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 효행의 유적지
영 사 정
〄 조선왕조실록 : 숙종 7년(1681) 정해 2월 3일 〄
<국역 요지>
『김포 윤씨 분산(墳山)에
임란왜란에 사절(死節)한 윤 섬(暹),
병자호란에 사절한 윤 계(棨)와 윤 집(集),
효행으로 장령(掌令)에 추증된 윤 유(柔),
강직하기 때문에 간신에게 희생된 윤 결(潔) 등
충성(忠誠)·절개(節槪)·행실(行實)·의리(義理)의 5인 묘소에
수호인 두고 영구히 수호하라고 임금이 하명 하였다.』
영사정(永思亭)
정조 임금이 김포 장릉으로 행차 할 때『저 멀리 경치 좋은 곳에 있는 묘소가 누구의 묘인가』라고 묻자,
『남원 윤씨 판관공 은의 산소입니다』라고 하니 경치가 아름다워 영원히 생각이 나겠다』
고 하며 「영사정」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향토지(鄕土誌)에 전한다.
한국농어촌공사 신곡양 배수장 정문 좌측에 1987. 12. 20 경기도에서 건립한「영사정(永思亭)터」
라는 비석 설명문에 “강기슭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작은
죽뿌리 섬이 있어 한강 하류 쪽에서는 으뜸가는 절경을 이룬 곳이다.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윤행임(尹行恁)이 정조 왕으로부터 정자 이름을 하사
받았던 영사정 정자가 있었던 곳이며 남원윤씨 가문의 묘역이 있다.”고 적혀 있다.
조선왕조실록 1797. 8. 15자 기록에 의하면 정조 임금이 김포 장릉에 행차하면서
영사정 묘역에 있는 충신 정헌공(윤우신), 문렬공(윤 섬), 충강공(윤형갑), 충간공
(윤 계) 등 묘소에 치제 (致祭/임금이 제물을 보내어 제사 지냄)를 하명했던 사실과
충간공의 5대손 윤행임공이 당시 정조 임금의 극진한 신임을 받고 규장각 책임자
(순조 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로 있었던 점을 종합해 보면 단순히 경치가 좋아 이름
을 내렸다기보다 능행(陵行) 당시 평소 아끼던 신하의 조상 묘 부근을 지나면서 충절을
오래 생각해 두자는 뜻에서 이름을 지어 내린 것으로 보여 진다.
승지공(윤 諱 은)의 묘를 처음 쓸 때는 신동(薪洞)이라 불렀고, 이곳은 숙종7년(1681년),
영조10년(1734년), 영조31년(1755년), 정조21년(1797년) 네 차례 임금이 직접 수호를 명하고 치제토록 한 유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