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워리기자단 주제 책인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읽었다.
이 책은 수남과 채령이라는 두 주인공의 반세기 넘는 일생을 기록한 책이다. 일대기를 다룬 만큼 두 주인공을 둘러싼 시대와 무대도 엄청나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현재까지, 일본과 중국을 넘어 미국까지. 과연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방대한 내용이다.
일곱 살 수남은 자작의 딸 채령에게 몸종으로 팔려온다. 감당하기 힘든 고초를 겪지만 그럴수록 수남은 강해진다. 유학 가는 채령을 따라 일본까지 같이 온 수남은 채령의 이름으로 위안부(황군여자위문대)에 가게 된다. 간신히 위안부를 빠져나온 수남은 중국에서 평생 그리워한 강휘를 만난다. 채령의 비밀을 지키고자 미국에 간 수남은 대학을 다니며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강휘를 만나고자 다시 중국에 온 수남은 그와 결혼한다. 평생 꿈꾸던 행복도 잠시, 일본군에게 겁탈을 당한 수남은 자신이 낳은 아이가 강휘의 자식인지도 모른 채 아이 곁을 떠난다. 채령은 강휘의 자식을 맡아 키운다. 수남은 친일파 자작의 딸인 채령이 자신의 인생마저 바꿔치기 하는 것을 보며 통한의 숙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수남은 몸종이었지만 일본도 가고 중국도 가고 미국도 갔다. 세상을 향한 끝없는 호기심 덕분이었다. 비록 학교는 못 다녀도 하나라도 더 배우려 노력했다. 수남의 열정을 보며 사람들은 글을 가르쳐 주고 영어도, 일본어도 가르쳐 주었다. 수남이 억척스레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것을 보며 부럽고 대단해 보였다.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 무려 4개 국어를 하는 능력자라니! 어쩔 수 없이 겉모습은 채령으로 있었지만 그 속은 다 수남이 채운 것이었다. 4개국어 능통자에 눈치1단에 손까지 빠른 수남은 지금이라면 어느 회사에서든 모셔가려는 인재일 것이다. 능력을 한껏 키운 수남이 승승장구 남은 인생을 펼쳐가길 기대했는데, 소설의 결말이 허무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억울했다. 운좋게 부잣집에 태어난 것 외에 스스로 키운 능력도 없는 채령이가 좋은 것을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일본 신랑 준페이에게 얹혀서 미국에 간 채령은 하는 일이 없었다. 돈도 안 벌고 밥만 축내면서 불평만 늘어놨다. 그런데도 쫒겨 나지 않고 잘만 살았다. 해방된 후에는 조국에 돌아와 예전의 부귀와 영화를 다 회복했다. 심지어 친일파 조상의 역사마저 바꿔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수남은 엄청난 능력자임에도 아들도, 남편도 없는 여자로 온갖 고생을 하며 말년엔 위안부 동료를 돕다가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어간다.
소설 끝부분에 김수남 할머니가 말한 내용이 인상에 남는다. “가짜일지언정 자작의 딸이라는 게 말할 수 없이 좋았지요. 김수남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기회, 신분, 재산, 가문... 자작이라는 칭호가 오명이 되는 세상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자작의 딸로 살고 싶어 했을 것이오.” 수남의 고백엔 기득권층에 빌붙어 진실을 외면해 왔던 회한이 담겨 있다. 이 마지막 고백이 내겐 풀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바로 과거사(過去史) 청산, 역사 바로잡기이다.
과거사(過去事)란 지난 간 모든 사건이면서 동시에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논란돼 온 과거사(過去史)란 지배권력과 관련 있는 억압과 폭력 그리고 왜곡되고 은폐된 진실들에 관한 것이다. 식민 지배세력이나 권력자들은 백성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해 왔다. 인권유린을 자행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했다. 집권을 위해 맹목적인 이념갈등을 조장했고 민족사를 분단으로 이끌었다. (출처: 한국역사연구회 '과거청산의 의미')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적 부정의와 야만을 자행한 기득권층은 이를 은폐하고 왜곡하면서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적 혼란기를 틈타 윤채령처럼 과거를 왜곡하기도 했다. 그 까닭에 지난 100여 년 간 우리 사회는 정상적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과거사 청산이 안 되면서 우리사회의 신뢰지수도 전반적으로 낮아졌다. 그에 비해 독일은 학교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정치교육을 통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을 키우고 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이 필요하다. ‘역사 전환기의 사회정의란 무엇인가’를 고심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진실에 대한 사회적 회복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 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역사와 정치를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사회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과거사 청산의 문제, 이것을 김수남 할머니가 숙제로 남겨두고 가신 것 같다.
첫댓글 저도 김수남 할머니의 마지막 고백이 가장 인상깊었어요. 자작의 딸로 살고 싶었을거라는.
저는 아직 책의 앞 부분에서 머물러 있는데, 마치 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는 것처럼 매끄럽게 펼쳐집니다. 자세한 인물 묘사와 상황들이 궁금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많이 배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