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와 글과의 소통
요즘은 글을 읽는 것이 참 힘들다. 무엇보다 글의 핵심을 찾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중심문장 찾기’가 잘 안 된다.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말이다. 빠르게 읽고 핵심을 짚어가며 요약도 곧잘 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읽는 속도도 더디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몇 곱절씩 드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로 문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이유를 찾기 위해 예전의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나의 모습 1: 신문읽기와 퀴즈쇼)
대학 시절 나는 신문 읽기를 무척 좋아했었다. 매일 아침에 챙겨들고 나온 신문을 빈 강의실에서 공강 시간 마다 읽었다. 오후 수업이 없었던 주로 금요일 오후에는 방바닥에 신문을 넓게 펼쳐놓고 서너 시간씩 쭈그리고 앉아서 꼼꼼히 읽곤 했다. 이를 지켜보던 동생은 “신문을 다 외우겠다. 재밌냐?” 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세상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신문을 꼼꼼히 읽다 보니 동년배들 사이에서 나는 시사상식에서 뛰어난 친구라고 알려졌다. 어느날 나는 칭찬으로 우쭐해진 기세를 몰아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퀴즈 아카데미”에 나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팀을 이뤄야 하기에 친구 몇 명이 같이 움직였는데, 예선전 준비를 위해 한 친구가 시사상식백과사전(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안나지만 이와 비슷했음)이라는 요상한 책을 가지고 와서는 이걸 암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상에나! 무슨 책이 이렇게 두껍지? 지금까지 내가 봤던 책 중에서 전화번호부를 제외하고 가장 두꺼운 책이었다. 우리 할머니가 쓰시던 목침보다도 높았다. ‘스르륵’ 책장을 대충 넘겨내용을 들여다 봤더니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무엇인가 많이도 적혀 있었다. 두꺼운 것들이 그 시절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시사상식들이었다. 놀라웠다. 이걸 어떻게 외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접하는 두께와 빡빡하게 정렬된 (나름 중요하다고 하는) 지식들이 나를 압도하여서 였다. 무엇보다 그 책의 내용을 짧은 시간 안에 머릿속에 구겨넣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일 뒤에 종이조각처럼 날아갈 것인 그 많은 정보들을 마구 집어넣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었다. 글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하고 그러는 과정이 바로 재미인데, 이건 너무 재미없어 보였다.
“나는 빼고, 너희들이 팀 짜서 나가. 난 재미없어서 못하겠다”
“뭐? 그래도 우리 중에 너가 제일 시사상식이 풍부해서 너가 나가는 게 유리한데.”
“아냐, 재미없어. 너희들 하는 거 도와줄게. 난 방청석에서 박수나 칠란다.”
내가 신문을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는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읽으면서 내 생각이 정리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사상식이 풍부해진 건 부수적인 효과였다. 나는 글을 읽을 때 재미와 생각정리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나의 모습 2: 고시반을 박차고 나와서)
우리 과 학과장님과 고시반 지도교수님은 매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1학년들을 행정고시준비반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온갖 미사어구를 동원하고 꼬셨다. ‘사무관의 펜대 하나로 국가 정책이 좌우된다, 여성이 그나마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직업은 공무원이다’ 등등 교수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나는 이미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고위 관료가 된 것 같았다.
첫 고시반 모임이 있는 날, 각 과의 신입생들이 강의실에 구름처럼 몰려왔다. 교수님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나도 교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빼먹지 않겠다는 마음자세로 일찌감치 강의실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교수님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행정고시반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엉덩이가 무거워야 해. 그리고 매 학기 시험을 봐서 성적이 안좋으면 고시반에서 나가야 한다. 한번 나가면 들어오기 힘들고, 과목은 뭔지 다 알지? 행정법, 민법, 한국사....... 어쩌구 저쩌구... (생략)”
‘아, 행정법, 민법, 이 두꺼운 책을 머릿속에 넣어야 하는구나. 그렇구나. 음.’
한 20분이 지났을까? 문득 ’근데 이거 정말 재미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벌떡 일어나 초롱한 눈망울로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뒤로 하고 그 강의실을 나왔다.
나에게 행정고시준비는 죽어있는 지식을 머릿속에 밀어 넣는 지루하고 재미었는 일로 보였다. 마치 길바닥에 뒹구는 나무토막을 들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이상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고시준비는 자격시험 준비과정이기 때문에 재미와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있지만,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응답하지 못하는 죽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싫었다. 그저 나는 재미가 중요했고 묻고 답하는 과정이 꼭 필요한 글 읽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사이 글이 안 읽혀지고 핵심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가 혹시 재미와 소통의 부재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저 주어진 글을 읽고 있는데 내 생각을 정리할, 다시 말해 글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글과의 소통이 없으니 재미가 없고,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니 지식을 이해하는 자신감이 떨어지고, 때로는 글 읽는 것이 고통스럽기까지 한 상황이다. 재미와 소통을 되찾는 길을 어떻게든 찾아야 할 것 같다. 요즘 너무 괴롭다.
(번외 정보1)
퀴즈아카데미에 나갔던 내 친구들은 비록 2차전에서 탈락했지만, 방송국 조명에 주눅들지 않고 진행자가 던지는 질문과 거의 동시에 며칠 전에 머릿속에 구겨넣었던 정보들을 적절히 빼내어 빠른 손놀림으로 상대팀 보다 먼저 버튼을 누르고 “정답”을 목청껏 외쳐보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친구들의 출연료와 나의 방청석 참석 수고비를 합쳐서 MBC 주변 허름한 식당에서 맛나게 부대찌개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갑자기 즐거워진다.
(번외 정보2) 고백하자면 고시반을 박차고 나온 이유는 사실은 고시공부가 그냥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글 읽기와 연결시킨 것은 조금 무리수 인것도 같다.
첫댓글 리터러시와 크게 관련없는, 요즘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널리 양해 바랍니다.
글을 읽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일화들이에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리터러시라는 건 결국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이해력 아닐까요? 기계적인 글 읽기, 주입식 공부에 파묻혀 사는 우리의 전생애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