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형태의 고등학교가 있는 동네에 살고 있는 덕분에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맞닥트리는 고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나름 흥미로웠다. 6~7년 전인가? 등교길의 아이들중 몇명이 건널목을 가로지르며 소리치는 소리에 가끔 깜짝 깜짝 놀라던 시기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동네가 떠나갈 정도의 큰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에 가던 길 멈추고 그 주인공을 더듬던 내 눈길이 휘둥그랬었다. 담임 선생님? 아니면 교장선생님이라도 되나 싶어 급하게 큰 목청의 아이와 그 아이의 인사를 받는 주인공을 찾았다. 나의 시선은 소리친 아이와 같은 또래의 학생이였고, 인사받은 아이는 ‘알았어~’하는 심드렁한 태도로 눈길한번 길게 주지않고 옆친구와 다시 총총하게 등교하고 있었다. 아마도 동아리 선배였던 것 같다. 어떤 동아리인지 모르겠지만 큰소리로 외치며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렇게 한동안 큰소리로 인사하던 모습이 차차 사라지더니, 요즘은 전혀 볼 수가 없다. 그 동아리가 사라졌거나 아니면 군대식에 가까운 절도있는 인사 문화가 사라졌나보다.
예전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동아리 문화중 하나가 졸업하는 선배들에게 후배들이 금반지를 해주는 문화도 있었다. 돈의 액수가 적든 많든 싫어도 내야 하고, 선배가 되면 후배들로부터 똑같이 받을터이니 억울할 것도, 손해볼 것도 아니라 생각했는지 별다른 이견없이 모두들 참여했고, 이런 상황이 학교에 알려져 대책마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학교의 대책에도 아이들은 쉽게 이 문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후배일때 이미 참여해 돈을 지불했는데, 드디어 선배가 되어 그 돈을 회수할 절호의 기회인데 금반지를 포기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너무 억울하다라고 느꼈을것이다.
결국 이런 문화는 모두에게 부담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누구도 그만두기를 하지 못했다.
이것은 군대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군대에서의 선임이 후임에 대해 가하는 폭력은 일상적이였다.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을 하려면 항상 나오는 말은 ‘나는 일병때 엄청 맞았는데, 요즘은 우리때보다 덜해요’ 라는 말이였다. 하긴, 예전 시집 살이도 그랬다. 시집살이를 고되게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자신의 옛시절 어려움을 되새기며, 문화를 바꾸는게 아니라 ‘세상 좋아졌지. 나는 지금보다 엄청 고생했어. 지금 시집살이는 시집 살이도 아니여~’ 라고 이야기 한다.
모두들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이 최고이고, 가혹하고 비합리적인 문화를 없애는데 앞장서기를 주저한다. 자신의 지난 고통을 대물림해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이런 비합리적인 문화는 어떻게 바뀌는가? 그것은 변화를 바라는 한 세대가 온전히 끊어줘야만 비로소 바뀔 수 있다. 불합리한 이런 부분을 내가 단절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악순환은 계속된다. 내 아이를 포함해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좀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좋은 세상을 앞당기려면 먼저 나서서 내 세대에서 끊어주고 버려줘야 할 일들에 함께 힘을 보태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첫댓글 "내가 단절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생각을 바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같아요. 생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영원히 고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