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자식은 내 몸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기까지는 동물과 달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 과정 중에 엄마는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고 때로는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자식을 향한 본능적인 사랑과 희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면 대신 아파주고 싶고
맛있는 게 있으면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식이 먹는 게 행복하고
엄마 보다 자식이 훨씬 낫다는 칭찬을 더 기쁘게 여깁니다.
때로는 사랑이 모자라지 않을까 하여 무언가를 더 해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합니다.
비로소 엄마가 되고 난 후 , 자신의 민낯도 가끔 들여다보며 성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엄마의 노릇을 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토록 나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위하고 챙긴 적이 있었던가요?
엄마...
자식이 태어나서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이대로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존재만으로 감사했던 마음이 유지되던가요?
차츰 사랑의 매를 들고 다른 사람의 자식과 비교합니다.
혼을 내고 때로는 감정적 화풀이를 합니다.
자식이 힘들 줄 알면서도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믿음으로 현재의 희생을 설득하기도 하죠.
자식이 독립하여 사람답게 살도록 그리고 남들보다 부유하게 살아갈 것을 소망합니다.
세상에 어느 엄마가 자식이 고생하며 사는 걸 바랄까요?
그러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특별한 장기가 필요합니다.
공부, 공부, 괴로운 과정임을 알지만 내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통로가 돼 버린지 오래 됐습니다.
이제 엄마는 학원비를 위해 화장품도 아껴 쓰고 옷도 안 사 입고
살림도 알뜰하게 하고 필요하다면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 아닌 누굴 위해 이랬던 적이 있었나요?
엄마는 위대하고 그래서 나는 위대합니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을 구현해 내고 있는 중입니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해명됩니다.
하지만 점점 자식과 엄마 모두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뭔가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사랑한다면서요?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의 실체는 야박하지만 소유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것이니까 사랑하고
내 것이니까 잘해주고
내 것이니까 희생하고
내 것이라 여기는 자식을 통하여 성취욕도 맛보아야 하고
내 것이라 여기는 자식을 통하여 이름도 떨쳐야 하고
내 것이라 여기는 자식을 통하여 우쭐거려 보기도 해야 하고
내 것이라 여기는 자식을 통하여 손가락질 받지 않아야 하고...
내 것이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라고요?
엄마의 사랑을 폄하하는 거라고요?
너무 삐딱한 시선이라고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일말의 비난과 억울함을 감수하더라도 엄마의 사랑에 대하여 한 번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얼마 전 친지의 결혼식에서 들은 주례사 중의 일부입니다.
종종 주례사에서 혹은 결혼식 축가를 통해서 들었던 성경에 나오는 “사랑”구절입니다.
감동적이지도 않고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 요즘 저의 고민과 맞닥뜨려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성경의 완전한 사랑과 인간인 엄마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 그렇다면 적어도 엄마인 내가 자식을 향하여 하는 행동을 사랑이었다고 핑계대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시로 완전한 사랑과 비교하면서 내 사랑이 미숙함을 알고 흉내라도 내면서, 아니 반성이라도 하면서
자식을 내 것이라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사랑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다시 출발선으로 ...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