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성! 그리고,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 2020. 7. 7. 최은정
98세의 나이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엄마는 71세였고, 종가집 맏며느리로 50여년을 함께 사셨다. 두 작은 아버지댁이 도보로 10분 전후 거리였고, 할머니는 아들을 못 낳은 큰며느리와 아들 둘씩을 낳은 두 며느리들을 심하게 차별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3년 정도는 치매가 겹쳐 할머니의 차별과 이중성은 온 동네에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 긴 세월동안 엄마에게 할머니의 이중성은 극도의 혐오대상이였고, 세상에서 이중성이 제일 싫다는 하소연을 딸들에게 하셨다. 우리집 자매들에게 솔직함은 보이지 않게 삶의 가치관이 되었고, 솔직함과 정직함은 하얀 거짓말조차 허용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유독 인간관계가 어려웠고, 그 고통은 수 년동안 술자리의 안주가 되었다. 퇴근 후 술로 버티면서 위장은 심하게 망가졌다.
남자친구가 생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자녀가 셋이 되고, 첫째 아이가 점차 자라 중학생이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역할에서는 다양성이 필요함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는 적당한 애교와 여성스러움이, 내 자녀에게는 눈높이에 맞는 톤과 혀짧은 말투가 절로나왔다. 이러한 다양성은 친정에서는 몹시 낯간지러운 언행으로 삼가해야 서로가 편하기에 옷을 갈아입듯 또 다른 이중성을 발휘해야 했다.
스스로 이중성을 선택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고, 마치 처음 소소한 도둑질을 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고통스럽게 시간을 흘려보낸 시절이 있었다. 또한 이중성의 갭이 큰 사람과 급격히 친해졌을 때 상대의 진심을 몰라 거북하고 부담스러워 피한 적도 있고, 지인들에게 별 이상한 사람을 보았노라고 흥분하며 내 경험을 얘기한 적도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 협소한 잣대로 멀쩡한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심히 부끄러웠다. 인연이 끊어진 사람이여서 다행이라 여기는 걸 보니 이 또한 나의 이중성이고, 넓게 보니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코로나19로 자녀들의 걸음마시절처럼 집안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해질녁무렵부터 다크서클이 자리잡아 무표정해지던 어느 날, 아들이 엄마사진을 찍었다고 보여주었다. 미간은 찌푸리고, 입은 반쯤 오므리고, 반쯤 감은 눈에 무표정한 내 모습은 흡사 저승사자의 느낌이여서 깜짝 놀랐다. 이게 ‘보여지는 나’였다니! 이 때, ‘바라보는 나’를 급히 찾았다. ‘엄마의 역할에 충실하여 인상까지 지친 거구나!’ 스스로를 미처 챙기지 못함에서 온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내 스스로를 괜찮다고 토닥여줄 수 있었다. 예쁘다고 자화자찬하면서도 저승사자같은 다른 모습을 포용할 수 있었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구분하여 바라볼 때 더 큰 나와 더 많은 나를 볼 수 있고, 한층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더 여유있는 사이가 되었다. 솔직함과 이중성은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처럼 어쩌면 다른 차원이였을 수 있겠다는 성찰이 최근의 발견이다. 이중성이 인간의 조건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구분하여 바라보는 것은 관계에서의 더 여유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고 절차이지 않을까? 나를 두 가지의 모습으로 구분하여 바라보며, 온전히 내 편이 될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하다. - 끝-
첫댓글 사람의 다면성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길고 긴 여정을 한 글에 파노라마처럼 엮어내셨어요...! 나의 화난 듯한 무표정을 딸이 찍어준 경험, 제게도 있어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간격을 좁히고 싶다는 고민은 멈출 수 없을 거 같아요. 다만, 그 차이를 있는 그대로 성찰하다보면 끝나지 않는 고민도 한 단계 도약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