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제일 힘든 시간이 있다. 저녁을 먹고 아이가 태권도를 가기 전까지의 시간이다. 아이가 저녁 먹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먹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태권도복을 입다가 리코더가 보이면 리코더를 한참 불고 있거나, 양치하러 욕실에 들어가서 물장난을 치며 나오지 않는다. 나는 빨리 태권도장에 가서 놀면 좋겠는데, 아이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나갈 생각을 안 할 때가 자주 있다.
그걸 지켜보는 게 답답해서 방에 들어가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재미있게 보던 터라 베토벤 '월광'소나타를 치기 시작했다. 내 실력에 어려운 곡이지만, 소박한 한두 음절로도 위로가 되었다. 처음에 두 줄, 그다음에 네 줄, 그렇게 조금씩 늘려가며 피아노를 쳤다. 드디어 1악장을 끝까지 치는 날이 왔다. 1악장 마지막 건반을 누르며 놀랐다. 되는구나. 하루에 15분 정도 쳤는데, 이렇게 실력이 느는구나.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것이 가진 힘을 실감했다.
처음에는 꾸물대는 아이를 지켜보는 게 힘들어 피아노 방으로 도망쳤는데, 이제는 피아노 치는 시간 자체가 좋아졌다. 피아노 치는 시간이 늘어나자, 딸은 피아노 그만 치고 자기랑 이야기 좀 하자고 한다. 남편은 그렇게 좋으면 레슨을 받으라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먼저 학원을 등록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내가 베짱이 같아서 그랬다. 아이를 챙길 시간에 돈벌이와 전혀 상관없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내가 베짱이로구나. 가족들은 그런 나를 비웃진 않지만, 베짱이를 비웃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돈까지 들여서 피아노를 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당분간은 피아노를 계속 칠 테다. 나를 잘 돌보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의 행복한 몰입을 보며 아이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갈 거라고 믿는다. 아이를 세심하게 챙기는 엄마도 좋은 엄마이지만, 아이에게 조금은 무심하지만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엄마도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에게 왜 헌신하지 못하는가. 아이 공부보다 내 공부가 왜 더 급한가. 이런 내가 엄마로서 부족한 걸까. 자책하지 말자. 적당한 엄마도 괜찮은 엄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 같은 베짱이 엄마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행복한 것에 몰두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말자고. 아이가 나를 위해 뭔가를 잘 해내서 소중한 것이 아니듯 엄마도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고. 우리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새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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