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몇 차례 경험한 전염병이어서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지요.
특정 종교 집단에서 폭발적으로 감염이 증가되기 전까지만요.
그 사태가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보다야 사정은 좀 나아졌겠으나
그마저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감염예방’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나 실은 죽을까 두려워 우리는 마스크에 의지해
얼굴을 가리고 손을 닦아대고 집 안에 꽁꽁 숨어 지냅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참혹함이 뉴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가끔 전염병에 살처분 당하는 동물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살릴 유일한 희망으로 치료제와 백신을 기다리며 몸을 사리고 있지요.
재난이라고 합니다.
맞아요. 재난입니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피해자 코스프레만으로는 재난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디에
원인을 두고 있는 재난인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 재난에 대처하는 선진국의 대처를 지켜보며 무엇을 느끼고 알아챘는지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다 알아버렸으니까요.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체하며 경제적 성공을 최고의 힘이며
미덕으로 인정하며 끌려 가고 있었으니까요.
온 세계 곳곳에 숨어 있는 부조리와 민낯을 똑바로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염병의 종식이 안전한 일상으로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예감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행복’ , ‘감사’, ‘만족’ 등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고해성사와 같이
쉽게 내뱉는
단어들의 감성적 행렬로는 이와 같은 사태를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만이 자연을 다스릴 왕의 존재라는 인식은 허상이며 착각일 뿐입니다.
인간 대 인간만의 협력으로는 막다른 위기를 극복할 수 없어 보입니다.
올해 핀 꽃은 무척이나 달라 보입니다.
예쁘고 가녀리고 기분을 전환시키는 장식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위풍당당한 힘을 내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뽐내던 인간들의 호들갑에 소리 없이
한 방 펀치를 날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꽃은 아픔을 참고 제 할 일 묵묵히 하는 구도자처럼 보입니다.
늘 스스로 그러해야 하는 자연의 숙명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그런 자연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전염병을 통해 협력하자는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물학적 관점의 생명의 논리로는 협력의 요청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가능케하는 근원적 생명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도돌이표를 지날 뿐이지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예고편을 보고서도 말입니다.
자연의 섭리에만 의존해 농사를 지으셨던 할머니들은 봄에 피어난
꽃을 가리켜 “꽃님이 오셨다”며
반기신다 합니다.
우리가 놀이의 대상으로 여기는 꽃에 대한 인식이
우리 보다 훨씬 지혜로우며 근원적입니다
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기에 앞서 우리의 깜냥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기 전에 개발되어 나오는 치료제와 백신은
인간을 어쩌면 더 오만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신문의 그림판은 코로나 수액을 맞고서 정신을 차리는 지구 생태계에게
식물님과 동물님이 “이제 정신이 드냐”는 걱정 섞인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인간은 없습니다.
진짜로 소외 당하기 전에
프로포즈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커튼을 열고 눈만 빼꼼히 창을 통해 꽃님과 눈을 마주합니다.
저를 내치시진 않겠지요?
저를 위로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