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을 지나도 아침은 아직 멀다. 어슴프레 남해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량, 대덕을 지나 회진에 닿는다. 회진은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의 고향, 그들의 문학적 토대를 잉태시킨 본향이다. 이청준의 고향 회진의 진목리 선자동은 어둠에 잠겨있다. 점차 어둠이 가시며 노력도 부근에서 황홀한 일출이 걸어나온다.
일출에 취해 회진으로 다시 돌아 나오는데, 회진항은 그 옛날의 회진일 뿐, 이청준의 <눈길>에 나오는 회진의 옛 정취는 사라진 지 오래다. 관산읍으로 가면서 천관산(723.1m)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천관산은 말 그대로 정상부근에 기이한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는데, 그 바위들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같이 보여서 천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내장산 월출산 변산 두륜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천관산은 봄의 진달래와 가을의 억새꽃이 기암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아름다운 산이다. 도화교를 지나 조금 오르니 장천재가 보인다. 1978년에 전라남도 문화재 72호로 지정된 장천재는 문이 잠긴 채 사람들을 맞고 있다. 장천재는 그 옛날 장천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것을 장흥 위씨들이 헐어버리고 재실을 지었다고 한다. 위백규선생은 장천재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능선길에 피어난 갖가지 바위들
산행은 정작 이제부터. 장천재에서 내려와 개울을 건너 장천재 건너편 남쪽 능선을 오른다. 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곱게 물든 단풍잎마냥 명감나무, 진달래가 촘촘히 우거지고. 소나무숲을 벗어나자마자 산뜻한 관산읍과 그 너머 아득한 고향처럼 느껴지는 평화로운 남해의 푸른 바다가 보인다.
바람은 아련한 봄날처럼 살랑살랑 불어 등을 떠밀어주는데, 바다는 어쩌면 호수 같은 잔잔한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나무 숲길을 벗어나자 큰 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민둥산이라고 하기는 뭐하고 진달래와 싸리나무 그리고 만개한 억새만 바람에 흩날리는 능선으로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나타난다.
중턱까지 구름을 두른 한라산이 바다에 둥실 떠 있고, 월출산과 저만치 고흥반도의 아름다운 산, 팔영산이 보인다. 팔영산 만큼이나 아름다운 커피를 얻어 마시며 주변 풍광에 잠시 취해본다. 커피 역시 산행중에 먹는 커피 맛이 제격인가 보다. 천관산의 주봉 연대봉이 한달음에 보인다. 천관산의 연대봉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왜적이 침입했을 때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고려 의종 3년(1149년)에 봉화대를 처음 쌓은 뒤, 개축을 거듭했다. 왜적이 침입했을 때 장흥의 억불산(510m)과 병영 땅의 수인산(561.3m)과 교신을 했던 천관산의 봉수대는 어느 세월 속에 무너져 기단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86년 3월에야 동서 7.9미터, 남북 6.6미터 그리고 높이 2.35미터의 높이로 쌓아 올렸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산의 이름과 산세에 대하여 “천관산은 예로부터 천풍산 또는 지제산으로 불렀는데 산세가 몹시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기운이 서린다”고 하였다.
위백규선생은 그가 지은 「지제지」(支堤誌)에서 “천관산은 크기에서는 두류산, 무등산에 뒤지지만 신성스럽고 특이한 면에서는 그들보다 앞서고 금강산, 묘향산을 거쳐온 사람도 천관산에 오르면 이런 산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한다”고 기록하였다. 연대봉에서 다도해를 바라본다. 그림 같은 호수처럼 남해 바다가 펼쳐져 있고 가깝게 거금도, 금당도, 금일도, 생일도가 지척이며 조약도, 고금도, 신지도가 눈앞이다. 아름다운 다도해를 바라보던 일행 가운데 감탄사가 튀어나오고 한동안 사람들은 바다만 바라본다.
다도해와 억새꽃이 일품인 천관산
우리는 정상에서 하늘 아래 펼쳐진 드넓은 만추의 억새밭을 따라 구룡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억새밭으로 살짝 바람이 불자 무희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우리는 서편제 가락 같은 능선을 따라가다 푸르른 바다, 푸르른 하늘, 그리고 눈부시게 나부끼는 억새밭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누워보기도 하고 거닐어본다.
천관산은 능선마다 기암괴석들이 대략 4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천관산 제일이라는 구룡봉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기어 나온 흔적이 남아 있고 용의 발자국이라고 전해지는 웅덩이가 남아 있다. 구룡봉 아래 계곡에는 탑산사가 있다. 이 산에는 엄청난 규모의 큰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설 속의 큰절(탑산사)이 실재했음을 알려주는 보물 한 점이 대흥사 표충사의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탑산사 동종(보물 88호)이라 이름 붙여진 이 종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없어진 뒤에 해남의 대흥사에 옮겨져 보관하고 있다. 종신에 새겨진 문양이나 명문, 그리고 기법으로 보아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천관사로 내려가는 능선으로 가는데 기묘한 바위들이 합창을 하듯 도열해 있다. 천관사로 내려선다. 천관사는 천관보살이 주거했다는 데에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 천관사를 「동국여지승람」의 <장흥 도호부 불우조>에서는 “영통화상이라는 사람이 일찍 꿈을 꾸니 북쪽 곶이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는데 화상이 가지고 있던 석장이 날아 산꼭대기를 지나 그 북쪽 곶에 이르러 내려 꽂혔다.
그곳이 지금의 천관사다”라는 창건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천관사의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신라 성덕왕 때에 쌀 삼백석과 등유 2석을 내렸고, 애장왕 때에 이르면 다시 밭 800결과 노비 400명을 이 절에 시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천관사의 유적으로는 절터 입구에 3층 석탑(보물 795호)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석등 및 5층 석탑이 있을 뿐이다. 천관사 3층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하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천관사 3층 석탑은 별다른 손상이 없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안정감 있는 탑으로 신라식 일반형 석탑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고려 전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89개의 암자를 거느렸다는 천관사에는 천관보살을 모셨던 극락보전과 새로 지은 칠성각만 남아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인 극락보전은 건축양식이 간결하고 지붕의 선이 직선형이다. 벽면의 장식이나 기교보다는 현실적으로 꾸며져 소박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간결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천관사를 답사하고 전주로 올라가는 길에 천관산자연휴양림에 들렀다. 우리는 자연 휴양림을 짓기 위해, 천관산을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비이성적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산의 중간 허리를 약 7킬로미터 가량 잘라버린 그 길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한없이 분노의 한숨을 토해냈다. 사람들의 편리와 황금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피 흘리는 천관산이었지만, 그래도 계절의 흐름에 따라 눈부신 단풍을 자랑하고 있다.
천관산을 돌아나올 때 “조선의 가을 하늘을 네모 다섯모로 접어 편지에 넣어 보내고 싶다”던 펄벅여사의 말 한마디가 떠올랐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푸른 바다와 절묘하게 어울렸던 천관산의 흰 억새꽃이 내 마음속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 글·신정일 사진·김현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