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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서 교회의 가치 철학 (2)
너머서와 건강한 교회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건강성을 추구하는 교회 입니다. 우리교회가 추구하는 건강성의 지표는 “ 건강한 작은 교회 연합 ( 건작연 ) “ 이 가지고 있는 기준과 동일 합니다. “건작연”이 표방하고 있는 교회 건강성의 의 기준은 그 명칭과 같이 하나는 “건강한 교회” 요 또 다른 하나는 “ 작은 교회 “ 입니다. 먼저 “ 건강한 교회” 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예전에는 “개혁을 추구하는 교회”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습니다만 최근에는 “건강한 교회”라는 용어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교회든지 건강한 교회를 지향 하지 아니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용어는 좀 진부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각 교회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건강성에 대한 개념이 각자 다르다는 것입니다. 건강성의 기준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너머서 교회”가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 는 “ 재정의 투명성 “ 이 확보되고 “ 민주적 교회 운영 “이 담보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먼저 “ 재정의 투명성 “ 에 대하여 살펴보면 이 주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분쟁의 배후에는 대부분 교회 재정과 관련된 문제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재정의 불투명” 또는 “ 재정의 비공개 “ 입니다. 원래 곰팡이는 음습한 곳에서 자라나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정의 투명성” 은 “ 재정의 공개” 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재정의 투명성” 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교회의 재정을 사용함에 있어 그 의사결정 과정이 목회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좌우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합법적 의사 결정기관에서 구성원 전체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여,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결정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정 사용의 결과와 그 내역들을 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열람이 가능 하도록 재정자료에 대한 사후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 입니다.
사실 “교회의 재정”에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 결산서를 잘 분석해 보면 그 교회의 “가치와 철학” 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의 수입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대부분이 성도들이 부담하는 헌금 입니다. 따라서 재정 사용의 결과와 내역을 헌금의 주체인 교인 들에게 상세히 공개 하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를 논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만, 우리 한국 교회에는 이런 상식마저도 외면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수입 구조가 단순 한데 반하여 그 재정의 사용처는 다양 합니다. 전체 예산 대비 사용되는 각 재정 항목에 대한 비중도 교회마다 천차만별 입니다. 교회의 관심과 철학은 “고정비” 를 제외한 “변동비” 사용의 우선 순위가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재정 사용의 “우선순위” 와 “ 항목별 재정 사용 금액의 적정성 “ 을 건강한 구조로 만들어 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 합니다. 다만 여기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나 정답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마다 주어진 상황과 형편이 다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의 두 번째 지표인 “ 교회 운영의 민주화 “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민주주의” 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따라서 “ 민주 주의” 가 하나님의 뜻 이라는 것을 꼭 집어서 나타내 보여 주는 성경 구절도 당연히 없겠지요. 그러나 성경의 정신과 맥락을 살펴보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가 상당 부분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성경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 행전에 나타 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가지 제도들을 시행하고 있었던 모습들이 보입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의 선출 과정을 보면 사도들이 독단적으로 집사들을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출 기준을 정하고 교회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민주적으로 집사들을 선출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초대 교회 일곱 집사를 선출 하게 된 동기도 우리식으로 하면 “목회와 운영의 분리” 와 비슷한 맥락인 것도 오늘날 건강한 교회 운영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교회 운영의 민주화” 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종교적 엘리트로 대변 되는 목회자가 말씀을 독점 하고, 교회 운영의 전권을 행사하는 구조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교회 구성원 들을 교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 참여 시켜서 일반 평신도들에게 교회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구조와 제도를 만들어 주자는 것입니다.
사실 “ 교회 운영의 민주화 “ 부분에 대하여는 특별히 목회자들의 반론이 많습니다. 사실 이 반발에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반론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독재자 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처럼 교회 운영에 관한 한 교인들의 뜻과 무관하게 목회자의 생각대로 이끌어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직통 계시가 자기에게 주어진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직통 계시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런 주장들은 목회자 = 제사장 이라는 구약적인 발상이 그런 생각의 근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보 더 양보해서 이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하여서는 목회자가 하나님과 같이 전혀 오류가 없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슷한 맥락이긴 하지만 , 일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 운영에 대하여는 목회자 독점 구조로 가는 것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면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 독점 구조가 합리화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목회자 독점 구조로 가지 말아야 하는 그 근거를 루터의 “종교 개혁” 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교 개혁” 을 통해서 종교 엘리트 라고 할 수 있는 그 당시 사제와 신부들이 독점 하고 있던 말씀의 독점 구조를 깨고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통해서 일반 신도들에게 성경을 되돌려 주셨습니다. 일반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닫혀 있던 문을 개방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일이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회자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 받던 시대가 끝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일반 성도들의 신분과 위치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 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들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 벧전 2: 9 )
하나님이 왜 “종교 엘리트” 들이 독점 하고 있던 “말씀의 독점” 구조를 깨셨습니까. 말씀의 독점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가져 옵니다. 권력의 집중도 마찬가지 입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독점은 하나님의 뜻을 독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소수의 특정 계층에 의하여 독점 될 때 “말씀의 왜곡”에 대한 유혹에 노출 되기가 쉽습니다. 또한 말씀이 왜곡을 일으킬 때 종교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것이 중세 카톨릭의 역사요, “면죄부” 사건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에도 말씀의 왜곡현상이 심각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에 의하여 예배당이 성전으로, 목사가 제사장으로 둔갑 했습니다. “일천 번제 헌금 “ 이니 심지어 “ 속죄헌금 “ 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터무니 없는 말씀 왜곡이 한국 정통 교단의 강단 에서 버젓이 전파되고 행해 지고 있는 것을 지금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반 성도들도 이 부분에 대하여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우리 일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주어져 있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자인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시도 조차도 하지 않고 목회자들을 통하여 그 뜻을 간접적으로 얻어 듣는 것으로 만족 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에 게으르고, 그 결과 말씀에 무지한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알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민주적 운영의 성공의 열쇠는 평신도의 노력과 성숙도 향상에 있습니다.
너머서와 작은 교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너머서 교회가 추구하는 기본 가치의 한 축이 “건강한 교회” 라면 또 다른 한 축은 “작은 교회” 입니다. 우리가 작은 교회를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작음”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내 보여 주는 성경적인 근거는 무수히 많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주기도문 “ 을 가르쳐 주시면서 이 땅의 성도들과 교회에 두신 그 분의 뜻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 즉 성도란 “하늘의 뜻과 가치” 를 이 땅에서 이루어 가는 사람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이 모인 교회의 존재 의미, 나아가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역시도 “ 하늘의 뜻과 가치” 를 이 땅에서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 주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성도로 만드시고, 그 분의 십자가를 기초로 이 땅에 교회를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가치” 와 반대되는 말은 “ 땅의 가치 “ 입니다. “땅의 가치” 는 “ 세상을 지배 하는 가치” 체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가치” 또는 “세속의 가치”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속의 가치” 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세상 가치의 특징은 한마디로 “ 크다 “ 와 “높다” 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즉 커지고 싶고, 성장하고 싶고, 화려해 지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고, 강력한 힘과 권한을 소유하며, 타인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싶어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죄성을 가진 우리 인간들에게는 자연 발생적으로,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내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 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 세속의 가치 “ 인 것입니다.
이 “세속의 가치” 를 역행하고 거슬러 가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갈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신앙” 입니다. 그리고 “영성” 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속의 가치가 교회로 들어와서 교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상을 바로 “ 교회의 세속화 “ 라고 말합니다. “교회 세속화” 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 교회 성장 제일 주의 “ 이고, 그 구체적인 열매가 “ 교회의 대형화 “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교회의 세속화” 가 의미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나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동일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세속화의 무서운 점이고,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하늘의 가치를 이 땅에 심고 확장해 가는 것이 교회인데, 교회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이 동일 하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 자체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 하늘의 가치 “ 란 무엇을 의미 합니까. “ 하늘의 가치” 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내 보여 주셨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신 가치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입니다. 하늘가치는 정확하게 땅의 가치와 반대되는 대척 점에 서 있습니다. 세속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 “ 크다 “ 와 “ 높다 “ 라면 하늘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은 “ 작다” 와 “낮다” 입니다. 즉 작아지고, 낮아지고, 겸손해 지고, 약해 지고 , 타인을 섬기는 것이 이 가치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이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작아지고 약해지다 못해서 결국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이름도 모양도 없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소멸 시켜 없어져 버리신 분입니다. 그 분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 위에 내려 오시되, 화려한 로마 황제의 아들로 바로의 황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 , 그 시대에 이름도 권력도 없는 식민지 백성 , 한 민초인 요셉 가문에 마리아의 몸을 빌어 가장 낮은 말구유의 빨간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로 , 가장 작은 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스승 이시면서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 하셨습니다 “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어 주러 왔다 “ ( 막 10 : 45 ) 예수님은 일평생 이 땅 위에서 하늘의 가치인 “작음“ 과 “ 낮음” 을 온 몸으로 보여 주시고 실천 하셨습니다.
너머서 교회가 추구하는 “작은 교회” 는 이 가치의 연장선 상에 서있습니다. “작은 교회”가 바로 “하늘의 가치” 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의 가치가 가만이 있어도 저절로 유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적인 노력과 끊임없는 투쟁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교회에 대한 끊임없는 로망이 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건물이 없는 교회로서의 여러 가지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 하면서 7년 반을 버티어온 이유는 어떤 면에서 이런 우리의 마음속에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본성과 죄성에 대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작은 교회” 에 대하여는 항상 두 가지 질문이 따라 옵니다. 그 하나는 작은 교회의 크기에 대한 기준 입니다. 성도의 수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 대한 성도의 수에 대한 일률적인 기준은 설정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정관에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150명 이라는 기준을 설정해 두고 있습니다만, 모든 교회에 일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다만 작은 교회를 구별하는 “지표” 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장 DNA” 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성장 DNA” , 더 정확히 말하면 “무한 성장 DNA “ 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교회는 “성장 DNA” 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 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생명” 의 기초는 바로 “성장”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한 성장”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생명은 어느 한도 까지 자라면 성장을 멈추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점차 성숙해 지는 것이지요. 무한 성장하는 유일한 생명체는 “암세포” 뿐 입니다.
메가처치의 저자 신광은 목사는 그의 저서 “메가 처치 논박”에서 한국의 교회는 “대형화에 성공한 대형 교회와, 대형화에 실패한 대형 교회”, 라는 “한 종류의 교회” 뿐이다 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장에 실패한 대형 교회가 무슨 뜻입니까. 작은 교회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DNA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성장에 실패 했기 때문에 작은 교회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 안에 대형 교회를 향한 열망과 무한 성장 DNA 를 가지고 있다면 대형교회나 다를 바가 없는데 대다수의 한국 교회가 그렇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큰 교회는 다 건강하지 않고, 작은 교회는 다 건강한 교회 인가 하는 질문 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교회의 크기만 가지고 건강성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크기”와 “교회의 건강성” 사이에는 상당부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 합니다. 교회가 대형화 될수록 교회의 본질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작은 교회일수록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이 용이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보다도 우리가 “교회의 사이즈”에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교회가 대형화 되고 나면 교회는 그 자체의 성장 시스템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대형화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일정 규모가 넘어가면 교회의 지도자나 리더가 성장을 제어 하고 싶어도 제동이 불 가능해 져서, 아무리 교회 건강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자 하여도 통제 자체가 불가능해 집니다. 사랑의 교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말년에 돌아가시기 전에 “ 내가 교회를 너무 키워 버렸다 “ 라고 하신 자책의 말씀이 이 부분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대형화” 를 추구 하여야 한다는 논리 역시 두 가지 정도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는 성장하여야 하고, 또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과 함께 교회 역시 “성장 지상주의” 를 견지해 오면서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 =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공식을 만들고, 그것을 교회 성장의 수단이요, 도구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왔습니다. 또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는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성장하지 못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교회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되어 모든 한국 교회가 성장에 올인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분위기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성장 =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이 공식은 과연 사실 일까요. 물론 경우에 따라서 맞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 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영광” 이란 하나님 한 분만의 이름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 온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교회가 성장 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과연 하나님의 이름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한국의 대형 교회들의 이름을 들을 때 우리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입니까, 아니면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의 이름입니까. 그렇다면 교회 성장 = 하나님이 영광은 허구에 가까운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 하면 대부분 하나님이 아닌 인간목사가 영광을 받습니다.
두 번째 논리는 “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 더 많이 하기 위하여” 교회가 커야 하고 성장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커야 힘이 생기고, 힘이 있어야 주님의 일을 더 크게 ,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논리가 사실이라면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고 ,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선언” 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현대판 바벨탑” 사건 입니다. 실제로 대형화된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들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보면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이 불필요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또 왜 하나님의 일을 우리 교회만이 독점적으로 그렇게 크게, 많이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 혼자서 할 수 없는 큰 일이 있다면 여러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힘을 합하면 되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이 땅에 “우리 교회” 는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각 성도들이 하나의 지체로 연결되어 있듯이 교회들도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또 다른 교회들이 서로 연결되어 한 몸으로 연결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옆의 교회가 한 일이 결국 우리 교회가 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교회” 운동에 대한 한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교회를 주장 하는 사람들은 교회 성장을 터부시 하고 교회 성장 자체를 거부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인 오해 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 하는 것이 당연하고 , 성장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 운동은 정당한 수단과, 상식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성장을 도모 하되, 다만 무한 성장에 대해서는 다소간 인위적으로라도 제약을 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성장을 넘어서면 자연스럽게 교회를 분립해서 지속적으로 건강한 작은 교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만 명의 건강한 대형 교회 한 개 보다 백 명짜리 건강한 작 교회 백 개의 존재가 하나님 편에서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교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대형 사업들은 분립된 작은 교회들이 연합하여 함께 이루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의 새로운 교회의 개척은 대부분 소명을 가진 목사님 개인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숫자가 많이 늘어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교회가 영세하고, 또 개인의 수고와 희생 위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큰 교회가 되었을 때에는 그만 큼 “교회 사유화” 의 유혹에 이끌리기 쉽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세습열풍은 상당부분 이런 토양 위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가 개척 하는 것이 원칙이고, 이런 면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교회가 일정 규모 이상 성장했을 때 건강한 교회가 또 다른 건강한 교회로 갈라지는 “분립” 이라는 방식은 교회의 세습을 방지 하는데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머서와 자립신앙 ( 코람데오 )
너머서 교회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 자립신앙 “ 입니다. 자립신앙은 가급적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개입을 최소화하고, 성도들 각자가 알아서 “하나님 앞에서” 자율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또 성도 개개인이 각자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각자 알아서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나 목사님이 개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일일이 지도하고 간섭하는 “인간 또는 교회 의존적인 신앙 생활” 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목표는 힘들겠지만 가급적 교회의 영향력, 특히 목사나 장로와 같은 인간들의 영향력을 벗어나 스스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해 줄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 전제가 “ 자율성 “ 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은 구약의 율법시대가 아니라 신약의 은혜시대 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합니다. 다만 “자립신앙”을 위해서는 “신앙 성숙도”를 높이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도가 전제 되지 않으면 자립신앙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신앙에 대하여 원리와 원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아주 소극적이고 협의적인 의미로 가르쳐왔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종교활동을 가르쳐 온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공식처럼 만들어 주입식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성도들에게 신앙생활 ( 종교활동 )을 “해야 할 목록과 하지 말아야 할 목록” 으로 구분하여 공식으로 만들어 주고 지켜야 할 목록을 잘 이행하고,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을 잘 지키면 좋은 신앙, 좋은 믿음이 되고, 그 반대의 사람들에게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믿음이 없다는 낙인을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해야 만 하는 신앙 목록에는 성수주일로 대표되는 교회출석 , 교회봉사, 십일조, 전도, 좀 더 나아가면 새벽기도, 등에 적극적으로 잘 참여하는 것 입니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금지항목은 조상에 대한 제사금지, 금주와 금연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대형교회의 장로 추천 기준을 보면 대부분이 이런 범주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목록은 대부분 교회 내의 생활과 관련 된 것 입니다. 즉 종교행위와 관련된 것 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만 잘 지키면 좋은 신앙이 되어 사회 생활에서는 그들이 어떤 일을 하든 교회는 별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동안도 제가 지속적으로 말씀 드려온 바와 같이, 한국 기독교의 비극은 “ 순종 “ 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성도들의 “ 생각과 질문 “ 하는 능력을 마비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무조건 믿고 순종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는 세뇌적인 교회의 가르침 속에 우리 신자들은 생각도 질문도 심지어 신앙에 대한 회의나 어떤 건전한 의심 마져도 “불신” 또는 “믿음 없음”과 연결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마치 “ 무뇌아 “ 와 같이 기계적이고 로보트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목록화와 맞물려서 성도들은 더욱더 신앙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사실 기계적으로 목록대로 따라 하는 것이 교회도 편하고, 성도들도 편합니다. 누차 말씀 드리지만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의와 질문이 없는 신앙은 허약하기 짝이 없는 신기루와 같은 믿음이 됩니다. 신앙은 질문 속에 서 자라나고 회의와 방황의 시간을 통해 오히려 더 단단하게 다지어 지고 성장하게 되는 법입니다. 질문과 회의는 자기 스스로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입니다.
다만 자립신앙은 성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원리와 기준만을 제시해 줍니다.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 성경말씀 “ 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도들이 스스로 신앙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하고, 질문 하면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나 목회자의 역할은 단지 성도들이 성경의 원칙에 따라 신앙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머서 교회는 지난 청빙 공고에 너머서 교회가 원하는 목회자는 “ 신앙생활의 감독이 아니라 코치 “ 라는 사실을 명기 한 바도 있습니다.
너머서 교회는 성경 외에 자립신앙을 위한 두 가지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 코람데오 = 하나님 앞에서 “ 이고 또 다른 하나는 “ WWJD = WHAT WOULD JESUS DO “ 입니다. 전자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 고전 10 : 31 ) 는 말씀과 일맥상통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 앞에 단독 자로 서서,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후자인 “ WWJD “는 미국의 챨스. 엠 쉘든 목사님의 소설에서 따온 내용인데 원제는 “ IN HIS STEPS “ 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자로서 어떤 상황과 마주하게 될 때에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행동 지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시고 어떻게 반응 하셨을까” 를 먼저 생각하고, 예수님이 하셨을 것과 똑 같은 행동과 반응을 하는 것을 신자의 행동 지침으로 삼으라는 의미 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발 자취를 따라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만 잘 지켜 갈수 있도록 훈련되어 진다면 자립신앙은 충분히 가능 하고, 역으로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사실 신자로서 어느 정도 성숙의 경지에 있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누군가에 의하여 강요 되거나 종속 되어서는 안됩니다. 늘 하나님 앞에 단독 자로서 끊임없이 홀로 서기를 시도 해야 만 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너머서는 이 자립신앙의 원칙을 10년 이상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결과를 예단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현재로서는 “ 절반의 성공 “ 정도로 평가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가치는 우리 교회가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가치 철학 입니다.
이상과 같이 너머서의 가치 철학은 1 ) 불편한 교회, 2 ) 건물 없는 교회, 3 ) 평신도 신학, 4 ) 건강한 교회, 5 ) 작은 교회, 6 ) 자립신앙 이라는 6개의 축을 기본으로 형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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