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5일 조선일보기사)
제자 손바닥에 손톱으로 마지막 시를 쓰고 떠나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 마지막으로 쓰고 가신 작품 -
시인은 의식이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썼다. 지난 2일 폐질환으로 타계한 오규원 시인(1941~2007)이 병상에서 제목이 없는 4행시 한 편을 남겼다. 오 시인이 가르쳤던 서울예대 문창과 출신 문인들은 4일 “지난 1월21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던 선생님이 손톱으로 마지막 시를 쓰셨다”고 전했다.
당시 의식을 잃기 직전 상태였던 오 시인은 간병 중이던 제자 시인 이원씨의 손바닥을 찾았다. 그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손톱으로 제자의 손바닥에 시를 한 자 한 자 새겼다. “선생님은 처음 3행을 썼다가 한참 시간을 들인 뒤 마지막 한 행을 썼다”고 제자는 전했다. 스승의 빈소에 모인 제자들은 “마지막 시구는 2연의 첫 행일지도 모르지만, 4행을 한 편의 시로 편집하자”고 뜻을 모았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고 쓴 시인의 장례식은 5일 오후 2시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진행된다. 제자인 이창기 시인은 “선생님께서 의식을 잃기 전까지 유골을 화장해달라고만 말씀하셨는데, 수목장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유족들이 결정한 것”이라며 “선생님의 시가 마치 사후의 일까지 내다보신 것 같다”고 말했다.
오규원 시인은 한국 시단에서 언어 탐구의 거목이었다. 초기시에서부터 ‘추상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언어’(시 ‘몇 개의 현상’ 부분)를 탐구했던 그는 결국 나무 아래에 묻혀 영면을 취한다. 그는 ‘사랑의 기교’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등의 시집과 ‘현실과 극기’ 등의 시론집을 통해 시적 언어의 투명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독특한 시세계를 일궜다. 또한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1982~2002)를 지내면서 수많은 제자 문인들을 키웠다. 80년대 이후 시단에 진출한 양선희 박형준 윤희상 장석남 함민복 이병률씨 등 젊은 시인들을 지도했을 뿐 아니라 소설가 신경숙 하성란 조경란 강인숙 천운영씨 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규원 시인은 말년에 만성폐쇄성폐질환이란 희귀병을 앓으면서 큰 고통을 겪었다. 반딧불이가 살 정도로 공기가 맑은 경기도 양평의 전원주택에 칩거하던 그는 지난 2005년 9번째이자 마지막 개인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를 펴내면서 ‘날(生) 이미지 시’를 제창했다. “존재의 현상 그 자체를 언어화하자는 것”이라고 ‘날 이미지 시’론을 설명했던 그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 오규원 선생님의 시 세편은 소개한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 시인 오규원
비상하는 새의 꿈은
날개 속에만 있지 않다 새의 꿈은
그 작디작은 두 다리 사이에도 있다
날기전에 부드럽게 굽혔다 펴는
두 다리의 운동 속에도 그렇고
하늘을 응시하는 두 눈 속에도 있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우리의 몸 속에 숨어서 비상을
욕망하는 날개와 다리와 눈을 보라
언제나 미래를 향해 그것들을 반짝인다
모든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잎이나 꽃의 힘에만 있지 않다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막막한 허공에 길을 열고
그곳에서 꽃을 키우고 잎을 견디는
빛나지 않는 줄기와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깜깜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숨어서 일하는 혈관과 뼈를 보라
우리의 새로움은 거기에서 나온다
길이 아름다운 것은
미지를 향해 뻗고 있기 때문이듯
달리는 말이 아름다운 것은
힘찬 네 다리로
길의 꿈을 경쾌하게 찍어내기 때문이듯
새해가 아름다운 것은 그리고
우리들의 꿈이 아름다운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비상하는 날개와 다리와 눈과
하늘로 뻗는 줄기와 가지가
그곳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순례 序」 부분, 2 ; 11-12)
<한 잎의 여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