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된 고성대ㆍ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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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전주에서 배교했으나 1815년 을해박해 당시 다시 체포된 고성대ㆍ성운 형제는 경주관아를 거쳐 대구감영 옥사에 수감돼 17개월에 이르는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짚신을 삼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림=탁희성 |
고성운은 충청도 덕산 별암(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태생이다.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지만, 그는 곧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특히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는 매일 시간을 정해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모든 신자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또 언제나 합심해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던 형제에게 감복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1815년 2월 22일께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 급습한 경주 관아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이것이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과 지방 관리에 의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당시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은 도적이 급습한 줄 알고 성운의 지시에 따라 힘으로 대적했다. 그러나 이내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신자들은 저항을 멈췄고 그는 포승을 받는다.
경주로 압송된 그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다. 이에 경주 관장은 그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또 다른 교우들을 대구감영으로 이송한다.
대구에서도 또 다시 문초와 형벌이 이어지면서 17개월이 넘는 옥중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는 고통을 참아내며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했다. 그 오랜 기간 고통과 궁핍에도 그는 항상 기쁨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때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켰다고 전해진다.(「일성록」 순조 병자년(1816년 11월 8일자) 기록 참조)
대구 감사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그를 지켜본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한다.
"고성운은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돼 깨달을 줄을 모르며, 엄한 형벌로 깨우쳐주려 했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이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드디어 1816년 12월 19일 대구 형장에서 구성열(바르바라, ?~1816) 등 5명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진다. 순교 뒤 형제 등 7명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이듬해 4월 17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거둬졌다.
이 가운데 매장된 지 3개월이 훌쩍 지난 그의 육신은 특히 빛이 났고 눈부신 무언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조금 전에 죽은 것처럼 보였고, 잘 보존된 그의 옷은 습기조차 스며있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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