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11년 개봉 덴마크 영화 <더 헌트>를 보았다.
이 영화는 한 어린 아이(클라라)의 거짓말로 성 추행범으로 몰린 ‘루카스’란 유치원 교사의 이야기다. 루카스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배려 많은 인간성 바른 유치원 교사로 나온다. 그러나 아동성학대범 의혹 이후로 루카스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친구들과 이웃들에게서 배제되고, 마녀사냥 된다.
유치원 원장의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에서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아이를 양육하다 보면 아이의 거짓말에 마주한다. 그러나 부모들은 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환상을 벗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는 순수하니까 거짓말을 못할 거라고 정말 믿는 것인지, 겨우 저렇게 작은 아이의 거짓말에 내가 속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내가 아이를 잘못 양육하고 있다는 말로 해석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거짓말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아이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자주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고, 다만 어른이 되고 나면 거짓말 뒤에 따라오는 결과에 대한 책임 때문에 거짓말을 조절해서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거짓말을 조금씩 하고 산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거짓말에 대해 관대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대방의 모든 거짓말을 내가 알아차릴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을 모두 내가 알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참과 거짓을 가리는 일에 몰두해서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전에 사건의 맥락을 먼저 파악하는 신중함을 더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에는 판단을 금방 내릴 수 있는 일보다 판단 보류하고 천천히 면밀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할 문제들이 더 많다. 내가 내린 판결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아이에 대한 환상의 다른 하나, ‘어린 아이니까 너는 몰라도 돼!’ 또는 ‘어린 너는 잘 모르니까 어른들이 해결해 줄게, 가만히 있어.’라는 어른들의 행동방식이다.
클라라가 몇 번이나 자신의 거짓말을 수정하려고 이야기를 꺼내지만 어른들은 결론을 내려놓고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니 듣지 않고 중간에 끊어버린다. 넌 어리니까 아직 몰라도 된다고 나약한 어린양 대한 듯이 보호하려고 한다. 그런 보호의 행동이 클라라를 보호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클라라가 자신의 거짓말이 불러온 파장을 모르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클라라는 진짜 몰랐을까? 유치원에서 더 이상 좋아하고 따르던 유치원 교사 루카스를 볼 수 없는 상황이나, 루카스를 대하는 갑자기 바뀐 아빠의 태도라든가, 슈퍼에서 마주친 루카스의 초췌한 몰골을 보면서 상황이 왜 그렇게 뒤엉켜 버렸는지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거짓말이 불러온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루카스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자신이라는 점에 더 자책하고 클라라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클라라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행동은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무지한 어린양이라고 무시하는 처사이다.
클라라가 실재로 성추행을 당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너는 아직 어리니까 모를 거야.’라는 태도는 피해를 키운다. 아직 어리지만 클라라는 계속 생각할 것이다. 내가 왜 피해자인지, 그것이 피해인지, 갑자기 바꿔버린 상황이 내 잘못이 아닌지... 아이는 계속 궁금해 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잘 다독거려 피해를 회복시켜줄 어른이 필요하다.
영화에서처럼 성추행이 클라라의 거짓말이었더라도 클라라는 이야기하면서 거짓말을 바로 잡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이는 작은 세계이다, ‘작은’이라는 이 수식어도 어쩌면 나의 환상일수도 있다.
어리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질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세상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자라서 어른이 된다.
사건의 진실을 아는 관객은 루카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울화통이 터질 듯 답답해하며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루카스의 이웃이라면 루카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입장에 섰을까?
우리는 소통에 미숙하다.
끈기 있게 들어주고 내 이야기를 전달하고 다시 상대의 이야기 들어주기를 반복하여야 한다. 영화에서처럼 루카스의 이야기를, 클라라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으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사냥터의 사냥감 대하듯 의혹을 제기하고 의심하고, 실망하였다고 분노를 쏟아 내고 마녀사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아야 한다.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내가 갖고 있는 환상, 편견은 없는지 보아야 한다. 결론을 결정지어 놓고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소통으로 갈 수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우리가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는, 루카스의 무죄가 밝혀진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루카스를 겨눈 총알이 되어 낙인을 새긴다
-양지아래 툇마루-
첫댓글 코로나로 인해 타인에 대한 혐오와 낙인이 점점 심해질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 사람이 처한 맥락은 제거되고 그저 감염원으로만 보게 되니까요. 기꺼이 소통할 수 있는 내 에너지는 어느 정도일까도 정직하게 생각해 봅니다.
저도 여러번 보았던 영화입니다. 맥락을 볼 수 있는 아니 맥락을 살펴야 하는 요즘이란 생각에 더 이글을 읽고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