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간만에 미림에 담궈둔 날치알이 있고, 엊그제 산 김가루가 잔뜩 있으니까, 압력솥에 밥을 해서 뜨거울 때 단촛물을 넣고 <어제 뭐 먹었어?>에서 본 마제즈시를 하는거야... 닭도 있으니까 지쿠젠니도 하고... 신이 나서 만들었지만 역시나... 결과는 ... 어제 제대한 지땡이도 "엄마...너무 시고 달아....." 효땡이는 "엄마, 이게 떡이야 밥이야???" 신땡이는 "엄마 일단 냄새가 ... 이건.. 막 먹고 싶은 그런게 아니야, 정말 웬만하면 내가 그냥 먹겠는데..." 한입 베어물고는 내려 놓는다....
망연자실해 있는데. 페이스북에서 알림이 울린다. 엊그제 소근이가 생일이라고 선물해준 양말 포스팅에 누군가 좋아요를 눌렀나보다.. 어랏 한동안 전혀 소식이 없던 동하? 그런데 프로필과 이름이 왜 한자로 바꼈지?? 좀 이상해서 메시지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말인 즉 몇달 전 해킹을 당해서 본인과 가족의 모든 휴대폰과 전화번호를 갈아탔다는 거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게 정말 동하 맞나? 계속 의심을 해야했다, 너무 오래간만의 목소리가 동하가 아닌 것만 같아서, 어느 포인트에서 안심을 해야하고 마음 놓아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하는 반가운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째가 자폐가 있어 여러모로 고생하다가 피아노로 예대에 간 이야기며 중국에서 근무할 때 국제학교를 다닌 덕에 영어와 중국어가 되는 큰아들이 본인과 같은 대학을 나와서 같은 계열에 취직해서 전공과 관련 막히는 게 있으면 아빠한테 전화한다는 이야기, 막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니 졸업할 때까지는 일을 더해야 한다는 이야기, 와이프도 집에만 있는거 싫어서 사회복지 쪽 공부하면서 일한다는 이야기가, 점점 동창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로 번져갔다.
뭐니뭐니해도 PC(폴리카보네이트) 업계 2위가 된 춘서형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나 보다. 그간 연 매출 5~600백을 넘나 들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가림막 수요가 급증해서 올해 순영업이익만 100억 이라나.. 그런데 춘서형이 PC 로 갈아 타면서 넘긴 압출기며 믹서로 현도가 쫄딱 망해서 이혼에 지금 어디 사는지 연락도 닿지 않는다, 병성이 개는 정신 좀 차려야 한다, 우리 중에 가장 빨리 상무 단 제섭이는 올해 다행이 안 짤렸더라..
"대기업 중국 공장장에, 국내 ERP 공장장, 본사 기획 경영팀으로 있다 3년 전부터 자회사 CEO 됐어, 요즘 내 나이 다 명퇴야.. 줄줄이.. 난 앞으로도 쭉 ERP 하고 싶은데 내가 다시 공장장 하게 해 달랠 수도 없고, 나도 고민이 많아.. "
결국은 우리 나이 명퇴 이야기까지 흘러 갔다. 좋은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 왔지만, 안정적으로 정년퇴직하고 싶지만, 그때 되면 더 할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면서, 최근 투자받은 200억으로 현재 적자 모면하는 것 까지 하고 나면 나도 여기서 더 할 일은 없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이 많다고 털어 놓는다...
국내 굴지 대기업의 공장장과 본사 요직에서 근무한 이 좋은 역량으로 다시 뭔가 시작해야만 한다니 들어봐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이제 앞으로 2~3년,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우리 아무도 모르는데, 코로나라는 어마무시한 변수도 이렇게 떡 버티고 있는데, 누구도 안전하진 않구나 이런 깊은 속내를 들으니, 마음이 먹먹해 졌다.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의 작가 말에 의하면 "누구든지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 앞에서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런 인간을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프레임에 가둬 이분법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으로 인물들을 대하자 그들도 내게 솔직하고 깊은 속내를 드러내 주었다"고 한다.
"극렬하게 반항할 줄 알았던 채령이 순순히 자신을 받아들이자 준페이는 허탈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준페이는 채령을 안을 때마다 그녀가 적극적이면 닳고 닳은 여자처럼 여겨져 기분이 나빴고, 소극적이면 자기를 여전히 싫어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채령은 자신에게 전전긍긍하는 준페이보다 무심한 지금의 준페이가 더 남자답고 좋았다"
실제로 작가가 그들의 솔직한 속내를 듣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세심한 심경 변화를 그려 낼수 있을까?
살아 움직이는 듯 한없이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들의 너무도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 채송아 선생님의 정성어린 채근이 없었다면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너무도 많은 이 시기에 도저히 읽지 못했을 것이고, 읽고나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런 보물같은 이야기를 읽지 않는 다는 것은 너무나 바보같은 짓이다.
한 페이지도 제대로 쓰기 힘들어 끙끙매는데, 어떻게 이런 긴 소설을 이렇게 빠져들게 쓸 수 있을까? 나는 요리 잘하고 싶은데 삼형제는 군대 밥이 맛있다거나, 노래를 잘하고 싶은데 성가대 20년 한번도 솔로 당첨이 안되었었다거나, 이 수영장에 가장 오래 다녔는데, 정말 수영을 제일 못해서 중급 레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보다 더더더 절망스러운 건, 글을 줄기차게 쓰고 싶은데 누구와도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과도...
나는 " 이게 다 무슨 소용있나..." 체념하며 계속해서 내 머리를 비워낸다. 안쓰는 물건을 모두 내다 버리고 집을 비우는 듯 그렇게 삶을 정리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것만 남아서 입을 꾹 다물고 다만 오늘 주어진 길을 걷게 된다.
말수가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잘 나누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더 더 더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에 겨워진다. 풍성했던 상상력도 점점 메말라 간다...
아 이렇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한 격리 기간이 1년이 되어가고, 심지어 거리두기 단계가 사적모임 5인 제한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작별은 한몸을 쪼개는 거라고 하는데, 2020년 이 연말에 코로나와 진심 작별을 고하고 싶다.
막막하고 아쉬은 시기 윤채령과 김수남의 슬프고도 속 깊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조금 위안이 되는 시간이었다.
첫댓글 아, 선생님. 글이 과연 어디로 전개될까 흥미진진했습니다. 참 힘든 한 해를 보내고 말았네요. 우리 모두 다. 그래도 함께 책 읽고 글 쓰고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