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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리내마을 시동인 원문보기 글쓴이: 별 밭
문학기행
시인 오장환과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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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悲哀)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찢긴 청춘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아직도 역두에 남은 사람은 누굴 기둘려
나는 여기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펄쳐져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좁은 시간적 공간에는 계절의 짧은 순간이 서성인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라고 시작하는 오장환시인의 시
이런 시를 읽으며 비애에 젖을 줄 하는 사람은 낙엽이 지는 숲길의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이런 계절에 작가의 고향을 찾아 길섶을 거닐며 시 한 줄을 읽고 음미하는 일은 삶의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간혹 외할머님과 외삼촌도 없는 잊혀진 외갓집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잊혀진 세월만큼 켜켜히 쌓인 어떤 그리움이 있어야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어머니의 모성적인 그리움의 갈구 때문이리라. 모태적인 근원의 그리움이 가슴에서 일렁이면 배낭을 챙기고 내 국토의 지도를 바라보는 일은 숭고하다. 이 땅의 어디 한 곳이고 사람의 인연의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있으랴. 잊혀진 외갓집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정분과 그리움을 되새김질하는 카타르시스다.
문학이라는 것도 어차피 현실에 토양을 가지고 잉태되는 산물이라고 할 때 작가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외갓집을 찾아 가는 여정과 비교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뿌리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마을을 찾아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이 땅에는 많은 마을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곳이 한 때 우리들의 문학과 역사적인 인물로 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나고 자란 마을이라고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을단풍이 백두대간을 타고 설악산과 소백산을 타고 내려오면 속리산 언저리는 몸살을 앓기 시작하고 어디쯤에서 겨울이 스멀거리면서 다가온다.
이런 때 해방정국에서 ‘병든 서울’을 노래한 시인 오장환의 생가를 찾아 가는 길은 스산하며 멋지다. 그는 가난 하지만 멋쟁이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맛깔이 비록 서정주에게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외모와 정직한 시적발상의 용기있는 시어는 오히려 한때 친구였던 미당을 능가한다. 그러나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대접받지 못하고 시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최근에 다시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 오장환(1918~ 1951)
오장환(1918~ 1951)은 충북 보은군 회인읍(현 회북면 중앙리)에서 태어났다. 안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중학을 다녔다. 휘문중학교에서 정지용시인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의 일치였던가. 그는 정지용선생의 제자였다. 훗날 정지용 선생이 납북되었다거나 월북하였다는 이야기들이 나올 때 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설왕설래를 낳았다. 정지용선생의 고향이 바로 옆 동네 옥천이래서 더욱 그랬다.
오장환선생은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이후 1937년부터-1947년 까지 「성벽」 「헌사」 「병든서울」 「나 사는 곳」등 4권의 시집을 냈다. 당시의 궁벽한 살림살이와 어려운 문학적인 토양아래서 10년 동안에 시집을 4권이나 발행하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시에 관한 갈망과 집착이 강렬하지 않았다면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이 작업이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의 시집을 가지고 단순하게 시의 경향을 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제1집「성벽」, 제2집 「헌사」는 비애와 퇴행적인 소산물이 많고 제3시집 「나사는 곳」은, 서정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서평이다. 해방 후 발행된 「병든서울」은 계급적 이념과 사상이 주된 주제의 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해방 전 미당서정주와 시인부락의 동인활동을 한 단짝이기도 하였고 자오선의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친화력이 있는 선이 굵고 활달한 성격의 미남형 시인이었다고 전한다.
8,15광복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맹활약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그는 신장결핵을 고치기 위해 1947년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 쓴 시를 모아 1950년 5월 ‘붉은기’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기도 하였다. 아직 필자도 이 시집을 접할 기회가 없어 읽지도 못했지만 이 시는 그의 5번째 시집이 된다. 한국전쟁 중에 ‘붉은기’라는 시집을 가지고 오장환시인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도 전한다.
필자가 몇 년 전에 고서연구회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인사동에 있는 고서점 통문관의 주인 이겸로옹이 “<청구영언>을 오장환시인의 부인한테 구입하였지만 그가 통일되어 내려오면 다시 되돌려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는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 하였거나, 이후 남로당 숙청 때인 1953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할 뿐 사망에 확실한 단서는 없는 실정이다. 그가 지금껏 생존해 있다면 86세가 된다. ‘청구영언’은 우리나라 시조 1천여 수와 가사 7편을 영조때 김천택이 엮은 국보급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오장환시인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가 월북하고는 부인이 그를 기다리면서 보고 싶으면, 청구영언을 안고 우는 것이 못마땅하여 친정아버지가 통문관을 찾아가서 팔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겸로옹은 월북한 오장환 시인이 통일이 되어 만나면 다시 돌려주려고 하지 않는가. 아름다운 이야기다.
범우사가 발행하는 「책과인생」에서 오장환의 미발표 장시 「황무지」가 발굴공개 되기도 하였다.
문학평론가 임헌영교수는 “원고지에 또박또박 쓴 ‘황무지’는 몇 년 전 발굴 된 장시 ‘전쟁’과 글씨체가 같은 것으로 오장환이 등단전후의 습작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면서 두 작품 가운데 「전쟁」은 몇몇 행을 삭제당하면서도 검열을 통과했으나 책으로 출간되지 않았고 「황무지」는 제목부터 불순한 것이어서 아예 검열조차 받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원본은 범우사의 윤형두사장이 10년 전 고서적상에게서 구입했다가 친필 여부 등을 확인한 끝에 공개되기도 했다.
그의 고향마을을 찾아가는 것은 우리들이 꼭 잊혀진 자신의 외갓집을 찾아 떠나는 듯 더듬거리게 만든다. 빈집이 되어 버린 외갓집의 울안에서 서성여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정든 사람이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 살다가 떠나간 장소는,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어 찾아가도 애틋하게 가슴을 저미게 하는지 알게 된다. 형체가 없어도 산과 들 하늘이 어울려 가슴속 사람을 기억나게 하지 않는가. 세상 떠난 작가의 허물어진 집 문설주에 기대어 동네 사람들에게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이 원망스럽다가 작가의 유년의 애절한 사연들이 가슴에 속삭이는 소리로 다가온다. 세상이 원망스럽다가 이내 아름다워 지는 것은 이런 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만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정국의 칼바람 속에서 혁명을 이야기하다가 끝내 월북하여 종적을 감춘사람, 그의 고향마을,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를 찾아 가는 길은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 교차한다. 과연 그의 생가를 찾아가서 유년의 한때의 생활상을 느껴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도 한다.
문학기행을 다니다 보면 작가가 그렇게도 갈구하던 이념과 낭만과 사랑조차 허망하게 무너지는 생가와 함께 사위어가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처참하게 일그러진 작가의 망가진 현실에서 작가가 남긴 작품만은 살아서 세월을 뛰어넘어 꿈틀거린다. 다시 살아나는 작가의 얼굴은 청춘이다.
오장환시인이 그렇다.
그의 미남형의 얼굴이 살아온다. 작가의 젊은 시절의 빛바랜 흑백사진은 그대로 생가에 머무른다.
과거에 월북작가의 고향마을을 찾아 가는 기행은 항상 긴장하게 된다. 이유는 동네사람들이 경계하는 것 때문이다. 지금은 그 상황이 많이 바뀌어 이제는 답사 안내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10년전 까지만 해도 수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념이 퇴색하면서 이념에 의해 작가의 글이 사라진 부분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이야기가 되었다.
보은출신의 오장환시인도 이미 1996년부터 선생의 문학적인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문학제가 매년 5월에 보은문화원, 보은문학회, 충북민예총 주관으로 펼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생일이 5월15일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5월에 개최되는 이 문학제 기간중에 보은의 생가를 기행하는 것은 잊혀진 외갓집을 찾아가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게 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판교인터체인지에서 오장환시인의 고향 회북까지는 승용차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월이 아닌 가을과 겨울사이에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함께 떠나는 문학기행팀을 위해 버스 속에서 그의 시 ‘고향 앞에서’를 읽는다.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 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린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히 잔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하면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귀향회귀(歸鄕回歸)가 모티브인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
시인은 어린 나이에 고향마을을 떠나 피반령을 넘으면서 언제 다시 자신의 고향 회인을 다시 올수 있을까 하는 절망이 있었을 것이다. 고향은 있으나 그 따듯한 품에 안길 수 없는 사람은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슬픈 고향소식을 듣는다. 과거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되어 버린 그는 피반령 고갯마루에서 고향을 쳐다볼 뿐이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고향집에 돌아갈 수 없음을 오장환시인은 이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떠돌이 장꾼들에게 고향의 정취만이라도 확인하려는 시인의 각별한 고향의 그리움이 눈물겹다.
이런 연유로 인해 그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길에 이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백두대간에서 소백산맥을 달려온 11월의 바람이 떠나갈 채비를 하면 속리산 이곳저곳은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는다. 보은은 아름다운 마을의 집합이다. 소백산맥이 남녁으로 가면서 만들어 낸 마을답게 산과 들이 속살을 보일 듯 말 듯 감질나게 욕망을 자극하는 여인같다.
생가를 함께 기행하기 위해 버스에 탄 김정란 교수는 내게 “오장환선생을 생각하면 가을바람처럼 고독해 지다가 선생님의 시 ‘병든 서울’을 읽으면 힘이 솟아요”라고 한다.
오장환시인의 충북 보은읍 중앙리는 가깝고도 먼 마을이다. 서울에서 청주 인터체인지를 나와 보은읍으로 가는 25번 국도에 접해 있다. 그러나 그곳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연결되는 피반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갈 수 있는 산협에 위치하고 있다. 보은군지에 따르면 보은의 인구는 현재 4만6천명이다. 적은 인구다. 그러나 골골에 마을이 있고, 아직도 인심이 좋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찾아온 길손들을 귀하게 여긴다. 동쪽으로는 소백산맥 휘돌아 내려가고 산맥 너머에 있는 경북 상주와 맞닿아 있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청원군, 남쪽으로는 옥천군과 인접한 곳에 위치한다.
보은의 자랑은 뭐니 뭐니 해도 속세를 떠난다는 속리산(俗離山)이다.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군과 경계를 이룰 정도로 큰 산이다. 속리산에는 법주사라는 신라 553년(진흥왕14년)에 창건된 사찰이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 말티재(800M)를 넘는 일은 조금은 두렵고 고향 가는 길만큼 지루하고 답답하다. 여정 길에 만나는 정이품송의 소나무는 600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 있다. 보은의 이런 저런 전설같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장환선생의 생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인근 옥천에 있는 정지용선생의 생가를 답사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혹 번듯한 생가가 기다릴지 모른다는 기대를 할지 몰라 아예 나는 실망스런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 찾아가는 보은의 오장환생가는 폐가로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살다가 떠나간 집은 유령이 나올 듯한 흉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천석이상을 하는 부자였지만 그는 서러운 서자였습니다. 우리는 생가에 가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작가의 대우가 얼마나 사납고 억울한 모습을 하고 있나를 보면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의 생가주변에는 감나무가 많아서 지금쯤 잎새는 다 떨어지고 인심좋은 동네사람들이 남겨 놓은 까치감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들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오장환생가로 향하는 일행의 마음은 서서히 긴장한다.
과연 그의 고향 마을과 생가는 제대로 존재하고 있는가? 월북 작가를 찾아온 사람들이라고 하여 동네사람들이 수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첫 답사 때 회북면장 박노영씨의 따듯한 인상과 길라잡이를 해 주던 면직원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일행을 안심시킨다. 필자가 첫 답사때 오장환시인 생가를 찾기 위해 청주에서 보은을 잇는 피반령(361M)의 험준한 산길 20리를 달리는 산길은 눈발 날리고 난 오후였다. 험준한 고개를 넘어서 온 길손을 그들은 처음에 이해 못했지만 취재를 왔다고 하니 반갑게 생가로 안내하였다.
피반령고개를 넘으면서 나는 다시 청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그 만큼 이 고개는 내게 눈길에는 넘을 수 없다는 어떤 불가능을 설정해 두고 있었다. 지난날 모두가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려면 의무적으로 이 고개를 넘어야 했지만 지금은 미원방향으로 새로 길이 나서 오장환선생의 고향 회북면은 산속에 묻힌 마을이 되어 버렸다. 회북으로 가려면 가덕면을 지나 이 피반령을 넘어야 한다. 경부선 옥천 인터체인지에서 찾아가려면 대청호를 따라 회남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를 따라 계속달리다 보면 회북면 소재지가 나온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안에 포근하게 감싸인 마을이 오장환시인의 고향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다. 그의 시 <산협의 노래>가 연상되어 지는 마을이다.
전형적인 소읍(小邑)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동네에 우리 문학기행팀이 전세버스에서 내리자 주민들은 어리둥절 한다. 좁은 골목길로 약 150M지점에 위치한 오장환시인의 생가는 퇴락하여 곧 무너질 것 같다. 텃밭에는 서리에 죽은 배추잎들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었고 쓰레트 지붕에는 가난이 꺼멓게 묻어 있다. 철대문의 매달린 우체함에는 철지난 우편물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 틀림없다.
오장환시인의 생가를 돌아보면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작가의 초라하고 슬픈 모습에 다시 가슴이 아리다. 생가표지석도 생가에 세우지 못하고 20M앞 다른 사람의 집 앞에 서있다.
다만 생가 뒷산에 서 있는 늙은 감나무들만이 까치감을 몇 알씩 달고 인정 많던 마을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듯 하다. 오장환시인은 대처를 떠돌면서도 회북면 중앙리의 옛 이름인 ‘회인’의 이 집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고향에 다시 올 수 없게 만들었으며 고향도 그를 잊었다.
그러나 최근에 조명되고 있는 시인의 문학적인 업적들로 인해 이 산촌마을은 문학의 고향으로 거듭나기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 생가의 골목길을 걸어내려 오면서 누군가 말했다.
“오장환시인도 유년시절에 이 길을 걸었겠지 ...” 생가를 떠나 피반령을 넘는데 해가 지고 있다.
버스의 창밖에 보이는 저녁놀이 황홀하다.
이런 배경을 무대삼아 나는 오장환시인의 시 「산협(山峽)의 노래」를 낭송했다.
이 추운 겨울 이리떼는 어디로 몰려다니랴.
첩첩이 눈 쌓인 골짜기에
재목을 싣고 가는 화물차에 철로가 있고
언덕 위 파수막에는
눈 어둔 역원이 저녁마다 램프의 심지를 갈고.
포근히 눈은 날리어
포근히 눈은 내리고 쌓이어
날마다 침울해지는 수림의 어둠속에서
이리떼를 근심하는 나의 고적은 어디로 가랴
눈보라 휘날리는 벌판에
통나무 장작불 벌겋게 지피나
아 일찍이 지난날의 사랑만은 따스하지 아니하도다.
배낭에는 한 줌의 보리 이삭
쓸쓸한 마음만이 오로지 추억의 이슬을 받아 마시나
눈부시게 훤한 산등을 내려다보며
홀로이 돌아올 날의 기꺼움을 몸가졌노라
눈 속에 싸인 골짜기
사람 모를 바위틈에 맑은 샘이 솟아나고
아늑한 응달녘에 눈을 헤치면
그 속에 고요히 잠자는 토끼와 병든 사슴이.
한겨울 내린 눈은
높은 벌에 쌓여
나의 꿈이여! 온 산으로 벋어 나가고
어디쯤 나직한 개울 밑으로
훈훈한 동이가 하나
온 겨울, 아니 온 사철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
한동안 그리움 속에
고운 흙 한 줌
내 마음에는 보리이삭이 솟아났노라.
가난하고 외로운 산속마을의 겨울나기를 따스한 사람으로 표현한 작가의 마음을 읽는다.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따스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장환시인은 일제말기에 붓을 꺽지 않으면서도 친일하지 않은 작가다. 이런 이면에는 겨울 뒤에는 반드시 봄이 오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의 역사성과 사상성이 묻어 있는 작품들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간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그의 대표시 <병든 서울>에 집약되어 있다. 해방정국의 감동과 감격을 나타내면서 한편으로 울분과 분노의 선동적인 리듬감을 가지고 있는 이 시를 읽다보면 해방전후사를 인식하게 한다.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그의 고향마을이 버스 뒤편으로 멀어지고 있다. 마을,산, 들을 지나 개울을 건너 버스는 달린다. 초라한 생가의 모습을 담아 떠나는 버스 속에는 시인의 시어들이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 하다. 저녁놀이 지고 어둠이 내리로 있다.
버스는 어느새 청주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경부고속도로 진입하고 있다.
누군가 비상한 언어로 버스속의 침묵을 깬다 “병든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순간 나는 급하게 시집을 펴서 <병든 서울>의 첫 연을 나직하게 읽었다.
“8월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이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글 | 김경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