥 사업장 앞을 지키셨을 것입니다.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이 글을 빌어 저 대신에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반도체 직업병 당사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신 반올림 활동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석중몰시. 아버지께서 2012년 2월 재발 후 치료를 위해 병원에 들어가시면서 말씀하신 사자성어입니다.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냥꾼이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긴 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자 호랑이는 온데 간데 없고 호랑이 바위 한 가운데 화살이 박혀있었다는 일화가 이 사자성어의 배경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무섭고 강한 병마가 와도 정신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해 맞선다면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석중몰시. 가슴 깊이 새기고 열심히 일하다 질병으로 하늘 아래 자기 자리를 잃은 분들을 위해 미약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는 깨어 있는 젊은이가 되겠습니다.
흔히들 삼성과 맞서는 사람들, 반올림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결국 다윗은 골리앗에 맞서 승리합니다. 다윗의 승리에 다윗이 가진 뛰어난 돌팔매질만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과 맞서기 전에 사기가 저하된 이스라엘 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누가 우리의 하나님을 모욕하는가’라고 외쳤습니다. 작은 소년의 외침이 골리앗의 거대한 풍채에 기가 죽어 고개 숙이고 있던 이스라엘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를 등에 업고 자신감에 가득 찬 다윗은 자기보다 몇 배는 큰 골리앗을 쓰러뜨립니다. 반올림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저도 본 대로 쓰고 쓴 대로 행동하는 의로운 기자가 돼서 힘을 보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