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 麗 匡 正 大 夫 門 下 評 理
行 工 曹 典 書 朝 鮮 諡 忠 簡
南 原 尹 公 諱 璜 之 墓
貞 夫 人 新 平 李 氏 祔 左
[음기 비석문은 회장(원호)이 지었으며 비석에는 표시하지 않았음]
公의 諱는 璜(황)이고 南原 尹氏 始祖 諱 威의 五代孫으로 祖考는 禮曹典書를 지낸 諱 英贊이며 考는 正二品 門下評理에 추봉된 諱 守均이고 妣의 姓名이나 公의 生卒年代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松谷祠 기록에 의하면 太祖 이성계와는 어릴 때 친구였다고 한다. 北方領土를 개척했던 윤관 장군의 長曾孫이 남원 시조이니 名門世家에 태어나 學問에 힘써 공조전서를 지냈고 광정대부 문하평리 이르렀으나 王朝가 바뀌자 조선조의 臣下되기를 거부하고 後松이라 自號하고 松岳에 은거하셨다.
太宗이 집에 찾아와 후한 대우로 出仕를 권했으나 길게 揖(읍)할뿐 절을 하지 않고 거절하였고 당진으로 내려와 他界하니 임금이 葬地를 마련해주고 지관을 보내 돌보아 주어 이곳에 安葬했으나 明堂이라 알려지고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발길이 뜸해지니 타인들이 암투장하여 墓域이 훼손된 것을 一六 0七年 충청 관찰사로 부임한 七대손 휘 暾공이 심묘 정비하고 位土를 마련했고 七년 뒤 역시 같은 충청 관찰사로 부임한 九대손 휘 孝全공이 增修한 후 묘역을 계속 가꿔오면서 時享을 지내 오고 있다. 우리 尹門에서 遺體가 묻힌 가장 오래된 묘소로 우리 종중의 聖地이다. 부인은 新平人 해주지사 李光弼공의 따님으로 슬하에 四男 二女를 두었는데 장남 휘 德生공은 正三品 書觀雲判事에 올랐고, 一三七九年 出生한 차남 휘 禮生공은 조선조에 들어와 문과급제 후 吏曹參議 大司成 都承旨 등을 역임했으며, 삼남 휘 奎공은 江東縣令과 判事, 사남 휘 臨공은 咸吉道 관찰사와 從二品 同知摠制 등을 지내셨다. 序一 따님은 扶安人 해주목사 金光信공에게 출가했고 둘째 따님은 衿川人 檢校 姜 揚공에게 출가했다. 나라에 忠誠하고 學問으로 이름을 떨친 많은 子孫들이 있으나 다른 碑石에 상세한 기록이 있어 줄인다. 一七九七年 정조대왕 때 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節槪를 지킨 忠臣으로 서산 인지면 애정리에 있는 松谷書院에 配享되면서 당시 후손들이 位土를 마련해서 헌납하여 매년 음 二 • 八月 終丁日에 祭享을 올리게 되었고 一七九九年 충간공이란 시호를 받으셨다.
(一九八一年 京鎬 前 會長 周旋 建立 碑石은 埋立 保存)
二 0 一 二年 春 忠簡公派 宗中 建立
<추가 설명>
1. 본문 중 부인은 해주지사 --李堯弼--은 李光弼이 맞는 것이므로 비석본문은 그대로 두고 맨 뒤에 x 堯 0 光이라 표시하였음.
2. 남원윤씨대동보 2000년판 문헌록 168page 고려전서 충간공 후송 윤선생 신도비명의 글을 1981년 비석을 만들어 세웠음. 내용을 확인하시기 바람.
3. 1981년 세운 구비석을 바꾼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알려주어도 관심없이 듣거나 잊어버리고 헛 소리하는 사람이 있어 첨기한다. 전 회장인 본인이( 원호) 글을 지었기 때문임.
<이유>
1. 구비석 둘째줄에 ---本朝贈諡忠簡이라 한 것은 조선조 때 비문을 지었거나 비석을 세웠다면 이 조정(本朝)이라는 말이 맞지만 비문은 1934년 즉 日帝 때 지은 것이고 세운 것은 1981년 대한민국 건국 후이니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 할 것이다. 조선조라고 해야한다.
2. 구비석 세째줄에 貞敬夫人은 정1품 외명부로 충간공이 정2품 匡靖大夫로 표시된 상태에서
격을 맞추지 않았다. 유림들이 방문하여 잘 못을 지적하였다. 정경부인 교지가 없다.
3. 글쓴 사람이 永樂五甲戌正陽下瀚 이라 했는데 명나라 연호 영락은 1424년 끝났고 5 갑술은 1694년 이므로 충간공 시호를 받기 전이니 잘 못이고, 永曆(명나라 마지막 황제 연호) 5갑술은 1934년이니 시대로 모아 맞는다. 따라서 영력의 오기이다.
4. 글쓴 사람이 小華流民이라 표기했는데 소화는 작은 중국이란 표현으로 주체성을 너무 잃은 표현이며 유민이란 뜻은 나라 잃은 백성이란 뜻이다. 소화인이라고 자처한 당시 한학자의 표현을 대한민국이 들어서서 비석에 표기하여 오래 둘 것은 아니다.
5. 조상의 행적을 밝히고 찬양한 신도비명은 족보(2000년 대동보 1권 168쪽)에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6. 2001년 송악재 정비 작업 때 미쳐 손 보지 못한 것을 고쳐 놓았다.
--모르면 물어보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조상의 행적을 더 연구하여 후손들이 본 받아 우리 사회가 더 골고루 잘 살고 타 민족에게 지배 받거나 2류 민족으로 밀려서는 않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자. 종중에 돈 만 바라고 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 입에 "종중 돈은 못 먹는 사람이 바보" 라는 말이 떠돌아 왔다. 그들을 감시해야 한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