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
선비 김창숙
한국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 선생.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18세 이후에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은 서구세력의 등장으로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내 것을 고수하자는 척사파가 서로 대립 하며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요.
선생은 학자들이 성리학만 탐구할 뿐 나라를 구할 방법을 찾지 않는 것에 탄식하고, 유림의 구국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을사늑약의 체결부터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 5적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를 받아, 성주 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고 스승을 따라 시베리아로 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노모를 두고 떠날 수 없어 국내에 남아 항일 구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곳에서 선생은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을 주도했지만, 일제에게 국권이 강탈당하자 깊은 좌절에 빠져 성리학 공부에만 매진하기도 했습니다.
자 조
조국이 없으니
무슨 낙으로 살며
집이 없으니
죽을 때 어디로 돌아가나.
무슨 일로
주리면 밥을 찾고
무슨 마음으로
추우면 옷을 구하는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몸
웃다가 또 탄식을 하노라.
-김창숙 선생의 시-
독립운동가 벽웅 김창숙
김창숙 선생은 조선은 유교의 나라인데, 정작 1919년 3·1독립 선언에 유교계 인사가 빠진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후 선생은 전국의 유림 대표를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137명의 유림대표들을 모아 파리장서를 완성됐고, 이를 파리 강화 회의와 각국 정계 요인 및 해외 거주 한인들에게 보내, 독립을 향한 염원을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 구성에 참여하고, 1926년에는 나석주 선생의 동양 척식회사 폭파 의거를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1927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당한 후 대구경찰서 형무소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말았는데요. 선생은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고 이때 받은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몸이 망가짐에도 불구하고 김창숙 선생은 불굴의 독립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스스로를 벽옹(躄翁·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다고 전해지는데요. 그 모습에서 모진 고문과 핍박도 꺾이지 않았던 선생의 굳은 의지가 보입니다.
광복 이후 선생은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성균관 대학을 재건하였습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맞서 하야 경고문을 내고 민주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김창숙 선생 54주기 추모제에 가다.
그리고 2016년 5월 10일, 북한산에 위치한 김창숙 선생의 묘역에서 서거 54주기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추모제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선생의 민족혼과 불굴의 선비정신을 기리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음복을 하며 경건한 분위기 속에 추모제를 마루리 지었습니다.
심산 김창숙 기념관에 가다.
서초구에 위치한 심산 기념센터에 가면 선생의 출생과 어린 시절부터 선비정신,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등 나라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념전시회를 관람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선생의 유품과 직접 작성한 글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선생의 삶이 남긴 많은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성균관대 정문 앞 골목길에 들어가면 아직 선생의 집터가 남아있습니다. 혹시 근처를 방문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따뜻한 봄날을 가져다준 선생께 감사인사 한번 드려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