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울진 장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태사 장정필할아버님입니다.
태사공의 5세에서 오형제 (5봉군)분의 끝집인 장말익문성공 (호부상서)할아버님께서 990년 고려 성종때 삭방도 (강원함경)의 관찰사 (도지사)로 계시면서 울진관조 (울진장씨 시조)가 되신 것이며, 고려조에 와서 개경(개성)은 온통 울진장씨의 영향권이었습니다.
울진시조 할아버님(말익)의 3대에 와서 장원흡할아버님이 문과에 병부상서(국방부장관), 4대에 장취정할아버님이 문과에 호부상서(재무부장관), 6대에 장세칭할아버님이 문과에 형부상서 (법무부장관) 그리고 이분의 6촌인 장충순할아버님이 문과에 이부상서(내무부장관) 등을 지내시며, 역대로 이름을 떨쳤으면 8대에 와서 장양수할아버님이 전리판서로 문과에 급제한 첩지인 황패가 우리나라 최고의 문적으로 국보 제181호로 지정되어 후손들이 울진땅 월계서원 (시조할아버님을 모시고 배향하는 서원)에 국보각을 짓고 이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울진 지역 선비 어른들이 주관하여 우리 할아버님의 숭덕을 흠모하여 매년 시월 상정일에 배향하는 것이 우리 후손에겐 커다란 영광이고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고려가 망하고 포은 정몽주선생이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오신 분이 11세 장순열할아버님이시며,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고려 마지막 완인 공양왕을 원주로 유폐시켰다가 다시 삼척궁촌에 가두자 우리 12세 장천영 호조참판할아버님이 의분을 참지 못해 울진 토반 (임, 최, 전씨)들과 합세하여 군사를 일으켜 무력으로 이성계를 꺽고 공양왕의 둘째왕자 완석을 옹립하여 왕씨복위와 고려 재건을 도모하다 실패한 열혈의사 이십니다. 이후 울진장씨는 역모죄로 갖은 박해와 수난을 겪으면서 뿔뿔이 흩어져 성도 이름도 숨기체 살게 되었습니다.
삼형제 중 맏형인 장천영할아버님은 삼척, 양양, 인제 등으로 숨어 살았고, 둘째 장천길할아버님은 함경도, 평안도로 가셨고, 셋째 장천말할아버님은 어려서 도망갈 수 없어서 울진 땅에 숨어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평해, 영해, 청송 등지로 칩거해야 했던 것이며, 지금의 각 계파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또한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을 당시 우리 울진장씨 할아버님들은 울진 선비들과 합심하여 반기를 들고 금성대군과 내통하고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된 사건까지 겹쳐 그 후 우리 울진 장씨는 과거도 못하게 되었고, 결국 이씨왕조 500년 동안 울진 땅은 무력항쟁의 기치를 들었던 역적고을로 규정되어 우리 울진장씨는 물론 울진 토반 (임, 최, 전, 주, 남씨)들의 관직등용의 길조차 막혀버린 불운의 수난을 겪은 바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울진장씨 뿐아니라 울진 선비는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이 조선시대에 더물고 따라서 울진 고향이 문화나 경제면에서 낙후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겨우 벼슬길에 오른 몇 분을 열거하면, 이조 성종때 14세 장백손할아버님이 (병과)강계도호부사, 인조때 16세 장한보할아버님이 (문과)돈영부판사와 세자사부를 지내셨고, 기타 군수, 현감령 벼슬은 많았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광해군때에 19세 장대룡할아버님은 안주방어사(문과)로 인조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의분을 참지 못해 일어나 청나라 수도 심양에 중으로 가장하여 들어가 청태종을 암살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궁중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폭염에 목숨을 끊었었고, 그 장렬한 의거를 우리 장대룡장군의 묘표에 "내 한몸 불태워 나라위해 가신 임의 얼을 본 받자"라는 글로 새겨져 후손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또 임진왜란때 울진을 떠나 함경도, 평안도로 가신 장응기 할아버님과 조카 장간은 연안성을 사수해 그 공적이 현충사 사기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하여, 우리 울진 장씨가 충의지사의 전통가문으로 세세로 학문을 전승한 씨족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바, 이러한 사실을 긍지를 갖고서 명심하여 당당히 살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