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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소회(所懷)
터키 성지순례 8일간의 벅찬 감격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려고 그때의 느낌을 되살려 정리하려고 합니다.
먼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죽음 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고 핍박에 쫓기어 땅굴을 파고 숨어 살았으나, 결국은 로마제국을 굴복시켜 십자가의 대승리를 가져온 카파도키아지역의 지하도시에 대한 감회를,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 수 백 년 동안 절대 권력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다 약 600년 후에 생겨난 이슬람세력에 밀려나 그 발원지를 모두 그들에게 내어주고 쫓겨난, 뼈저린 패배의 참담한 실상을 살펴본 감회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1.십자가의 대승리, 카파도키아(괴레메 계곡, 데린쿠유 땅굴)
나는 이미, 로마지방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지내던, 로마 근교의 지하교회 카타콤베를 본적이 있으므로 카파도키아의 땅굴도 그와 유사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카타콤베는 이미 있던 지하 무덤을, 도망 온 기독교인들이, 좀 더 넓히고 개조하여, 예배의 장소로 사용하였으나 나중에는 주로 무덤으로 사용한 것으로써, 그것만으로도 초기 신앙인이 격은 고초와 죽음도 불사하고 믿음을 지킨 그들의 모습을 가늠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와 건설 및 사용 기간과 용도의 면에서 카파도키아와는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찾아 본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계곡은 화산재가 굳어 이루어진 높이 약 30m, 지름 10∼20m의 원추형 응회암의 밀집 지역인데, 이곳을 쫓기던 기독교인들이 파고 들어가 바위 속에 주거공간을 만들고, 좀 더 넓게 팔 수 있는 곳은 예배당과 수도원을 만든 곳입니다.
멀리서 보면, 촘촘히 서있는 거대한 원뿔 또는 송이버섯 모양의 흰색 응회암 바위기둥이 저마다 크고 작은 현무암 덩어리를, 마치 검은 모자를 썬 듯, 머리위에 올려놓고, 서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요정들이 솟아져 나올 것 같은, 동화속의 나라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곳이나 풀 한포기 제대로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바위산입니다. 이런 바위덩어리와 바위언덕에 구멍을 뚫고, 속을 넓혀, 은신처를 만들어 숨어 지내던 2000년 전 초대 교도들이 격은 고초는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많이 훼손되었으나 사과교회, 뱀교회, 허리띄교회의 벽과 천정에 채색화로 그려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의 만찬과 유다의 배반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화가들의 소박한 천정화와 벽화들이 주는 진한 감동을 뉘라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것보다 못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오마 하신 주님! 어서 오소서!” 날마다 밤마다 목메어 기도하며, 응회암이 비록 강도가 약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바위인데, 식구가 늘 때 마다 그 바위를 긁어 파느라 손톱이 닳다 못해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딱딱하고 거친 그 바위벽을 쓰다듬으며 얼마나 눈물을 삼켰는지!
뿐만 아니라 나를 정말로 놀라게 한 카파도키아의 또 하나의 불가사의한 유적은 데린쿠유와 카이막클리에 있는 거대한 지하도시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박해와 로마군대의 수색을 피해서 모여든 기독교인들이 땅바닥을 파고 들어가 지하에 만든 것으로, 주거지뿐만 아니라 교회, 학교, 곡식 저장고, 포도주 저장고, 공동 취사장, 공동 우물, 비상통로, 형틀과 감옥 등을 두루 갖추고 있는, 실로 불가사의 한 구축물입니다.
각 시설은 거미줄 같은 미로로 연결되어 있고, 통로는 크고 둥근 바위로 차단 할 수 있게 만들어, 외부로 부터의 침입을 저지할 수 있게 하였다합니다. 미로가 너무나 넓은 지역에 복잡하게 얽혀있고, 지하로 깊이가 80∼100m나 되어, 들짐승들도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근처에서 이런 지하도시가 이미 40여개가 발견되었고, 얼마가 더 있는지는 아직도 다 조사되지 않았으나, 최대 100만 명이 살았었다고 추정한다하며, 한 곳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도시로 도망하기 위해 파놓은 지하통로가 9Km에 이른다고 합니다.
현재 관람이 가능한 곳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다하니, 그 방대한 규모에 정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관람가능 한 곳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최대 3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하고, 적어도 3천명이 살았다 합니다.
그런데 그 일부분이 나를 이런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빠지게 하다니!
깜깜하고 바로 설 수도 없는, 얕고 좁고 비탈지고 고불고불한 지하 땅굴을 집이며, 학교며, 교회로 삼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햇빛마저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굶주리며, 떨며, 쫓기며 살았을 초대교인들을 상상해 보시라!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십년도 아닌 평생을, 그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위대한 신앙의 힘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부활 승천하셨고, 이제 멀지 않아 최후의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그 믿음.
그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그리고 ‘내가 올라감을 보는 것 같이, 속히 다시 오리라.’하신 말씀을 믿는, 그 믿음.
처음 얼마동안,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믿고 버티기가 비교적 쉬웠을 것이며, 또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믿을만한 목격자들로부터 직접 목격담을 들은 사람들도 이 땅굴이 어느 정도 견딜 만 했을 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금방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그들이 태산처럼 믿고 따르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속 잡혀 죽고, 베드로와 바울마저도 순교 당하였다는 소문이 땅굴까지 퍼졌을 때는, 얼마 동안 잘 버티던 이들 제1세대 도망자들마저도 이 땅굴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믿음을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임을, 잠시라도 이 땅굴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주는 아득한 옛 이야기를 그들은 어떻게 믿고, 10대 300년을 무슨 힘으로 버텼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었음과 이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성령의 감화.’ 이 두 가지를 빼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그 고통의 길로 덜어 갔을 까요?
그리고 또 설령 부활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단지 그 아는 것만으로서,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이 극한적 고통을 그들의 의지력만으로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요?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람의 의지력은 나날이 약해지고, 누적되는 고통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기 때문에 의지력이란 오래지않아 한계점에 도달함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곳에는, 그 고통 속에서도, 즐겁고 기쁘게 이를 극복하고도 남을만한 ‘믿음’을 나날이 샘솟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러한 특별한 힘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그들의 귀에 끊임없이 들려주시는 하늘의 속삭임과,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보여주시는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내주마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돌보심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게는 이 땅굴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를 의심할 여지없게 하는 물적 증거 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살펴야 할 것은, 딴에는 교묘하게 위장하고, 그들 나름대로는 철저하게 방어망을 구축하고, 바위 문을 굴려 통로를 차단할 수도 있게 하였다고는 하나, 20년 이상을 사관학교에서 군사전략을 연구하고 강의한 전문가인 내 눈에는, 그 방어 시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뛰어난 전략, 전술가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춘 로마군이 정작 수색, 소탕하려고 들었더라면, 그것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그들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 방어 장치와 방어력만으로 로마군의 소탕작전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지하도시는, 로마군이 마음만 먹으면 단지 2∼3일, 길어야 일주일 정도면 해치울 수 있는 허점투성이에 불과 합니다.
(이 글은 그런 지하시설을 어떠한 방법으로 공략하면, 단숨에 해치울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쓰는 글이 아니므로 지면을 아껴 그 공략 법은 생략합니다.)
로마의 수색대가 그들을 찾아내어 소탕하지 못한 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풀어 로마군의 눈을 가리고, 하늘의 위장막으로 그들을 감싸 보호하였기 때문이라고 밖에, 이 또한 달리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이곳 지하도시의 그 비좁고 깜깜한 미로에서 행여 앞사람을 놓쳐 길을 잃을세라 힘겹게 기어 나오면서, 불현 듯 ‘그 때뿐 아니라 지금도 날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줄을 모르겠느냐?’라고 속삭이시는 듯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손만 뻗으면 만질 수는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칼·바르트는 『‘그때’ ‘그곳’에서 그들의 ‘삶의 콘텍스트’를 그 때에 적합한 방법으로 ‘섭리’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서는 우리의 ‘삶의 콘텍스트’를 이때에 적합한 방법으로 ‘섭리’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오래지 않아 땅굴 속에서도 그 믿음 굳게 지켜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그들, 믿음의 선배들을 만날 것입니다.
아, 나는 그때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감사드려야 할런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이 있듯이, 온 갓 핍박과 박해를, 이 땅굴 속에서, 300년을 버티어 내고, 결국은 거대한 붉은 용, 로마제국을 굴복시키고, 로마황제를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한 이 땅굴 시민의 위대한 승리를 누가 무슨 말로 다 상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땅굴 도시야 말로 견줄 것 없는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입니다.
내 눈에는, 이 땅굴 도시는, 그 찬란함으로 우리를 감탄케 하나, 그 뒷면이 면죄부의 검은 그림자로 얼룩진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보다도, 뛰어난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 수 없게 하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하여, 우리로 하여금 감탄과 아울러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과연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을 가 의심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구축물로 보였습니다.
기독교 공인 후, 이 카파도키아는 교회가 무소불위의 권력과 금력으로 오랜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로 인해 부패 해 갈 때, 성 바실리우스 등에 의해 기독교 영성 회복을 위한 수도생활의 중심지가 되었고, 훗날 1174년부터 셀주크 트루크의 지배를 받았을 때와, 1515년부터 오스만 트루크에게 점령당하였을 때, 그 때에도 그들은 흔들림 없이 그들의 신앙생활을 열렬히 이어갔다 합니다.
이 지하도시를 보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 폐허뿐인 일곱 교회와 아야 소피아의 아픔
카파도키아에서의 감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까, 그것에 비해 하타이 지역의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한마디로 실망, 그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출생지인 다소로 가는 길에 베드로사도가 피신하였었다는 동굴의 기념교회에 갔으나, 그저 아무것도 없는 바위언덕을 깎아 내린 흔적뿐이어서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여기가 그 교회 터란다’라는 말만 듣고, 사진 찍고 통과, 또 버스로 한참 가다가, ‘이 근처 어디에 안디옥교회가 있었을 겁니다.’ 하며, 안디옥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지역을 지나갔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없으니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으나, 안디옥교회는 스테반의 순교이후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흩어져 온 유대계 헬라인 디아스포라를 결집하여 기원 35년경 베드로사도가 세운 신앙공동체로써, 사도 바울도 상당기간 이곳에서 전도하였으며, 이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생기게 한 교회입니다.
그 후 이 교회는 성 에프렘을 비롯하여 많은 성자를 배출하였고, 무슬림의 점령 후에는 또 다시 많은 디아스포라가 복음을 들고 미국, 호주 및 유럽 각국으로 나가게 한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아! 이러한 안디옥교회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사라지다니!
우리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사도 바울도 이 지역을 걸어 다니며 선교하였을 거야’ 하면서, 그의 생가와 우물터라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아 이런! 나는 용산의 어느 재개발지역에서 본적이 있는 철거를 기다리는 집에 온 듯, 조그마한 철제 대문을 밀고 들어가 마당에 적당히 구획지어 놓은 곳에 서서, 이곳이 바울의 우물터라는 설명을 듣고, 사진 몇 장을 찍고 더 서있기가 민망하여 서둘러 나오며,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애써 달래었습니다.
아무리 이슬람 지역이라고 해도, 안디옥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성 바울의 생가를 이 모양으로 방치하다니!
서 유럽 어느 곳에 바울의 생가가 있었다면, 이방인에 대한 선교로 기독교의 세계화에 기여한 그의 역할이나 신약성서의 절반을 기록한 그의 업적으로 볼 때, 누구도 그가 베드로 보다 못하다 할 수 없겠거늘, 바티칸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노트르담 사원과 버금가는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겠는가 말입니다.
고넬료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몇 사람이 더 오자 이방인과 너무 밀접하게 지내는 것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좋지 않게 보일런지도 모른다 싶어 이방인과의 자리를 기피한 베드로의 소심증과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예수께서 주신 여러 명령 중 가장 중요한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속 좁은 선민의식 때문에 결국에는 정든 안디옥교회를 떠나게 되는 바울사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이 일이,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어찌 막연한 짐작으로 잘됨과 잘못됨으로 나누어 헤아리려는가?
나 자신, 종종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편견에 빠지는 주제에.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 책망 받은 라오디게아교회 터, 칭찬 일색의 빌라델비아 교회 터, 사데 교회 터, 거대한 대리석 도시인 에베소 발굴지, 그리고 사도요한의 무덤 근처의 사도요한 교회 터 등은, 지금은 기둥 아래토막만 남은 폐허에 불과합니다.
이후에도 서머나 교회 터, 두아디라 교회 터, 버가모 교회 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아 서술한 요한 계시록의 산실인 밧모 섬에 있는 요한의 유배지 계시동굴과 이를 기념하는 수도원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초대의 일곱 교회는, 어떤 건물을 가지고 예배드리던 건축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며 예배드리던 그 지역 교인들의 신앙공동체를 일컫는 말 이었으므로, 우리가 둘러본 일곱 교회 터는, 실은 기독교 공인 후 또는 로마 국교화 이후에 초대 교회를 기념하여 건립한 성전을 무슬림이 침략한 후 파괴한 폐허입니다.
비록 잔해만 보았으나 우리는 그곳에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발원지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칭찬을 받았거나 비록 책망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곳은 당연히 자랑스러운 곳이고, 성스러운 곳입니다.
당시로서는 알려진 전 세계를 석권하여 지배하던 기독교가 오랜 태평성대를 누리는 동안 부패하고 타락하여, 그 거룩한 발원지를 지켜내지 못하고, 그 보다 600년이나 뒤에 한 아랍 상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슬람에게,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을 비롯하여 자라나신 나사렛과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갈보리 산(골고다언덕)과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하여, 우리가 이번에 둘러본 초대 일곱 교회 전부를 고스란히 내어주어 폐허가 되게 하였고, 지금도 이 거룩한 땅이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두 이교도의 관할 아래 버려진 채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 참담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특히 이번 순례기간에 본 성전 중 무슬림, 그들이 주저앉히지 않은 유일한 성전인 아야 소피아 사원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가슴 저미는 아픔과 슬픔으로 분한 눈물을 삼켰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이 아야 소피아사원은 전문가들에 의하면 비잔틴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건축물로써, 기원 36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그것은 소실되었고, 537년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중건한 것입니다. 그는 이를 완공한 후에, 이런 걸작을 만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세운 솔로몬 왕에 대하여 ‘나는 드디어 당신을 이겼소!’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로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비잔틴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아, 이 아름다운 성전이, 무슬림에게 점령당한 후에, 당하고 있는 이 수모를 어이할고!
그들은 이 성스러운 최고의 걸작인 성전의 외부 네 모퉁이에 이슬람사원임을 나타내는 첨탑을 세우고, 내부 벽화위에는 마구잡이로 두텁게 회칠을 하고, 본래의 아름다운 벽과 기둥에는 볼썽사나운 이슬람 문양의 대형원판을 여기 저기 덧대고, 망가뜨리고, 부수는 것도 모자라, 동방 정교의 총본산이던 이 성전에 마구잡이로 메카 방향으로 벽을 뚫어 구멍을 내고, 381년 동안이나 알라를 섬기는 이슬람신전으로 사용하다가, 최근에는 덧칠한 회를 절반쯤 벗겨내어, 벽화의 일부분을 살려내고, 누구나 입장료만 내면, 흙 묻은 신발로 밟고 들어가 관람하게 하여, 돈벌이 도구로 전락시켜놓고, 말로는 ‘박물관이다’ 한답니다.
자기들이 이 아야 소피아와 견줄 량으로 아흐멧 광장을 사이에 두고 그 맞은편에 지면을 3m나 돋우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치장으로 덩그러니 지어놓은 불루 모스크라 불리는 술탄 아흐멧 쟈미에 들어 갈 때는, 신발 벗어 주머니에 담아 들고,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 쓰고, 조심조심 발소리도 정숙하게 들어가게 하면서.......
아, 이 쓰라린 낭패를 어찌 한단 말인가?
‘하나님! 기독교의 발상지, 거룩한 땅을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내어준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나님, 이 거룩한 땅과 아름다운 성전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도록 이곳 사람들의 참람함을 깨우쳐,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려세워 주시고, 하루속히 이 아흐멧 광장에서 소리 높여 찬송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3. 맺는 말
나는 이번 성지순례 기간에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에 숨어든 초기 기독교인들이, 300년의 인고 끝에, 드디어 대 로마제국을 굴복시켜 기독교의 세계화를 이루어낸 힘, 실로 극적인 승리를 얻게 한 그 힘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서 비롯되었을 가를 줄곧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세 후기에는, 기독교가 그 발원지인 거룩한 땅을, 어쩌다 무슬림에게 고스란히 내어 주게 되었을 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줄곧 맴돌았습니다.
나는 이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겠다.’ 는 일념으로 바로와 싸워 이겨,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황량한 광야에서 40년 동안 신산 고초를 다 격고, 드디어 요단강에 다다른 모세에게, 그가 세 번씩이나 거듭 간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가를 이해하지 못하여 애태우며 긴 기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처럼 이제 부터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섭리 자이신 하나님께서, 일견 부자연해 보이는 성지의 폐허화를 용인하시고, 그 부자연해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뜻이 무엇일가를 깨달을 때까지 오래 동안, 그리고 드디어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 때문에 또 오래 동안, 이번 성지순례의 기억을 반추하게 될 것 입니다.
9월 24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0월 3일, 다시 돌아 올 때 까지, 우리 순례단 일행이 무사히 모든 일정을 마치도록, 수십 만 리 하늘 길과 고르지 못한 수 천리 땅 길 그리고 밧모 섬을 오가는 8시간에 걸친 바다 길을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70명이 넘는, 움직이는 시한폭탄 같은 교인들을 이끌고, 혹시 작은 사고라도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어 잠시도 쉬지 못하신 박노철 목사님과 한상은 목사님 그리고 각부서의 책임을 맡아 수고하신 여러 교우님들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권 혁 달 작성 (2013. 10. 12. 성지순례를 마치고)
첫댓글 권사장 좋은 글 고맙고, 연말모임에서 다시한번 강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만일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더욱 좋구요 (약30분정도) 전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