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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시는 청각장애와 발달장애가 있는 7세 아이이다. 이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집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다. 몸이 약해서 넘어지기 일쑤고, 배변실수를 하며, 자기 얼굴을 손톱으로 긁는 자해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돌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다. 동네 못된 아이들이 키요시를 골려주기 위해 돌들 위에 오줌을 싸도, 그 돌을 들여올려 안는다. 그리고 돌들을 어딘가에 자꾸 올려놓는다. 하루는 아빠 빵집 진열대에 돌을 올려놓기도 하고, 죽어가는 매미 앞에 돌맹이들을 놓기도 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키요시는 어떤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 가족들의 인내는 바닥이 났고, 아빠는 아이에게 폭력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가족들은 키요시를 시설에 보내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길 위 다리를 건너던 키요시와 키요시의 엄마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면서 넋두리를 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키요시는 돌들을 다리 난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곰곰이 지켜보던 엄마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키요시는 돌들에게 말을 하고 있었구나.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기 위해 돌들을 올려놓았던 것이고, 맛있는 빵을 보여주기 위해, 죽어가던 매미를 돌들과 응원하기 위해 돌들을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요시도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키요시를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내가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는 5~6학년 독서동아리에서 얼마 전에 함께 읽은 도토리의 집이라는 만화책 1권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이들은 이 장면에서 많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참고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영상도 있다. https://youtu.be/AwmL74qVEh0)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를 두 번 째 읽었을 때 위의 장면이 생각났다. 책의 저자들은 ‘삶을 읽어내는 리터러시’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리터러시가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다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키요시의 엄마가 키요시의 언어를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는 4~50대를 텍스트의 자식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 이전 세대는 배움의 기회가 적어 텍스트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이후 세대는 인터넷을 타고 ‘핵’, ‘개’, ‘존나’ 같은 접두사와 수식어구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디지털 세대다. 텍스트의 자식들은 윗세대에는 무식하다 하고, 아랫세대에는 천박하다 한다. 특히 어르신들이 유튜브를 타고 그들만의 정보에 빠져 비정상적인 선동에 휩쓸리는 것은 더더욱 이해 할 수 없다. 어르신들은 예전의 어른들처럼 존경받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텍스트의 자식들은 가짜뉴스를 구분 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헷갈리는 것들은 팩트체크라는 것을 할 수도 있는 능력이 있다. 최소 지식에 관련해서는 권력 우위에 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텍스트는 언제부터 권력이었을까? 문자가 생긴 이후로 문자는 곧 권력자들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작은도서관의 경우 약 15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지식은 곧 권력이었던 시대에 그 권력을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도서관은 어떤 모양이었던가? 조용하고, 통제되는 엄숙한 공간으로 기억되지는 않는가? 대학의 도서관, 공공의 도서관들 모두 절대 적인 지식의 권력에 사람들이 굴복하도록 하고 있는 모양이다. 작은도서관 운동은 그런 권력과 같은 지식을 일반 사람들이 나누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친숙한 공간으로부터 시작했다. 작은도서관인데도 불구하고 엄숙하게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곳은 작은도서관이 아니라 권력 도서관의 주니어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에게 텍스트는 노동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역사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유튜브는 불과 600년 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텍스트 노동으로부터 해방감을 주고 뇌를 편안하게 하면서도 유능감을 주는 것 같다. 연관 검색은 내가 구지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아도 새롭고 재미있는 것으로 우리를 안내해준다. 그러니, 어떻게 접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터넷 검색만 하면 내가 찾던 것들이 줄줄 나오니 이보다 편리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자꾸 책을 읽으라고 하는 걸까?
일단, 이 책의 저자들이 사회학자와 언어학자인 만큼 텍스트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이전에 구술문화는 말이 and로 연결되어 개념들이 나열되기만 하는 한계가 있었는데, 문자는 그것들을 겹쳐서도 보일 수 있도록 공간화 했다고 한다. 말은 과거의 것들을 현재로 가져온다면 문자는 현재의 것을 미래에 기록하는 개념이다. 또한 책은 사고의 사유화를 가져왔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람은 고독해지는데 그 시간동안에는 오롯이 책과 나만 존재하며 그 순간의 사고는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거다. 그리고, 말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랑, 자유, 평등 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담을 수 있다. 영상으로 지금의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준비와 편집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텍스트는 그 자리에서 끼적이면서 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텍스트를 우리 교육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왔는가? 책 28페이지의 예는 좀 충격적이었다. 바보가 치과에서 이를 뽑았는데 치과의사는 그걸 강아지처럼 끌고 다니면 안 아플 거라고 했고 그걸 바보는 따라했다. 바보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가 문제였다. 그런데, 정답이 ‘웃기다’였다고 한다. ‘슬프다’, ‘우울하다’라는 것이 왜 답이 안되냐며 물었을 때 선생님은 “시끄러, 웃기다면 웃긴 줄 알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갇힌 생각을 하도록 하고 있다. 수능 이후에도 지문의 길이도 길어지고 복합적인 의미를 따지는 역량이 고려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시험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반면 유튜브는 살아있는 지식을 준다. 일단, 능동적으로 찾아본다는 것부터가 차이가 난다. 우리 아이들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알았다면서 늘 나에게 보여주고 공유하려고 애쓴다. 우주에 대한 유튜버의 생각, 몇 명이 나와서 하는 간단하고 재미있는 실험, 머랭쿠키를 만드는 방법, 치즈볼 만드는 방법 등 내가 봐도 재미있는 것들이다. 몇 달동안 보더니 이제는 머랭쿠키를 혼자 잘 만든다. 어떤 도구를 더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요즘처럼 집에서만 생활하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이렇게 유용하게 활용하기도 하니 다행이다.
그런데 147페이지를 읽다보니 걱정이 들기도 했다. ‘요약되고 편집된 동영상을 기본 미디어로 삼아서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면 일종의 관성, 아비투스가 생긴다는 거예요. 알고 싶은 걸 빨리,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건 소화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접하면 지루해서 끝까지 볼 엄두가 안나죠. 이런 변화 속에서 미디어를 편식하게 되고요. 몸은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뱃의 영상에 익숙해지죠.’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정보만을 주로 접하다 보면 좀 더 어렵고 이해하는 데 에너지가 들어가는 자료들은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좀 두꺼운 책은 더더군다나 읽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176페이지에 나온 내용도 보면 ‘앎이 삶을 방해하는 역설’ 한마디로 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오류도 생각하지 못한 채 확증편향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짧은 영화 소개 동영상을 보고 영화를 다 봤다고 착각할 수 있고,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나의 생각도 지지하고 있으니 나는 맞고 저 사람은 틀렸다고 단정지울 수 있다. 이는 온갖 혐오문화, '00충' 문화에 많이 기여를 했을 것 같다. 내가 만난 어린이, 청소년들을 보면 대충 훑어보고 '나는 다 알아요'라고 말하는 걸 종종 보게 된다. 나는 이미 다 아는데 왜 힘들여 들여다 봐야 하죠? 라고 질문한다. 확, 걱정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책, 유튜브외 여러 가지 미디어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리터러시의 강점이 있다. 각각의 미디어에 대한 경험을 하고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매체를 경험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고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리터러시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현실은 유튜브에 너무 많이 기울어가고 있는 모습이라는 거다. 그렇게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교육의 몫이 큰 것 같다. 196페이지에 이야기 된 ‘학생들이 배워야 될 것은 평가에 최적화된 기술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이라는 것, 적절하게 소통하는 능력은 선다형 문제로 측정할 수 없다. 개인의 역량을 공정하게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리터러시에 대한 사회적 역량을 공공적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자꾸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겁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긴 글을 읽어내는 힘은 필요한데 점점 균형이 깨져가고 있다.
초반에 잠시 이야기 한 어르신들 이야기를 다시 하면 나도 그분들에 대해서 가스통 할배, 수꼴 등의 말을 하며 비판적인 자세로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후 어르신들의 서사를 생각해 보면서 그들의 리터러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 가난하게 태어나 당장의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것이 급한 세대였다. 그들도 마음 한구석에는 사회 참여의 욕구가 있었지만 펼칠 수 없었는데, 그것이 유튜브를 통해서 분출된 것이다. 그들의 서사를 보지 않고, 그들의 무모함만을 비판하지는 않았던가? 이제는 어르신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또한, 촛불혁명 이후 보수와 진보 뿐 아니라 진보 내부에서도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대립되는 경향을 보게 되는데 다 자기들 끼리 모이고 뭉치고 강화되면서 자기들의 주장만을 하는 것 같다. 한번은 보수 유튜버의 SNS에 지지자들이 엄청나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내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아니, 골라서 듣고) 나만의 생각을 강화 시켜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위치를 곤고하게 하는 권력의 리터러시가 아닌 '삶을 읽어내는 리터러시'가 정말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여러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언어가 있고 그것을 이어주는 리터러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그것이 책이던, 유튜브던 간에 균형이 참으로 필요할 것 같다.
첫댓글 와, 스스로의 문해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2번 읽으면 이렇게 일상과 텍스트를 아우르는 글이 탄생하는군요! 작은도서관마저 권력도서관의 주니어라는 해석, 텍스트가 노동이 되어버렸다는 말에 깊이 동감합니다.
저도 이 글을 두 번 읽었습니다 ㅎㅎ
은중님 글은 항상 생각거리를 주고 곱씹어볼 수 있어서 좋아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