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若き將軍の朝鮮戰爭 草思社(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소오소오샤) 2000년 5월 30일 제1쇄 발행, 2003년 9월 1일 제7쇄 발행]
백선엽이 어떤 사람인지 알릴 필요가 있어 번역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합니다. 반성은 전혀 없고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일제의 개 노릇을 한 것을 자랑으로 떠벌이고 있습니다.
최정예였던 간도특설대 (71쪽)
(생략)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한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에 전임(轉任)하게 되었다.
(생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間島省 延吉縣 明月鎭)에 설치된 간도특설대는 종래의 국경감시대를 모태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機迫) 1개 중대(中隊)로 구성되어 있었고 후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大隊)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일본인 군관으로 후에는 전원 한국인 군관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서 많은 한국군 장성이 나왔다. 한국전쟁 중 제1군단장으로서 용감히 싸운 김백일 장군은 여기에서 중대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해병대의 아버지인 신현준 장군과 김석범 장군, 대장으로 승진한 임충식 장군도 여기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중 연대장 급에서 활약한 분 들 중에는 간도특설대 출신들이 눈에 띄었다.
당시 만주국에서 한국인의 부대는 이 곳뿐이었고 80만을 넘는 한국인 주민으로부터 매년 300명 정도를 선발하였기 때문에 사병의 자질은 아주 우수하였다. 누구나 대륙의 생활에 익숙하여 거친 옷과 거친 음식에도 잘 견디는 일류의 전사였다. 장비는 성능이 좋다고 정평이 난 체코제 무기가 주를 이루었고 특히 기관총은 일본군이 부러워할 정도로 고성능이었다.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시종일관 치안작전을 하느라 분주하였지만,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 요새 말하는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 폭파, 소부대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하여졌다. 원래 사병의 소질이 우수하고 여기에 덧붙여 맹훈련까지 하게 되니 부대는 마침내 최정예부대가 된다. 민주국군에서 총검술, 검도, 사격 경기가 있으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간도특설대의 최정예성을 이야기하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후술하겠지만 북중국에 출격하는 중의 일이었다. 어느 날 밤에 보초를 서던 병사 중 하나가 조는 것을 당직사관이 발견하여 하사관인 위병장(衛兵長)이 주의를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초를 교대하고 상부에 보고를 한 위병장은 “전장에서 보초가 졸은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말을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위병장의 책임감에 누구나 경탄하여 그 전말(顚末)이 인쇄물이 되어 만주국군 전군에 배포되었다.
한국인 군관뿐만 아니라 일본인 군관에도 우수한 자들은 많았지만, 오키나와 반환시의 지사였던, 야라쵸오뵤(屋良朝苗)씨의 친척 분도 일본인 군관으로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고 계셨다. 일본인 군관의 다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 지원으로 예비역 소위로 임관한 자들었다. 군사적인 식견과 능력은 사관학교 출신 정도이고, 게다가 대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지식의 폭이 넓고 세상을 알고 있었다.
게릴라와의 전투(73쪽)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부 일대는 특히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대삼림지대이고 은신처가 많았다. 측량을 할 수 없어 지도가 공백이라, 백색지대라고 불리운다. 러일전쟁 전후부터 반일(反日)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무장단체가 이 일대에 들어왔지만 1920년의 간도출병은 그에 대한 일본의 최초의 반응이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항일 게릴라는 이 일대에서 가장 끈질기게 싸웠다. 그 중추를 이룬 것은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연군(抗日聯軍) 제1로군(第1路軍)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중국인, 만주인, 조선인의 연합부대로서 사령관은 중국인인 양정우였다. 그는 1940년 2월에 일본군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김일성과 최용건 같이 후에 북한에서 극도의 권세를 휘두른 자들의 다수는 이 항일연군 제1로군에 있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들은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토벌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또한 중국본토와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소련으로 도주하여 1945년 8월 소련의 침공과 동시에 한반도에 귀환하여 소련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독재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한 1943년의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있었지만, 그때까지는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에 걸쳐서 여기 동부 만주에서 대규모적인 게릴라 토벌작전을 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건 철저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린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선배의 말에 의하면 간도특설대라고 들으면 게릴라들은 한사코 도망을 가버려 좀처럼 접촉할 수가 없었고 적과 만났다고 하더라도 적진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머리를 올리지 마라”는 절규의 외침뿐이었다고 한다.
게릴라전이라고 하면 무언가 낭만적인 반권력의 분위기가 있는 듯해서 어쨌든 게릴라가 선하고 토벌대는 악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게다가 공상(空想)이 비약(飛躍)하여 게릴라 활동은 깨끗하고 바른 것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게릴라는 어떻게 행동하고, 주민들은 어떠한 생활을 강요받고 있는가?
게릴라는 거의 생산적인 활동은 하고 있지는 않고 밀영지(密營地)라고 칭하는 산간부(山間部)의 근거지에서는 식량의 생산조차 불가능하다.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보급투쟁이라고 칭하는 약탈에 의존하고 있다. 아이들과 부녀자를 납치하고 세뇌하여 전력(戰力)으로 만든다. 사정이 이렇다면 주민들은 입 다물고 있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생활을 하는데, 정규의 세금을 징수당하고, 게릴라의 보급투쟁의 목표가 되어 부녀자뿐만 아니라 성인 남자까지 노동력, 전투력으로 끌려간다. 원래 만주 특히 북부와 동부의 산악지대에는 중앙정부의 권능이 미치지 아니하고 치안이 나빴다.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을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때로는 토벌대가 방문한다고 하여도 그 행동은 미온적이고 토벌대 그 자체가 민중의 생활을 어지럽혔다. 그 중에는 게릴라와 통한다고 하여 심한 징벌을 가하는 것도 적지 않았다. 토벌대가 떠나면 게릴라가 돌아와서는 토벌대에 협력하였다고 하여 보복한다. 이래서는 주민들이 어찌할 수도 없다.
이러한 상황을 앞에서 보면 ‘이 사람들의 편이 되자”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리라. 게릴라가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치안을 확보하고 주민들에게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안녕한 하루 하루를 지내게 하고 싶은 것이 간도특설대 공통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폐의 방지'이다. '민중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폐해를 미치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것을 철저히 주지시켰다. 이것이 간도특설대의 전과(戰果)의 비밀이었다.
원래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마적과 큰 차이가 없는 게릴라보다도 토벌대측의 군대가 의지가 될 터이다. 그 군대가 민중에게 친절하고 폐를 끼치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귀중한 정보를 전달하여 주게 된다. 게릴라가 왜 군대의 위협이 되는가 하면 그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릴라의 병력 근거지 행동의 패턴 지휘관의 이름 등을 알면 그렇게 벅찬 상대는 아니다. 그러한 정보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 지역의 민중들이다.
대게릴라전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법은 역설적으로도 게릴라가 잘 사용하는 매복이었다. 눈 덮인 산길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게릴라를 며칠간이나 매복하며 기다리는 것이지만 이것은 훈련이 주도면밀하게 잘 되어 있고 사명감에 불타는 부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게릴라와 접촉할 수 있었을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사격의 훈련 강도와 명령대로 사격하는 규율의 엄수였다. 게릴라는 주민을 방패로 삼아 행동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격은 무고한 민중에게 위해를 미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게릴라는 토벌군은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한다고 선전하고 사정에 어두운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반정부적으로 되고 게다가 자진하여 게릴라에게 투항한다.
게릴라 토벌에는 연속적인 추적이 중요했다. 험한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일단 적을 잃어버리면 다시 발견하는 것은 우선은 무리였다. 접촉을 유지하면서 추적하려면 게릴라보다 뛰어난 다리 힘이 요구되었다. 후에 한반도에서의 토벌작전에서 확인한 것인지만, 어떤 게릴라들은 한 겨울의 산악지대에서 하루에 지도상의 거리로 50킬로 이상이나 도보로 기동하였다. 어쨌든 목숨이 달려있기에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헬리콥터가 없던 시대에 게다가 적의 꽁무니를 쫒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주 힘든 일이었다.
게릴라를 체포하였을 때에는 어떠한 작은 집단이라고 하여도 전력을 다하여 문자대로 섬멸할 때까지 박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정보를 제공한 주민이 보복을 당하고 그때부터는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전원이 자신들의 사명을 자각하고 주민에게 가능한 한 폐해가 미치지 않도록 주의하여 행동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야영(野營)하고 민가에 정박하지 않는다. 식량의 제공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어찌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 우리들은 음료수까지도 돈을 지불하고 구하였다. 이것이 우리들의 ‘민폐의 방지’의 실천이었다. 그 태도는 바로 주민에게 이해를 얻어 게릴라의 정보를 가르쳐 준 것뿐만 아니라 각지에 “간도특설대 후원회”가 조직되어 우리가 정찰을 나가면 아무리 거절하여도 식사를 대접하기까지 하였다. 우리 쪽에서도 더욱 노력하여 아이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하였다.
대원들의 사격의 기량은 발군의 솜씨였다. ‘간도특설대가 발포하면 반드시 무엇인가가 떨어지고 있다.'라고 까지 이야기되었다. 목표를 확실히 확인하고 확실히 조준한 후에 발포한다. 사격술이 좋으면 당연한 것이지만 난사하지 않는 것도 간도특설대의 자랑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게릴라와 접촉하였을 때 각자 소모하는 탄약은 대개 2,3탄이었다.
북중국으로부터의 기적의 생환(77쪽)
1944년 봄, 중국대륙의 일본군은 1호작전 소위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을 개시하였다. 적의 수중에 있는 경한선(京漢線), 오한선(奧漢線), 상계선(湘桂線)을 우리의 손아귀에 넣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작전이다. 이를 위하여 그때까지 치안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부대가 야전임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치안상태가 극히 악화되었다. 특히 팔로군이 횔동하고 있던 북중국에서는 2개 중대 이하의 행동은 금지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만주국군은 장성선(長城線)을 넘어 북중국에 들어가 치안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제1진에 선발된 것이 간도특설대이었다. 대 게릴라전의 명수로서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리라.
일본이 공식적으로 발간한 전사에 의하면 간도특설대가 북지나(지나: 중국)특별경비대의 지휘하에 들어간 것은 1945년 1월로 되어있지만 우리들이 명월진을 출발한 것은 1944년 늦가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출동에 즈음하여 우리들은 생환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북중국에 가면 우리들은 다른데서 온 침입자가 되고 말이 통할지 어떨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 지역에 대한 감도 없었고 게다가 팔로군은 동부 만주의 게릴라와는 차원이 다른 전력이었다. 우리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기념으로 백두산에 올라 조국에 이별을 고하고 북중국으로 향하였다.
누구라도 목숨은 아까워한다. 게다가 한국인이 일본인을 위하여 중국에서 중국인과 싸우다 죽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사리에 맞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생환(生還)할수 있을까? 일본인 군관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였다. 결론은 동부만주에서 하였던 것 이상으로 민폐가 미치지 않도록 행동하자 그러면 민중의 바다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것이었다. 게릴라가 실천하고 있는 것을 역으로 우리가 연출하는 것이다.
1944년이 끝날 무렵 우리들은 열하성(熱河省) 승덕에 집결하여 장성선을 넘어 팔로군에 뒤덮인 적색 바다로 변한 북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종전까지 우리들은 북경 동남쪽에 있는 소위 기동(冀東)지구에서 북지특별경비사령부 직할의 보병 대대로서 토벌작전에 종사하였다. 작전지역으로 향하던 도중 밀운(密雲)을 통과하였다. 여기에는 일본군 1개 소대가 주둔하여 있었지만, 마을로부터는 나오지 못하고 농성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고, '이제는 대단히 힘든 곳에 와버렸다'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최초의 작전부터 우리는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대개 동틀 무렵에 포위하듯이 하여 촌락에 들어가지만 즉시 나팔이 울고 주민이 피난하여 버린다, 전란에 시달린 중국의 민중은 실로 재빨리 행동하였다. 집들의 처마에는 ‘의군환영’이라고 쓰여진 붉은 종이가 펄럭이고 있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있으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음식물의 조달을 청하고 ‘닭 10마리, 돼지 1마리 수령 확인 금 0냥’이라고 증서를 써서 대금을 첨부하였다. 대금은 시가의 대략 3배 정도. 그리고 노인에게 “장수를 기원합니다.”고 정중히 말하고는 촌락을 뒤로 하고 떠난다.
이것이 우리들의 책략이었다. 이와 같은 책략을 2, 3회 반복하자, 지역 일대에서 평판이 좋게 되었다. ‘만주에서 온 한국인 부대에게는 아주 감동하였다. 예의바르고 약탈도 하지 않는다. 물건을 취하여도 정확히 대금을 놓고 간다.“고 하는것이다. 소문은 즉시 퍼져서 이후에는 토벌을 나가도 주민이 도망가는 일은 없었다. 위해를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사에서도 수지가 맞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가 되자 정보를 주고, 자진하여 길안내 까지 하여 준다. 동부만주와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그 상당의 전력만 있었다면 팔로군을 일소하는 것도 몽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치안작전의 전제를 만들어도 긴요한 전력은 없었다. 간도특설대 1개 대대만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고 적색 바다라는 상황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민중들이 우리들을 보호하여 주었다.
팔로군의 대군에 포위되어 전멸도 시간의 문제라고 각오하였지만 부락의 장로가 군사(軍使)가 되어 팔로군과 교섭하여 포위가 풀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는 팔로군이 길을 열어서 교전을 하지 않고 마무리를 지게 되었다. ‘간도특설대는 민중의 편, 팔로군도 민중의 편, 민중의 편은 민중의 편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는 기묘한 논리였으리라.
나는 1945년에 다른 곳으로 소속을 바꾸었지만. 간도특설대는 거의 10개월간 그 적색 바다를 전전하면서 싸웠다. 전사자가 앞서 말한 자결한 위병장뿐이었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부대는 금주(錦州)에 집결하여 일본인 군관과는 거기에서 헤어져 간도성에 생활의 기반이 있는 한국인 군관은 당당하게 대오를 지어 명월진에 귀환하여 부대를 해산하였다. 잘도 북중국에서 무사히 귀환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결코 기적은 아니었다. 부대원 일동의 노력의 결과이다. 민중의 편이 된다고 하는 노력이 전원 무사 귀환을 가져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