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언 “아무리 괴로워도 믿음으로 살아라.”
랠프 존슨 번치박사는 1904년 디트로이트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 때 오랜 투병생활을 이기지 못하여 숨을 거두게 된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최후의 말을 남기셨습니다.
"랠프야, 너에게 물려줄 것은 한 가지도 없구나. 그러나 엄마의 말을 잊지 말아다오. 아무리 괴로워도 믿음으로 살아라,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여라. 잊지 마라."
랠프는 1년 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빈손을 든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할머니 나나 밑에서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인종차별과 가난 속에서 수십 번 학교를 중단해야할 위기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어머니가 최후로 남긴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믿음으로 살면서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면서 갖은 노동에 종사하며 이를 잘 극복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그에게는 할머니 나나가 있어서 힘이 되었습니다. 랠프는 후일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내게 주어진 권리를 위해 세상에 맞서 싸우라고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절대로 마음속에 분노를 키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나는 랠프에게 이해와 관용 그리고 인내심을 심어 줬습니다. 어린 나이의 소년에게 사랑과 진리로 가르치며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그를 대학에 입학시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했습니다. 장차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하게 만든 분은 바로 할머니 나나였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정부, 국제관계’로 학위를 취득하고 2차 세계대전 중, 번치는 전쟁부와 국무부에서 근무 했습니다. 종전을 위해 그는 UN 설립 사전 준비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이후 UN 에서 남은 임기 내내 근무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내전 중인 여러 계파 사이의 UN내 최고 중재자인 카운트 폴케 버나도트가 암살 당한 후, 당시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종식을 위한 UN 특별 협상단의 보좌진이었던 번치는, 팔레스타인 계파간의 협상에 뛰어 들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성공적인 협상력을 인정받아 1950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동 지역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물러난 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에 제1차 중동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양측은 협상 테이블에조차 나서지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번치 박사는 어릴 때 배운 인내심과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재에 임했습니다.
"세상에 전쟁을 좋아하는 국민은 없다. 전쟁을 좋아하는 지도자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불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협상에 회의를 가졌으나 그는 "끝이 없는 협상 속에서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도 안다. 내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라는 것을…." 결국 이듬해인 1949년, 끝내 휴전이 이뤄졌습니다. 노벨위원회는 번치 박사의 중재 노력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비록 유엔에 몸담으면서 한 일이지만 이번 일은 순전히 한 개인의 지극한 노력의 산물이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만큼(당시 46세) 계속 인류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
당시 번치 박사는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비서에게 노벨 평화상 소식을 듣고 "내가 왜 이걸 받아야 하나. 유엔의 평화 유지 업무는 상을 받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을 유엔 평화활동과 민권운동에 전념하다 1971년 서거했습니다.
첫댓글 믿음으로 살라는 신앙의 유업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