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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서 교회는 그 가치와 철학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여섯 가지의 기본 컨셉을 가지고 있습니다. 2 회로 나누어 소개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머서와 불편한 교회
너머서 교회의 기본 컨셉은 “불편한 교회” 입니다. 다만 그 불편함이 금욕주의적인 불편함이 아니라 또 강제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불편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가 자취한 “자발적인 불편함” 입니다. 이 말은 그 불편함에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불편함을 선택하기로 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런 불편함은 불편함 그 자체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편함을 통하여 복음이 복음다워지고, 우리의 불편함으로 인해 타인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생산적인 불편함입니다. 마치 “자발적인 가난”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선 건물이 없다는 것은 교회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학교 음악실이나 강당을 사용 할 때는 적어도 한 시간 전 까지 전 교인들이 나와서 청소를 하고 예배를 위한 셋팅을 하고 제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일학교가 사용할 공간도 마찬가지로 청소와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불편을 감수 하는 만큼 경비가 절약 됩니다. 공립 학교 시설을 임대해서 사용하는 것은 것은 가성비가 최고입니다. 교육청 지정 가격으로 하면 한 달에 몇 십만 원이면 됩니다. 주차도 걱정이 없고 아이들도 온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아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학교는 취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점심은 늘 김밥으로 만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아하고 편한 건물에서 아름답게 예배 드리는 세련된 교인이 되는 대신에 그렇게 해서 절약되는 금액을 선교나 구제에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또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유는 “실사구시” 정신이기도 합니다. 능력도 안 되는데 빚을 내어 좋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기 보다 실리를 추구하자는 입장에서 이 불편함을 감수 하기로 한 것입니다. “ 폼생폼사” 가 正道가 아니라고 본 것이지요. 주 중에 성경공부나 모임을 위한 공간은 교회 규모로 볼 때 많아야 10 여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50-60명이 한꺼번에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필요한 공간은 주일 하루
뿐입니다. 주일 예배 54회를 위하여 365일 내내 50-60 명 짜리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경비를 지불한다는 것은 비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 공간은 학교 건물을 빌려서 사용했고, 평일에 필요한 공간은 모임 규모에 맞게 작은 공간을 얻어 사용해 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작은 공간을 “ 너머서 꿈터 “ 라고 이름을 짓고 그 곳에서 우리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기도 하고, 교회의 장래를 설계 하기도 하고 교회의 미래를 함께 꿈꾸었습니다. 또 초기 일년 동안은 정용인. 임경배 집사 부부가 교회의 주중 모임을 위한 공간으로 자신의 집을 오픈해 주었습니다. 쉬운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내가 희생하고 헌신 하는 만큼 교회와 다른 지체들의 부담은 그만큼 더 줄어들게 됩니다. 그 당시 결산 자료를 보면 ( 십년사 4. 운영회의 자료 참조 ) 우리는 그렇게 경비를 아끼고 절약해서 교회 시작 첫해 결산에 선교와 구제비용으로 사용한 금액이 교회 전체 예산의 20%를 육박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초기에 우리는 점심 식사용 김밥을 개당 천원을 받아서 그 돈을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으로 사용 하였습니다. 그 돈을 법륜 스님이 설립한 불교의 정토회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북한 어린이 돕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단체가 정토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과 정신을 따라 “실사구시”의 입장으로 종교를 너머서서 불교단체에 기부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정토회 담당자가 교회로부터 성금을 받아 본 유래가 없고 , 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인사도 할 겸 우리 교회를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 실사구시”의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얼마 전 교회 공용차량을 구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일부 성도들의 제안이 있었지만 너머서도 이런 고민을 안 해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을 가지고 있으면 편리하기도 하고, 폼도 나겠지요. 그렇지만 그만큼 교회는 경비를 지불 해야 합니다. 교회가 공용으로 한 주일에 한 두 번 사용 하기 위하여 차 한대를 구입 한다는 것은 낭비요, 비 효율의 극대화 일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는 각 가정마다 차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필요하면 성도들의 차를 얼마든지 빌려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 차도 이런 때를 대비하여 아예 종합보험까지 들어 두었고, 목사님에게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용 하시도록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화요 성경공부 때 늙은 장로가 자기 차로 성도들을 태우러 다니는 것이 미안하고 마음에 불편해서 라고 하시는데 그 정도는 우리가 넘어 서야겠지요. 사랑의 빛은 져도 된다고 성경도 말씀합니다.
너머서 교회는 초기에 지구 환경 문제를 고려해서 개인용 머그 컵을 지참하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거의 전 교인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컵을 비치해 두고 사용합니다. 지금도 일회 용 컵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을 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편리 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후손들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인의 정신일 것입니다. 지금은 그 정신이 많이 사라진 감이 있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바램은 너머서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고 누군가가 질문 할 때 “ 불편한 교회 “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교회요, 성도 이길 바랍니다. 이것이 너머서의 정신이요, 너머서가 추구하는 가치철학 입니다.
너머서와 평신도 신학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너머서는 “ 평신도 신학“ 을 기반으로 설립된 교회입니다. 교회에도 “신학이 필요한가” 라고 생각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교회도 건전한 신학적 바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 중 많은 부분이 “신학부재” 에 있다고 진단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신도 신학” 을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목사와 성도 간에는 하나님 안에서 계급적, 신분적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같은 성도일 뿐입니다. 목사와 성도는 수직적, 계급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만 목사와 성도는 직분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따라 담당하고 있는 일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은 서로가 동등합니다. 여기서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다 “ 라는 너머서의 핵심가치가 정립되었습니다.
이 가치는 점차 확대되어 우리 교회는 목사와 성도간은 물론, 남자와 여자 ( 남녀 ), 어른과 아이들 ( 노소 ) , 한국인과 외국인 ( 인종과 종족 ), 부유한자와 가난한 자 ( 부귀 ), 높은 자와 낮은 자 ( 사회적 지위 ), 직업의 귀천 이 모든 것에서도 차이에 따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정신으로 확장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조 성준 집사님은 이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 주제가인 “ 너머서 송 “을 작사.작곡 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어린 아이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기우려 왔습니다. 어린아이도 한 인격체로서, 우리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 한다는 의미에서 어린아이들을 성인예배에서 분리하지 않는, 그래서 너머서는 처음부터 “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 “ 를 시작하게 됩니다. 또 어린아이들을 우리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 한다면 성찬에도 함께 참여 시키는 것이 옳다는 입장에서 성찬도 “ 애찬 “ 형식으로 하여 어린아이들을 계속 참여시켜 온 것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기조에 따라, 자연스럽게 갈 3 : 28 이 우리 교회의 대표 성경 요절이 되었습니다. “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과 자유인도 없으며, ,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나 ,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목사나 장로와 같은 특정 인물이 주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그 과정에 충분히 참여 하도록 하자는 의미에서 우리 교회에는 “ 함께 세워가는 교회 “ 라는 가치가 하나 더 추가 되었습니다.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하여 “함께 세워가는 교회” 라는 가치와 관련하여, 2011년에 제가 “ 이교다 “ 세미나에서 발제한 동일한 주제의 발표문의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 함께함 “ 의 의미
“ 함께 “ 란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 참여 “이고 또 다른 하나는 “ 동역” 입니다. ”참여” 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가 “ 민주” 라는 말이고, “ 동역 “ 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서로 힘을 합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지만 신앙적인 용어로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동역”의 모범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십니다. 그런데 “민주”와 “동역” 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기본 전제가 “ 상호평등 “ 입니다. 서로 간에 계급이나, 차별이 존재하는 “ 함께함” 은 가식 이거나 허위일 것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평등
통상 교회의 구성원을 우리는 관행적으로 “목회자” 와 “ 평신도 “ 로 구분 합니다. 그런데 정작 “ 평신도 “ 라는 단어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저도 “ 평신도 “ 라는 단어가 사용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체할 용어를 찾기가 어려워 관행대로 이 단어를 사용 하겠습니다. 오늘 발제의 주재인 “ 함께 세워가는 교회 “ 란 목회자와 평신도가 대등한 자격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고 , 운영해 가는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양자가 평등이 아니라 상하 관계로, 또는 수직적인 관계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주어진 직분과 역활이 다를 뿐이지 서로가 동등하고 , 따라서 서로간에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정신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동역
“ 동역 “ 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힘과 재능과 은사와 능력 등, 서로 가진 것을 함께 하여 서로 협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 동역 “ 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간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동역”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교회를 세우고 운영해 가는데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과연 진정한 동역 관계가 존재 하는가에 대하여 저는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동역”은 아닙니다. 평등의 관계가 아닌 곳에서 이루어 지는 함께 하는 일은 “상명하복 “ 일 뿐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 동역” 이 이루어 질 수가 있습니다.
평신도 신학의 두 번째 핵심은 신앙에 있어서 “ 이원론 “ 의 극복입니다.
“ 이원론 “ 이란 존재하는 실재를 두 개의 근본적인 카테고리로 나누고 어느 한 영역을다른 영역보다 더 중요시 하는 생각이나 사상을 말합니다. 이 사상은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만큼 오랫동안 내려온 생각입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그 뿌리를 그리스 철학의 대가인 플라톤의 “ 이데아 “ 론 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이원론을 신앙세계로 도입해 들어온 사람을 “어거스틴”으로 보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원론은 우리의 신앙에 대단히 많은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원론에 의하면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합니다. 신앙에서의 이원론의 문제는 “聖과 俗”의 구분입니다. 성은 하나님의 일로 , 속은 세상의 일로 구분되어 하나님의 일은 영적인 것이 되어, 가치 있고 의미가 있으며 보람이 있는 것이 되고, 소위 말하는 먹고 살기 위한 세상의 일은 아무 쓸데가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나 교회라는 영역에서 하는 일은 소중하고 귀한 일이 되고 . 가정 일이나 사회적인 일은 전혀 의미 없는 무가치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만이, 기도하고 말씀과 관련된 일만이 중요하게 여겨짐에 따라 성도들의 신앙이 “교회당 중심”으로 이루어 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당 중심의 신앙이 되면서, 교회는 세상과 격리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공평과 정의”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 ,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로 버려진 소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평신도 신학은 이런 이분법 적 구분을 철저히 배제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예배당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일어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 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 고전 10 :31 ).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 삶으로 드리는 예배 “ 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모여서 드리는 주일예배는 우리가 “삶의 예배”를 감당 할 수 있는 힘과 동력을 제공해 준다는 의미에서 소중한 것 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은 우리의 모든 일상이 소중하고 그래서 모든 일상의 삶을 예배자의 심정으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머서는 교회에 모이는 생활보다는 삶의 현장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게 됩니다 ( 롬 12 : 2 )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삶이 될 때 우리는 주께서 명령 하신 대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 갈수가 있게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토대로 하는 “ 평신도 신학” 입니다.
너머서와 건물 없는 교회
너머서 교회는 교회 개척을 시작 하면서부터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이라는 성경적 본질에 충실 하자는 의미에서 “ 예배 전용의 교회 건물을 소유 하지 않으며, ( 이하 생략. 교회 정관 7조 1항 ) “ 라고 못을 박고 시작한 교회 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간결하게 표현 하다 보니 “ 건물 없는 교회” 가 우리 너머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만, 이 말의 본래의 취지에 대하여 우리 교인들 사이에도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이 말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건물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관에 규정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교회 ( 예배 ) 전용의 건물을 소유 하지 않는다” 라는 표현 그대로 이해 하면 됩니다. 이것은 교회 정책의 우선순위를 교회 건축이나 자가 건물을 확보 하는데 ( 소유 )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예배나 교육과 같은 우리 교인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확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 공간 만을 위하여 건물을 매입하거나 건축하는 대신에 그 비용을 절약하여 소외된 이웃을 구제하는데 사용하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역사회를 위하여 우리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고 , 능력이 된다면 ,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공간이 필요 하다면 얼마든지 우리 교회가 공간을 확보하여 그 일을 하고, 그 확보된 공간을 주일이나 , 필요에 따라서 교회가 예배나 교육 공간으로 거꾸로 활용 한다는 것이 “ 건물 없는 교회”에 대한 최초의 구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가 마을 도서관 이나, 어린이 보육시설 등을 위한 건물을 확보하고 , 주일 예배는 그 공간을 활용하여 드리는 형태가 되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건물 없는 교회” 라는 의미가 교회가 건물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것은 맞지만 영구히 떠돌이 생활만을 하겠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오해로 인하여 우리 교회가 공립학교 건물을 임대하여 예배 드리는 것을 마감하고, 씨앗교회와의 건물 공유 시대를 거쳐 현재의 건물을 임대하여 이곳에 정착할 때, 일부 교인들이 “ 건물 없는 교회 “ 라는 우리의 철학과 정체성이 훼손 된다고 하여 건물 임대에 반발하여 우리 교회를 나가 버린 가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기특히 여기셨는지 지나온 과정을 되돌아 보면 우리 너머서 교회는 적어도 교회 건물에 관한 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를 입은 교회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동일한 시도를 해 왔지만 우리 교회와 같이 6년 반 동안이나 공립 학교를 빌려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린 것은 어느 교회도 경험하지 못한 일입니다. 예배 장소를 옮겨야 할 때마다 시의 적절하게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건물 없는 불편함이야 우리가 감수한다 해도, 교장 선생님이 바뀌는 매 2년 마다 예배를 위하여 새로운 공간을 찾아야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교회 운영의 책임자인 안 목사님이나 저는 예배 장소 문제로 피가 마르는 경험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토요일 저녁에야 교인들에게 번개 모임 하듯 내일의 예배장소를 고지하는 등에 진땀이 흐르는 짜릿한 경험도 있었고, 천신만고 끝에 모처럼 예배공간을 빌려주겠다는 어떤 산 부인과 병원에는 주일날 가보니 다른 교회가 들어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미 먼저 들어와 있던 그 교회가 한 주만 더 예배를 드리도록 해 달라는 우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다음 주에는 물리력으로 막겠다는 최후 통첩을 하는 바람에 한 주 만에 또 다른 예배 장소를 찾아 떠나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6년 여의 떠돌이 기간 동안에 비록 가슴을 졸인 적은 있지만 한번도 장소 때문에 주일예배를 거른 적은 없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우리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되셔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훈련과정 이었음을 믿습니다. 이런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너머서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절절하게 익히고 체험하게 하셨고, 적어도 우리 너머서 교회가 교회 건물에 대해서 만큼은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가 교회 건물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씨앗교회와의 예배장소 공유 기간을 거쳐 오늘의 고정된 예배 처소를 임대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과도 중요 하지만 과정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과정이 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훈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교회 자료를 보면 예배 장소를 찾아 여기 저기 애타게 문을 두드린 기록들이 나와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때가 2011년 2월, 처음의 예배 장소인 중산 고등학교를 나와 다음 예배 장소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 하던 중, 두 번째 예배 장소인 중산 초등학교 사용 승인을 얻었을 때 제가 교회 홈피에 올린 글입니다. 그 때 모든 지체들의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금성철벽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
어제 수요일 아침 우리가 사용하고 있던 “너머서 꿈터가” 새 주인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감사 하면서도 가슴이 철렁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꿈터는 우리가 비빌 수 있는 마지막 언덕 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경우 중산고를 나온다 해도, 우리에게는 비록 비좁고 불편하긴 하지만 “ 꿈터 “ 라는 또 다른 예배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이 마지막 비빌 언덕을 가져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도 그 때 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던 두일 중학교 행정실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막상 공문을 가지고 방문했던 목사님과 이학성 집사님이 교장 선생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문전 박대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절망감이 몰려 왔습니다. 어차피 지금 까지 우리가 한, 두번 거절 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에 대한 면역성은 어느 정도 생겨 있긴 했지만 비빌 언덕이 있을 때의 거절과 , 없을 때의 거절은 그 충격의 강도가 다릅니다. 또 내심 내 나름대로 마지막 보루로 남겨 둔 파주 노인 복지 회관 에서 조차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오늘 수요일 내로 회신을 주기로 하였는데 말입니다. 무 소식이 희소식 이란 말이 있지만 아직까지 무소식인 것은 부탁 받은 사람이 잊어 먹었든지 아니면 뭔가 일이 잘못 되어 가는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다시 전화해 볼 용기가 나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일희일비 하고,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고 있는 한심하고도 연약한 내 신앙의 실체와 진면목을 다시 한 전 경험한 하루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 모두가 이곳 저곳 열심히 두드려 보았습니다. 사회와 소통하고 싶다고, 왜 우리가 건물 없는 교회라는 이 가시밭 길을 왜 스스로 가고자 하는 지를 , 우리의 진심과 철학을 이해해 달라고 .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이 그럴듯한 이유와 핑계만 있을 뿐 , 학교도, 관청도 ,사회도, 복지기관도 닫힌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선거 때 마다 지역 주민들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던 지자체의 공공기관 건물도 주일날의 그 텅 빈 공간을 열어주지 않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 금성철벽 여리고와 같았습니다. 닫힌 마음, 구태의연한 자기논리, 전례가 없다는 것 , 어떤 일이 발생 했을 때 책임소재 문제, 무사안일 , 종교편향이란 오해를 받기 싫다는 것 . 등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더니 안 되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습니다. 홧김에 차라리 건물 하나 확 지어 버릴까 하는 오기가 발동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거절 당하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이곳 저곳 두드리는 우리 성도들의 집념과 눈물의 합심기도는 언젠가 이 성벽을 무너뜨리는 단초가 될 것이라는,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공간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변치 않았습니다. 이 과정이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퀴 씩 돌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저녁 수요일 저녁 기도회. 평소와는 달리 마지막 비빌 언덕마저 사라진 우리의 기도는 간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시 비빌 언덕이 있을 때와 엎을 때는 기도 조차도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토, 친척 , 아비집을 떠나 가라고, 비빌 언덕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 하라고 , 이제 너를 책임져 줄 사람은 너의 일가, 친척 ,아비집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빌 언덕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 한 분 만을 전적으로 의지 하도록 하는 것은 역사 이래로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사용해 오신 하나님의 방법 이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치지 말자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금성철벽 여리고가 무너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중산 초등하교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장소사용 허가기 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낭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능력의 역사를 눈으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소름이 끼쳐왔습니다. 기도회를 마치자 말자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 순간 꿈터는 서로를 얼싸안은 우리의 환호성으로 뒤 덮혔습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그 동안 여러모로 예배 공간을 위하여 진두 지휘 하느라 수고하신 목사님, 운영위원장님, 그리고 끝까지 함께 힘을 모아 공간을 찾아내는 수고와 기도를 아끼지 아니하신 여러 지체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제 지난 이년 동안 우리에게 훌륭한 예배 장소를 제공해 주신 중산 고등학교와 멋있고 품위 있는 마지막 이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예배 처소에서 이루실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새 역사를 기대합니다. 한 번 맺은 중산 고등학교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떠나야 하겠지요.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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