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의 세계적인 유행으로 출근이 무기한 미뤄지고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뉴스만 온 종일 보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구 신천지 교회의 집단 코로나 발병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자제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 시간들... 지금은 상황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우리 모두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동거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나는 솔직히 타인들과 사회적 거리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도 동시에 유지하고 있다. 내가 사는 11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차가 있는 지하주차장까지 한 번에 내려가는 때는 뭔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중간에 어떤 층에 서서 모르는 이웃이 타면 그때부터 신경이 많이 쓰인다. 하필 그 사람이 마스크도 쓰지 않으면 그 불안은 점점 더 커져서 지금이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버리는게 좋을지 계속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옮기는 숙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요즘 타인과의 접촉이 무섭고 싫다.
이런 시대상황에 맞추어 개봉한 영화가 <살아있다>다. 영화 <완득이>에서 잘생긴 고등학생 역으로 내 눈에 들어온 유아인이 주인공이라 끌렸고, 좀비 영화라고 해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딸과의 데이트 영화로 골랐다. 영화의 내용은, 한국에 이상한 바이러스가 퍼져서 대부분의 시민들이 좀비가 되어 서로를 물어 뜯고 죽이는 바이러스 재난 영화다. 주인공인 유아인과 박신혜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 고립되어 이 좀비들이 득실대는 와중에 서로 의지하며 결국은 구출이 되는 조금은 뻔한 이야기이다. <엑시트>라는 영화와 <부산행>의 장면들이 중간 중간 보이고, <마션>의 멧데이먼의 생존기와도 참 비슷하다. 한마디로 <살아있다>는 기존 영화가 짬뽕된 흥행 실패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내게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지금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들을 소개한다.
1. 한 사람이라도 나를 응원하는 이가 있다는 것 = 삶의 원동력
고립된 생활이 길어지고 좀비들의 위협에서 살아남는 것이 고통스러워지자 유아인은 목을 메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 창문 밖에서 쏜 레이저 빛은 유아인에게 ‘바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유아인은 앞 건물에 고립된 박신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때부터 둘은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누군가 나를 응원하고,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세상살이의 힘이 되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작년에 이직을 하게 되었을 때 스트레스가 많이 있었다. 다행히 함께 그 과정을 겪은 동료들이 있어서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 의지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삶의 축복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몇 번 바닥을 친 순간이 있었다. 그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 아팠던 시간에 내가 의지하고 매달렸던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손잡아 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다. 참 고맙고 감사하다.
2. 먹는 것 = 기본 중의 기본
갑작스런 위기 상황으로 집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가장 난감한 것이 먹는 것이었다. 집에 있는 음식으로 버티고 버티다 너무 배고프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유아인의 연기가 진짜 볼만했다. 라면이랑 맥주를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그렇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보니 유아인은 좀비가 득실거리는 복도를 지나 빈 집에 들어가 냉장고 속에서 음식을 훔쳐서 먹는다. 먹고자 하는 욕구는 죽음의 공포도 이겨낼 만큼 강력하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마트에서 먹을 걸 훔치다 걸린 가난한 아버지 사연, 또 갓난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훔치던 어머니 사건도 먹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비굴하지만 참고 견디며 사회생활을 하는 이유도 다 먹고자 하는 것 아닐까? 영어 표현에 bread winner라는 말이 있다. 생계를 책임지고 생활비를 벌어오는 사람이란 뜻이다. bring home the bacon도 마찬가지로 생계를 책임진다는 의미다. 사는 것은 결국 먹는 것이다. 잘 먹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요즘 나는 집에 음식을 충분히 비축해둔다. 혹시 모를 재난이 터지면 우리 다섯 식구가 오래 버틸 수 있도록...
3. 식물 = 힐링
고립이 되면 제일 필요한 것이 물이다. 박신혜가 물을 아끼고 아껴서 마시다가 옆에 있는 산세베리아에 자신이 먹으려고 남겨둔 물을 다 따라주는 장면이 있다. 식물은 말도 없고 어떤 동작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존재만으로 위로와 평화를 선물해준다. 내 집에서 잘 크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치료가 되는 때가 있다. 올 초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여러 화분을 집안에 들였다. 매일 매일 이 나무와 화초들의 상태를 살피며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도 날리고 감사한 마음, 소박한 마음을 갖게 된다. 화초는 삶에 평온을 주는 치료약이다.
이 영화의 평점은 낮다. 나는 나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잘 봤는데... 요 몇일 박원순 시장의 자살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우울해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중에도 지인이 자살을 해서 지금도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제목처럼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큰 죄를 지었더라도, 내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아픔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죽기보다는 살아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잘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는 아프고 힘든 시간이 있지만 주저앉지 않고 가끔씩 내게 찾아오는 삶의 재미와 행복을 놓치지 않는 것 같다. 또 내 주변에서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맛있는 밥 먹으며 묵묵히 나의 자리에 서 있는 것 아닐까?
첫댓글 한 명이라도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 그 한 사람...
완성도가 낮은 영화는 몰입 자체가 힘든데, 이런 생각할 거리를 찾아내시다니, 놀랍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