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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요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 (요한14,7-14)
제1독서<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사도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답송>시편98,1.2-3ㄱㄴ.3ㄷㄹ-4(◎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복음<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7-1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13,44-52)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50~52)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유대인들은 그 성(城)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동원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 성에서 쫓아내 버렸다.
'귀부인들'에서 '귀하다'는 뜻의 '유스케모나스'(euschemonas)의 원형 '유스케몬'(euschemon)은 지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으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지칭하는 형용사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매장한 아리마태아 요셉이 이러한 사람으로 묘사되었고(마르15,43), 베로이아에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지체 높은 그리스 여자들도 이런 사람으로 묘사되었다(사도17,12).
아마도 본문의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은 그리스인들로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고위층 관리 부인들이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적지 않은 여인들이 황제에 의해 행정관으로 임명된 예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 여인들 중에서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그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을 섬기는'으로 번역된 '세보메나스'(sebomenas)는 '경건한'(devout) 혹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God-fearing)의 뜻을 담고 있다.
한편, '유지들'(유력자들)로 번역된 '프로투스'(protus)의 원형 '프로토스' (protos)는 지위와 순서, 영향력에서 으뜸이고 최고인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안티오키아 성에서 행정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여기에서 '박해하게 만들고' 라는 말은 단순히 말로 박해를 가했다는 의미를 넘어 신체에 해를 가했다는 의미이다.
'박해하게 만들고'라고 번역된 '에페게이란 디오그몬'(epegeiran diogmon; raised persecution; stirred up persecution)은 '핍박케 하였다'는 뜻이다.
코린토 2서 11장 23~26절의 바오로 사도의 술회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의 사건도 포함한다면,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붙잡혀 태장으로 맞은 후에 쫓겨났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고위층 관리들은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아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가져다 주는 자들을 박해하고 강제로 추방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 즉 상대가 복음을 영접하지 않을 때에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명령(루카9,5; 10,11)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먼지'로 번역된 '코니오르톤'(koniorton)은 '티끌'(dust)을 말한다.
그런데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자신과 그 지방은 더 이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발에 묻은 먼지 하나까지도 털어내 버림으로써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많은 영적 결실을 맺었으므로, 그 도시 전체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기 보다는, 그들을 배척하고 쫓아낸 유대인들과 고관들에 대해서 먼지를 털어버리는 상징적 행동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제자들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믿음을 가진 그곳의 새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항하여 분노에 사로잡히고, 복음 선포자들을 내쫓아 버린 자들과 달리 복음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적인 선물을 받아 날마다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가득 차 있었다'(충만하였다)로 번역된 단어 '에플레룬토'(eplerunto)가 계속되는 상황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미완료 과거 동사인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말씀을 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된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사도4,31; 8,8).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늘을 받아 들이려 하늘이 되는 것, 빛을 받아 들이면 빛이 됩니다.
(요한14,7-14)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로 오셨습니다.(요한6,38참조)
(루가11,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 손가락으로(엔타울로스)- '내 안에 있는 손가락으로'라는 뜻입니다. (요한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 ‘내가 오랫동안 하느님의 능력으로 아버지를 보여 주었쟌아 그런데도 모르겠냐?’ 하시는 겁니다.
보다(오라우)-이해하여 의미를 깨달아 보는 것,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일로 다 깨달아 보았다면 하느님을 뵌 것이다. 하십니다. (요한6,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예수님의 말은 못 믿어도 당신이 하신 일들은 믿어라 하십니다. 그 일이 곧 하느님의 뜻이며 우리 구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2,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요한3,16-17)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예수님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더 큰일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그분 곁에 믿음으로 남아있었던 사람은 몇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믿지 않았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그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 삼천명이 세례를 받습니다(사도2,41) 그리고 점점 퍼져나가 지금은 온 세상에(온누리) 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큰일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하신 그 큰일을 우리에게 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예수(구원)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 예수님의 뜻을 청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 뜻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이사43,7참조)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 그 사랑이 드러나 나타난 것, 영광(독사)입니다.
(마태6,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주문 외우듯 하며 마음으로는 우리의 뜻이 아버지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로 기도하니.....
(요한16,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예수님은 이 땅에 것을 주시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구원하시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값 없이 만들지 맙시다. 우리의 생명, 빛이신 구원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값 없이 만들어버리면 우리가 받는 용서, 평화, 안식, 구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가 말씀을 전하는 자신을 빛이라 합니다.
(사도13,47)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 하느님의 말씀이~ 육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입니다.(요한1,14)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 빛입니다.
(요한1,9.11-12)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아멘.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14,7-14)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0)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동질성과 하나되심을 보여 준다.
먼저 성부와 성자께서 각각 독립된 신적 위격(位格)을 지녔음을 드러낸다. 성자는 '에고'(ego), 즉 '나' 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고, 성부 역시 '토 파트리'(to patri; the Father), 즉 '아버지'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이란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도 '아버지',즉 성부 하느님과 '내', 즉 성자 하느님께서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여기에 또 다른 신적 위격으로서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 26절에 나타나는 성령 하느님까지 포함시켜 요한복음 14장에는 삼위 하느님께서 모두 등장한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성자 하느님께서 성부 하느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하느님 안에 계시다는 것은 이 두 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는 분명히 독립된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체론적 동질성을 가지며, 신적 속성에 있어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 예수님을 본 자는 성자와 동일 본체이신 성부 하느님을 본 것과 똑같다. 이러한 영적 신비를 필리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며, 더 나아가서 성령 하느님도 하나이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서도 유비(analogy)를 찾아 볼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는 오직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계시다는'으로 번역된 '에스틴'(estin; is)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에이미'(eimi)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이다.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너는 믿지 않느냐?'
여기서 '믿지'에 해당하는 '피스튜에이스'(pisteueis; you believe)는 현재 시제이므로 진행 중인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거듭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필립보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너희에게'에 해당하는 '휘민'(hymin; to you)이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므로, 이 문제는 단지 필립보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메시지, 하느님의 마음 및 우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생각을 지니고 오직 그것만을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그분을 모시고 함께 헀던 제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이것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영적 진리가 단순히 경험이나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세적, 정체적 메시야로서 탁월하며 특별한 지도자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라는 영적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이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의 믿음의 부족과 영적 무지 때문이었고, 동시에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역시 이러한 믿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요한복음 14장 10절 후반부의 '머무르시는'에 해당하는 '메논'(menon; dwells)은 현재 분사로서 중단 없이 계속 거주하시는 상태를 나타내고, '하시는 것이다'에 해당하는 '포이에이'(poiei; does)도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잠시도 분리됨이 없이 당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유다인들의 믿음은(탈출 33,20 참조)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한계성에 관하여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들과 성경을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때가 차자 외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온전히 계시하셨습니다.
필립보는 “나를 알게 된 이는 아버지를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아버지를 뵐 수 있게 하여 달라고 청합니다.
지금껏 주님께서 아버지와 이루시는 일치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이 참으로 무색해집니다.
주님께서 오천 명을 먹일 빵을 ‘어디서’(주님에게서) 구할 수 있는지 물으셨을 때도 필립보는 ‘얼마’(이백 데나리온)가 필요하다며 동문서답합니다(요한 6,5-7 참조).
필립보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과, 주님께 모여든 이들을 모두 배불리고 싶은 열정을 지닌 훌륭한 제자지만, 여전히 자기 생각과 기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충분하다’(동사 ‘아르케오’)는 표현은 두 번만 나오는데(6,7; 14,8 참조), 모두 필립보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뵙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이백 데나리온은 되어야 ‘충분하겠다’는 그의 기준은 매번 주님의 뜻과 달랐습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만족하는 방법으로만 주님을 찾는 자는 진리를 유연하게 받아들여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1독서는 자기 생각에 갇혀 진리를 고집스럽게 밀어낸 유다인들과,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기쁘게 살며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이방인들의 서로 어긋난 모습을 전합니다.
요즘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산란한 마음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바람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주님은 우리가 더 큰일을 하게 하신다.
(요한14,7-1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일만 하셨다. 주님은 그렇게 아버지와 하나라는 말씀이다.
(요한10,30)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 그러나 필립보는 못 알아듣는다. 죄인들이 하느님을 뵙게 되면 죽음이다. 빛 앞에 어둠이 사라지듯, 불에 모든 것이 타버리듯 말이다.
(히브12,29) 29 우리의 하느님은 다 태워 버리는 불이십니다.
(탈출33,20) 20 그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하느님은 타락한 인간들과 함께 저주를 받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가 없게 되셨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창조 목적에 맞게 회복되기 전에, 하느님의 현존이 타락한 그들을 만나면 타락한 피조물들은 즉시 죽음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창세2,17) 17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죄와 거룩은 공존이 불가능하다. 거룩과 공의는 하느님 고유의 속성이기 때문에 절대 죄가 하느님과 함께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피조물들에게 직접 나타내지 못하시고 숨으시는 하느님이 되신 것이다. 당신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함이시다. 죽음(死亡)이란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호라우)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 호라우- 하느님의 뜻으로 보는 것. 예수님을 인간의 눈(뜻)이 아닌, 성령께 의탁하여 성령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 안에 하느님 그분의 뜻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을 뵌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봐야 하나,
(루가24,44-45)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 예수님은 말씀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보호자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깨닫고, 이해하게 하신다.(요한14,26 1요한2,27 1코린2,10참조)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구원을 목 보았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을 깨닫지(호라우)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못 보았으나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도 못 알아보았던 예수님을 2000년이 지난 오늘에 볼 수 있게된 것이다. 깨달음으로, 믿음으로......
성경이 요구하는 봄(視)은 망각에 새겨지는 물리적인 봄(블랙보우)이 아닌 이해하고 깨닫고 보는 ‘호라우’이다.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하신 말, 곧 하느님의 말씀이 일을 하신다. 우리도 같다.
(1데살2,13)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처럼 자신의 뜻(말)을 하지 않을(버릴) 때 하느님의 말씀이 일을 하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예수님께서 하신 표징, 기적들을 보고 당신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표징들과 기적의 진의(眞義), 곧 십자가의 신비, 자비, 은혜를 깨달아 믿으라는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으로 죽으러 오셨지 않은가...
(필립2,6-8)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곧 당신께서 죽으시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시다.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다.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 동등하심을 버리시고 말씀에 따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주님은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심겨지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그 첫 열매의 지체로 받는 구원이다. 땅인 우리의 부활, 열매가 되신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십자가의 제자들까지 도망가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보호자 성령께서 오시고 그 도망갔던 제자들에 의해서 말씀이 퍼져갔다. 베드로가 한번에 3000명, 다른 제자들과 함께 5000명을 회개 시켰고 바오로는 수만명이나 돌아와 믿게 하였다.(사도2,41 4,4 21,20 참조)
지금은 온 세상으로 말씀이 퍼져나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보다 더 큰일을 제자(사도)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믿는 자들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일에, 믿는 이들을 동참시켜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자기 증명, 자랑, 소원을 이루는 종교가 아니라 그 주님의 더 큰일을 하는 것이다. 그 더 큰일을 위해 지금까지 살았던 내 뜻(길)을 부인(죽고)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삶이며 신앙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기에 그 더 큰일을 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지금까지 제자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요한16,24) 그들은 오전 6시, 오후3시, 저녁에도 늘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그들 자신들의 소원을 위한 것일 뿐, 예수님의 이름 곧 하느님의 뜻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의 말씀만 하셨고 일만하신 하느님의 뜻인 이름이다.
그 이름 ‘그리스도’의 지체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빛의 나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
(묵시21,3-4) 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천주의 성령님! 아버지의 뜻이 땅인 저희에게 이루어지소서. ~아멘!!!
2024년 04월 27일 토요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당연히 서로 만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시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청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를 요구하는 황망함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된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가 또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 주어도’ 그 안에 있는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을 고발하며, 이제 그들을 떠나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된’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 땅끝’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화답송 참조).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한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우아함’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우둔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종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나 훌륭한 해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장에 현존하여 계시는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여 나가는 것은 종교적 허상일 뿐이고 그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