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미니우스의 주장에 대한 칼빈의 5대 교리
모든 교리는 이단의 주장이나 사상이 먼저 발흥하고 난 다음에야 그것이 문제가 되어 공교회가 모여 장시간에 걸친 회의의 결정을 통해서 확증한다. 삼위일체론, 기독론, 성경과 성령에 관해서 등이 모두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합법적인 교리로 채택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칼빈의 ‘5대 교리’(the Five Points)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진행 가운데서 탄생하였다.
루터와 쯔빙글리, 칼빈이 주체가 된 종교개혁은 당시 캐도릭의 부패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회복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하나님은 미리 역사 속에서 그 일을 진행시켜 왔고,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럽에서 기독교회의 진정한 회복을 시작하신 것이다.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개혁의 지도자들은 비로소 참다운 교회의 시작을 알렸고, 칼빈(John. Calvin)은 성경을 통해 사상 전무후무한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 했고, 서구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과 자세를 송두리째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위대한 기독교 목사이자 신학사상가였다.
칼빈의 이런 활약으로 캐도릭 교회는 서구 유럽에서 예전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칼빈의 ‘개혁주의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대의민주제도’(代議民主制度) 아래 유럽의 교회와 사회는 다방면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더구나 칼빈은 스위스의 제네바를 기점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과 성경정치(Bibliocracy)를 정착시켰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란 인간의 구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세상의 모든 일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심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칼빈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났을까... 1603년 네델란드(화란)에서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네델란드는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가장 정통 개혁주의의 본산지였는데, 그런데 어느 날 정부의 관리 출신인 ‘쿠른헤르트’(Dirk Volkerts Coornhert, 1522-1590)라는 자가 나타나 칼빈주의의 ‘주권’과 ‘예정’ 등을 반박하는 글을 써서 정부에 올렸던 것에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이 문제로 당국자들과 국민들은 의견이 분분해졌다. 이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적절한 대답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칼빈의 제자 ‘베자’(Deodore Beza)는 분개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자기와 개혁주의를 같이 해온 화란신학교의 교수인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쿠른헤르트를 찾아가 진상을 알아보고, 그의 주장에 대하여 대해 반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알미니우스가 쿠른헤르트를 찾아가서 진상을 알아보고 그의 글을 읽어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도 그만 쿠른헤르트의 주장에 설득을 당해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그가 겨누었던 공격의 총부리를 쿠른헤르트가 아닌 칼빈주의 진영을 향한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잘못되었다. ‘예정’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아주 타락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고 그를 선택하신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발생하는 것이다 등의 주장으로 칼빈주의 사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처음에 알미니우스는 보복이 두려워 이런 주장을 쉬쉬하였으나, 알미니우스가 죽은 지 일 년 후인 1610년에 이 문제는 다시 역사상에 대두되었다.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 곧 알미니안주의자들(Arminianists)은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5대 교리를 항의문 형태로 네델란드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서, 자기 의지로 믿을 수 있다- 부분적 타락
2. 하나님은 인간이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구원하신다- 예지 예정 및 조건 선택
3. 십자가의 속죄는 만인을 위한 것이다- 보편속죄
4. 구원의 은혜는 인간이 충분이 거부할 수 있다- 자유의지
5. 구원은 상실될 수 있다- 궁극적 구원 실패 가능
이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 13일 세계적인 종교회의를 ‘도르트’(Dort)라는 도시에서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84명의 정회원이 참여, 그 중에는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팔라틴 등 유럽 전역의 개혁파 교회들에서 파견된 26명의 대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약 7개월에 걸쳐 154회의 회의를 가졌다. 그 결과 이 대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이설(異說)임을 확인하고, 만장일치로 5대 항론을 기각시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칼빈주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을 채택하여 발표했다.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불리는 이 강령은 칼빈 자신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론에 대한 대응책으로 작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5대 강령은 칼빈의 사상과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칼빈의 신학 속에 내재된 내용을 후대에 더 명확히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주의의 기본이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를 집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을 보여주는 성경이 주춧돌이요, 5대 교리는 그 위에 세워진 다섯 기둥에 비유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해서 알미니안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고, 주모자는 처형되었으며, 그 추종자들은 모두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 후 알미니우스주의 남은 제자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요한 웨슬레’(John Wesley)가 그 일파에 감명을 받아서 알미니안주의자가 된 것이다. 요한 웨슬레에 의해서 마침내 감리교(Methodist)를 창설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칼빈의 5대 강령에 대하여 시간이 나는 대로 글을 올리고자 한다. 알미니안주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혁교회의 ‘5대 교리’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5대 강령은 결국 칼빈주의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반기를 든 알미니우스의 주장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칼빈주의 입장에서 한 마디로 요약해서 미리 말한다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중심적 항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