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벨이 울린다. 영락없이 둘째다.
“엄마 지금은 어디야? 만나고 있어? 언제와?” 등등을 묻곤한다.
“엄마가 조금 더 있어야 될 거 같아. 어떻하지?” 하면 “괜찮아, 그냥 궁금해서 전화 한거야, 편하게 일 보고 와” 라고 한다. 옆에서 전화 내용을 들은 누군가는 “엄마가 더 늦게 들어가면 좋아할 겁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체크하는 거지요” 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상황은 종종 반복된다. 그리고 들은 누군가가 달라도 비슷하게 말한다. 나는 아이에게서 엄마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과 배려가 느껴졌는데, 왜 한결같이 아이의 전화를 그렇게 이야기 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분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슬며시 든다.
그리고 때론 타인이 그렇게 뻔하다는 듯 이야기 할 때 나는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왜 일까?
생각에 잠긴다. 그 이유는....
내가 없어도 될 정도로 성장한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는 반면 나의 필요성이 낮아졌다는, 즉 자녀에게서 나의 존재감이 작아지고 있다는 서운함이 있다.
자녀들이 하는 일에 내가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자녀들과 나와의 거리감으로 느껴지는 불안감이 있다. 자녀도 엄마의 간섭없이 편하게 하고 싶을 수 있다. 나도 그러니까. 가족의 방해 없이 오롯이 나의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에 민감해 지는 나를 직감한다. 공부나 독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몰입 (그 몰입은 미디어, 게임이나 유튜브는 절대 아니였으면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는)을 하는 것이라면 흐뭇할 것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감시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 시선을 아이에게 들켰다는 그래서 전화로 언제오나를 체크하게 만들어버렸을 수도 있다. ‘엄마는 너희를 믿어’가 말뿐이라는 것을 들켜버린 민망함이랄까...
자녀들에게 해야할일과 하고싶은일, 서둘러야 할 일과, 여유 있게 해도 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가 자신은 계획세우는 것이 힘들고 계획을 잘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것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에 이제부터 좀 더 실천을 하고 싶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는 아이가 대견하고 예뻤다. 그리고 그 고백의 힘은 나를 반성하게 만들고, 아이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감시의 시선을 걷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도 알고 있다. 무엇을 해야하고 해야만하는지. 그렇지만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것은 쉽지 않다. 하고 싶은 것은 시기와 환경에 의해 변할 수도 있고, 찾기 위한 긴 여정이 필요하다. 아이에게 그 여정에서 선택지를 열어놓고 하나씩 하나씩 찾아나가며,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거지만 책임은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우와~우리는 자주 응시보다는 감시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얼마전 초등5,6학년 아이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어 이런 질문을 했었는데 <외로움을 느낄 때? 집에 아무도 없고 혼자있을 때 ><자유롭다고 느낄 때? 집에 혼자있을 때> 라고 하더군요. 아이들 마음이 이렇구나..했어요^^
엄마는 언제나 자식에게 이런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글을 읽으면서 들었어요^^
공감합니다. 저 스스로도 하고 싶은 것이 여전히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보면 진로라는 것은 평생 가는 여정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