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고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제대로 인성과 사회성 교육을 받지 못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원에서 바른 인성과 사회성 교육을 받았다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치원에서는 인성과 사회성 교육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교육해야 하는 것만을 가르칩니다.
친구가 놀려도, 친구가 장난쳐도 지도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었을때만 제외하고.
상처가 나서 피가 난다든지, 상처가 표가 날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지도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도방법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유치원선생님을 비난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현실입니다.
유치원선생님들은 유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들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주 유능하고 최선을 다한 선생님조차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전 선생님들을 욕할 수 없습니다.
유치원에서는 친구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가르쳐야 하고(항상 리더가 정해져서는 안됩니다. 돌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친구와 다툼이 있을때 어떻게 친구를 이해하고 화해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두 사람 모두에게 말 할 기회를 충분히 주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친구들이 그것을 보고 간접경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어떤 말이 마음이 아픈지 가르쳐야 합니다.(이상하다, 남자같다, 여자같다, 냄새난다, 그것도 모르니, 나는 아는데 등등)
유치원에서는 한글과 숫자가 아니라, 이러한 인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몰라서 친구를 괴롭히고 딴짓을 하는 유아가 있다면 한 번 더 설명해야 합니다.(유아는 3번이상 설명해야 합니다.)
동화책을 읽을때는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인지 아이들 하나한 설피면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못써서 힘들어하는 유아가 있다면 쓸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때가 되서 할 수 있을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가르쳐야 합니다. 친구들이 그 유아를 글자를 못 쓴다고 놀려서 놀림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가장 문제가 있는 인식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편견입니다.
또한 장난기가 심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폭력적인 사람은 절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인해 교사는 그 유아를 지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야단만을 쳤고
피해자는 계속해서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교사가 보지 않을때 폭력을 행사했으니까요.
폭력은 지도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행동을 한 유아와 눈높이를 맞추고 대화를 나눈다면 그 아이의 마음의 문제를 알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저의 네 명의 아이들을 모두 유치원에서 상처입히고 나서야 터득한 진실입니다.
또한 초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상처입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행히도 좋은 교감선생님 덕분에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상처입었기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힘든지, 무엇이 어려운지 물어야 합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말 안 듣는 제 아이를 선생님은 요즘은 사춘기가 초등3학년부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틀렸습니다. 제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은 것은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기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너무도 힘들어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모든 원인을 사춘기로 모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춘기가 아니라, 진짜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아이는 자신을 닮았지만, 아주 다른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지만, 결코 나쁜 아이들이 아닙니다. 힘들다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꼭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을때, 자신의 아이도 잘 자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