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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요일
[부활 제5주일] 나는 참포도나무요 (요한15,1-8)
제1독서<어떻게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사도9,26-31)
26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7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28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29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30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31 이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화답송>시편22,26ㄴ-27.28과 30ㄱㄴ.30ㄷ-32(◎26ㄱ) ◎ 주님, 저는 큰 모임에서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서원 채우리라. 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고, 주님 찾는 이들은 그분을 찬양하리라. 너희 마음 길이 살리라! ◎
○ 온 세상 땅끝마다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 만 민족 모든 가문 그분 앞에 경배하리니, 세상 모든 권세가들 그분께만 경배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모든 이들 그분께 무릎 꿇으리라. ◎
○ 내 영혼 주님 위해 살고, 후손은 그분을 섬기리라. 다가올 세대에게 주님 이야기 전해져, 태어날 백성에게 그 의로움 알리리라. 주님이 이렇게 하셨음이로다. ◎
제2독서<믿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1요한3,18-24)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복음<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5,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9,26-31)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27-30)
사울이 회심한 직후 하느님께서는 하나니아스를 준비하셨다. (사도9장) 그를 통해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령을 충만하게 하신 후, 그를 다마스쿠스 유대인들에게로 인도하게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울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바르나바를 사용하신다. 바르나바(Barnabas)는 히브리어로 '예언의 아들' 이란 의미의 인명이며,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를 '위로의 아들'(퓌오스 파라클레세오스 ; 사도4,36)로 번역하였다. 그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아 진실하게 헌금으로 드렸을 뿐만 아니라 (사도4,36) 선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도11,24)
당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의심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사울이 예루살렘 신도의 모임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바르나바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중재 역할을 담당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27)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에 해당하는 '에파르레시아사또'(eparresiasato)의 원형 '파르레시아조마이'(parresiazomai)는 '기탄없고 막힘 없는 언변'을 뜻하는 명사 '파르레시아'(parresia)에서 파생된 것으로, 회심한 사울이 복음에 관하여 전혀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선포하고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이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죽은 범죄자로 여기던 유대인의 미움을 사며, 목숨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 사울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말하였다.
바르나바는 사울의 그러한 면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사울의 이러한 면을 소개함으로써, 사도들로 하여금 사울을 자신의 동역자로 받아들이게 하였던 것이다. 바르나바가 사울을 도운 것은 성령의 감동과 바르나바의 선함 심성 때문이지만, 그는 이미 사울과 잘 아는 사이였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29)
'벼르고 있었다' 로 번역된 '에페케이룬'(epecheirun)의 원형 '에피케이레오'(epicheireo)는 '~위에'를 뜻하는 '에피'(epi)와 '손'을 뜻하는 '케이르'(cheir)의 합성어로서 '~에 손을 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사물을 '손으로 잡는다'는 의미와 더불어(루카1,1), 어떤 것이 이루어지도록 '착수하고 시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사도19,13)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이며, 또 미완료 과거 시제로 쓰여, 죽이려고 수차례 착수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유대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사울의 주장의 허구성을 밝히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나, 논리적으로 사울을 이길 수 없었던 이들은 과거 다마스쿠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울을 죽임으로써, 침묵하게 하려는 사악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30)
과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사울은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을 무릅쓴 선교 활동을 보고, 형제들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에까지 발전했다.
그들은 불타는 열정과 논리적인 복음의 전파로 유대교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대교인들의 제거의 대상이 된 사울이 처한 위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카이사리아'까지 데려가 멀리 그의 고향인 '타르수스'로 보냈다.
'알고'로 번역된 '에피그논테스'(epignontes)는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의 부정(不定 ;Indefinite)과거 분사이다. 이 동사는 어떤 것을 알되, 정확하고 철저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사울이 처하게 된 위기와 그의 입장을 정확히 알고, 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여 그에게 필요한 도움울 준 것이다.
즉 사울을 예루살렘 성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그가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을 확인하여 그를 타르수스까지 보낸 것이다.
'형제들'이라고 번역된 '호이 아델포이'(hoi adelphoi)는 '제자들'을 의미하는 '호이 마테타이'(hoi mathetai ; 사도6,1), '성도들'을 의미하는 '호이 하기오이'(hoi hagioi ; 사도9,13)와 함께 새로운 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의 명칭이다.
'성도들'이나 '제자들'보다는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사울과 그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졌음을 보여 주기에 적당한 말이다.
부활 제5주일 복음(요한15,1~8)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1)
요한 복음 15장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사랑과 인내에 대한 교훈이 주어지는 내용들은 요한 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전개되는 성주간 목요일 밤에 주어진 다락방 이별의 담화의 일부이다.
특히 요한 복음 15장 1~11절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육신적으로는 비록 제자들과 떨어지게 될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의 일치된 유기체이심을 보여 주는, 그 유명한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이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믿는 이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라고 하실 때, '참'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과 참포도나무이신 당신 자신을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해서이다.
팔레스티나의 특산물이며 매우 흔한 식물이기도 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구약시대 때부터 이스라엘은 주님의 포도나무, 혹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비유되어 있다.
그들은 주님의 포도밭(이사5,1~7)이었고, 주님께서 심으신 좋은 포도나무였으며 (예레2,21), 열매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였다(호세10,1).
하느님께서 이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가져다가 팔레스티나에 심으셨다는 시편 저자의 노래(시편80,9)에서 볼 수 있듯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다.
마카베오 시대의 화폐에 이스라엘이 포도나무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과 포도나무를 일치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 '참포도나무', '참된 포도나무'라고 주장하심 으로써, 동시에 가짜, 혹은 불완전한 포도나무와의 구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으로 번역된 '알레티네'(alethine; true)의 원형 '알레티노스'(alethinos)는 가짜 혹은 불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프슈데스'(pseudes; pseudo)의 반대로서 '진짜', '순수한', '이상적인'등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내포된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들은 가짜, 혹은 최소한 불완전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성경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지칭되는 이스라엘이 열매가 없는, 형편없는 포도나무, 들포도 나무라고 말한다(이사5,2).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불완전한 포도나무였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포도나무의 상징이 언제나 타락의 개념과 함께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하고 있는 주님의 포도밭에 나타나는 중심 사상은 포도밭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사16,10).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야생의 낯선 들포도나무로 퇴화되었다고 탄식한다(예레2,21).
호세아 예언자도 헛된 포도나무라고 외쳤다(호세10,1).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칭하신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 없는 포도나무라는 사실이다.
유대인,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마태3,7~10참조).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민족, 혹은 혈통, 가문으로 만나시지 않는다. 오로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서 개별적으로 만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로마2,28.29).
하느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계승하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뿐이다(갈라3,7.9).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때에만, 희망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열매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 맺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먼저 당신 만이 유일한 참포도나무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신 후에, 성부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를 밝히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신 '나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호 파테르 무'(ho pater mou; my Father)라는 호칭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독생성자 예수님만이 성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농부'로 비유되고 계신다.
'농부'에 해당하는 '게오르고스'(georgos; gardener; husbandman)의 기본적인 의미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농부'(2티모2,6), '포도밭 주인'(포도밭지기)(마태21,33~35) 등을 가리켜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관리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도 하느님께서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일치한 가지인 참된 믿는 이들을 더 나은 축복으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을 세밀히 관리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한편,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비유하시고, 성부 하느님을 농부로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곳 팔레스티나의 주요 농작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 재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동시에 이 가르침이 주어졌던 당시의 장소가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마르코의 다락방이었다고 할 경우에, 제자들 앞에 '아직 남아 있는 과월절 만찬용 포도주'를 바라보면서 이 가르침이 주어졌다는 것은, 제자들이 잘 알고 있던 친숙한 소재를 사용한 놀라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지조각 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신우식 토마스 신부)
[부활 제5주일]
십자가 대속을 진리로, 창조주의 공의, 정의로 쓰심 자체가 기적이다.
(1요한3,18-24)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 사람의 말과 혀, 곧 사람의 사랑을 말로만 하지 말고 용서, 구원의 진리이신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주는 참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앞16절)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 주님 십자가의 길, 그 이타의 사랑이 진리이기에 우리의 길(뜻)을 부인하는 그 죽음으로 주님의 길(뜻)을 전하는 것이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진리만이 용서로 자유, 마음에 평화를 준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 선악 구조의 그 사람의 마음(죄)보다 하늘의 대속, 그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크시다.
(창세8,21)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예레17,9)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 하느님은 우리의 무능, 불가능함을 아셨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그 진리 안에서 죄인인 우리가 자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 (요한15,6)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말씀을 안 들으면 버리시는 주님으로 보게 된다. 아니다 그 반대의 말씀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공부해야 한다.
(에페3,18-19)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 도덕과 윤리로 죄의식에 시달리던 마음이 새 계약의 피, 곧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 받았음을, 마음이 깨끗해 졌음을 믿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용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22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 계명을 지키는 것, 진리의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十字架가 주는 용서, 희망, 자유, 평화, 의로움, 곧 하늘의 생명, 구원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죄인들에게 십자가를 승리, 정의, 공의라는 하늘의 단어를 쓰시는 그 자체가 奇蹟이다. 그 기적을 서로 나누는 것, 서로 사랑이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ㄱ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진리로 의탁하는 삶, 그것이 진리께서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상태, 안식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티토1,14) 14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24ㄴ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 성령께서 우리(나)의 보호자로 가르치심을 믿는가?. 사도신경에서 매일 기도하는 “성령을 믿으며~”가 그것이다. 성령을 믿지 않는 것(모르는 것),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한다.(로마8,9) 그러니 그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는 성령 모독죄(훼방죄)이기 때문이다.(마태12,31 마르3,29 참조)
*가르치시는 성령이시다.
(요한14,26)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말씀(로고스)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레마)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구원의 계명(誡命), 의(義)로움, 사랑을 인간의 뜻을 위한 誡命, 義, 사랑으로 지킬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는 신앙을 살게 된다.(마르7,7-10참조)
*하느님의 뜻을 통찰하시는 성령이시다.
(1코린2,9-10)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시다.
(로마8,1-10)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4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5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6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7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십자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하라 하신 것이 성령이시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마태7,11)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루가11,13)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성령을 청하고 의탁하는 마음으로 머물면 진리이신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알고 믿게 된다.(요한8,31-32참조)
*대신 기도해 주시는 성령님~
(로마8,24-26)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은총의 보호자로 생명이 되어 주시는 성령님! 저희 모두 감사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4년 04월 28일 일요일
[부활 제5주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복음서의 특정 문구 “나는 –이다.”가 등장합니다.
좀 특별한 점은 “너희는 -이다.”라는 문장도 함께 등장하여 ‘나’와 ‘너희’의 ‘상보성’이 강조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이후 ‘당신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제자들에게 “너희가” 앞으로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당부의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이 표현은 ‘열매를 맺다.’라는 표현과 함께 연결되어 ‘머무름’의 결과가 ‘열매 맺음’이라는 것까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독서의 본문들 또한 주님 안에 머물러서 맺게 된 열매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불신을 감수하여야 하였던 바오로는 예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그러한 의혹과 소외의 상황을 이겨 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고”, “교회는…굳건히 세워지고,…그 수가 늘어나게” 되는 찬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수도자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기에 늘 제 마음에 담고 있던 물음입니다.
주관적 판단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일차적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머문다는 것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곧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일단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확신이 들지 않고, 하느님께 버려진 듯하며, 잔인하게 느껴지는 도전들이 연이어 다가온다 하여도, 그분을 떠나거나 공동체(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머물기’가 아닐까 합니다.
붙어 있는 가지는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그 때와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나는 참포도나무(십자나무)요
우리의 힘은 구원의 능력이 없으니 그 힘 ‘끊어버립니다’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나의 버림, 그 부인으로 하늘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15,1-8)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쳐 내시고~를 잘라버리시는, 버림으로 알아듣는다면~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12,47) = 이 구원의 말씀과 충돌합니다.
2절에 ‘다 쳐내시고’(헬라어-아이로)- 가지를 들어 올리다. 입니다. 햇빛을 잘 받아 열매를 잘 맺도록 깨끗이(카다이로) 가지치기를 의미합니다.
역시 열매를 잘 맺도록, 그리고 그 카다이로가 3절에 깨끗하게(카다로이)와 같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그 모두 열매를 잘 맺게 하기 위한 농부의 손길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 가지를 높이 들어오려 열매를 맺게 하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치기를 해 준다.’입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 내 본성의 자리에서 들어 올려짐이, 그리고 그 가지가 잘려지는 아픔이 있어도 참고 붙어있어라 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붙어있기 위한 힘은, 죄인인 나와함께 하시기 위해 하늘께서 나무로 땅으로 내려오신 그 신의 자리의 버림, 죽음, 그 사랑을 깨닫는 그 깨달음입니다.(탈출15,25참조)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뜻 안에서 청하라~입니다. 참 포도나무의 뜻은 그 나무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지의 들어 올려짐과 가지치기, 그 사건들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깨달아 받을 수 있도록 이끄실 보호자 성령을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이끄심, 보호하심으로 깨닫고 믿고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생명입니다.
(요한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 우리가 맺는 열매는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뜻, 그 자기 의로움의 길을 버리는~ 그 자리에서 들어 올리심이, 잘라내심이 맞습니다. 하는 그 자기 부인으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 외 아드님을 포도나무로 이 세상에 내주시어 죄인들을 접 붙이시어 하늘의 존재로 살려 내시는~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그 하느님의 뜻, 그 일이 참 의로움이며 하느님만이 의로우신 분임을 고백 드리는 것입니다.
그 영광 드림을 위해 인간의 희생, 사랑, 의로움은 개짐(쓰레기)일 뿐임을 인정하는(이사64,5) 그 자기 부인으로 구원의, 하늘의 의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바2,3)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마태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16,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참 포도나무- 십자 나무 입니다. 자기 버림, 자기 부인의 그 열매로 얻는 포도나무의 생명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