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살까? 영광스러운 삶, 영광스러운 자리를 위해서가 아닐까?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십년 이십년 고통스런 삶, 고된 훈련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대표, 월드클레스의 선수들이 그렇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보상, 영광이 따른다. 만약 보상, 영광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렇게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 아픔, 상처를 주고 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부모, 형제까지 죽이고 독살하기도 한다. 세상 정점의 자리인 왕의 보좌를 노리는 자들이 그랬다. 지금도 독재자들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세상 영광은 아주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생각해 보라! 사탄이 주님을 시험할 때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이 무엇이었는가? 세상영광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데 별 관심 없다고 말하지만 실상 자신은 그런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영광을 맛본 사람들은 안다. 왜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지 못하겠는가?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욕망중의 하나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어디서든 높임 받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조심해야 한다. 세상영광에는 사탄적인 요소가 있고 중독성이 아주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단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세상영광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자들이다. 요한복은 12장 42절에 보면 관리가 나온다. 관리는 “알콘 – 첫째(계급, 권세), 주(통치자), 방백, 왕, 지배자, 지도자”라는 뜻이 있다. 세상영광의 맛을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밤에 찾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대인이 유대종교로부터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유대사회로부터의 분리, 단절, 더 나아가 죽음을 의미했다. 출교를 결정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지 않았는가?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수 있다. 식당에서의 식기도, 어떤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세상 어떤 것을 사랑할 수 있다. 부모, 자녀, 친구, 예술, 스포츠를 사랑할 수 있다. 아니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만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지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다. 더 사랑할 때 우리는 결국 주님을 부인하게 된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을 더 사랑할 때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셨을까? 사랑하면 모든 것을 건다. 생명까지 거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한 것이다. 사랑하면 생명을 줄 수 있다. 사랑하면 아픔, 상처도 이겨낼 수 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네가 사람의 영광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다. 우리는 담대하고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제가 사랑하는 것이 많지만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영광은 한낮 그림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