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중생하지 못한 죄인의 총체적인 인간현상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는 신학적인 말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제반현상이 이 표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적 타락’이라는 말 속에는 참으로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에 대해서 “사람은 스스로 죄에 빠짐으로 구원을 얻을만한 선행을 행할 의지력을 아주 상실해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선에서 멀어지고 죄로 죽었으니 자력으로는 회심을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회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 혹은 전적인 타락이라는 결과적 운명에 대하여 성경 창세기 3장은 인간 최초의 배신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타락한 인간을 가리켜 성경은 “너희가 죄로 인하여 죽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다운 선(善)에 이르거나 선을 행할 수도 없게 만들었으며, 또한 선을 알기조차도 원하지 않는 상태로 추락시킨 것이다. 사망과 각종 질고와 반목과 질시 등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오직 총체적 부패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자력으로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인간은 낙원에서 타락한 이후에 모든 선에 대하여 부적당하고, 무능력하며, 반대하는 자가 되어 전적으로 악으로만 일방향지어진 것이다. 그의 후손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적으로 죄인이며, 그의 의지는 적극적으로 죄악으로 치닫는다.
사실, ‘전적 타락’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인간이 극도로 타락하여 늘 악하고 무시무시한 죄만 짓는다거나, 난폭하여서 부패한 일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 쉽다. 만일 그렇다면 ‘전적 타락’은 언어가 주는 일종의 폭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그런 의도 아래 붙여진 것이 아니다. ‘전적’이라는 말은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일 모두가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죄인인 그가 어떠한 일을 행한다할지라도 죄인의 신분을 탈피할 수 없으며, 객관적인 선을 지향할 수도 없다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언제나 그 반대의 경향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지 못한 인간도 나름대로의 선행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건 비그리스도인이건 간에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빛 안에서 살며 기동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선행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불신자의 이런 선행을 ‘상대적 선행’이라고 말한다. 가령 남을 돕는다거나 연약한 처지의 사람을 돌보고 격려하여 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보다도 타인을 위한 수고로운 일에 훨씬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행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 선행이 아니라, 고장 난 양심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 중심적인 선행일 뿐이다. 이런 선행은 하나님을 높이는 수단이 될 수도 없을뿐더러, 하나님이 즐겨 받으심직한 선행이 아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선행보다는 선행(先行)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맺음이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복원되지 못한 인간의 어떠한 선행도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3에서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선한 행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한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히브리서 11:6은 말씀하고 있다. 물론 비그리스도인의 선행 그 자체가 죄가 성립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비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역적 존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반역적인 존재가 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죄의 얼개 안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비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자기의 선행을 자랑한다. 마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자기를 본받으라는 듯이.... 그러나 롬 8:8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은 말씀하고 있고, 롬 14:23은 “믿음을 쫓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가 어떤 선행을 하는 존재이든 간에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맺음의 기초가 세워져 있지 않으면 그 모든 행위가 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행위의 업적이 아무리 거창한 것일지라도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초개같이 타서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 선행이 그 자신을 위해 뭔가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망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비추는 빛 안에 거하지 못하는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전적 타락의 교리는 “타락한 자연인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항상 악을 택하거나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타락한 인간의 현주소를 창 6: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모든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이다. 이 악함은 인간 생각의 표면이나 근저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이 부패함은 시편 기자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외치고 있듯이 뿌리 깊은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알미니우스의 제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부정한다. 그들은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무능력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손상을 입은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에 관해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칼빈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 100층이 넘는 롯데월드 건물의 정상에서 떨어졌는데, 구조를 요청할 기회도 없이 즉사했다”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알미니안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 2층 베란다에서 떨어졌는데, 다리뼈와 어깨뼈가 부러져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119에 구조요청을 해달라고 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미 펠라기안’(semi-Pelagian)의 후예는 한 술 더 떠서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 이렇게 가르친다. “길을 가다가 웅덩이를 모르고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2~3주 정도 치료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성경에서는 “너희는 죄로 인하여 죽었노라”고 말씀한다. 인간에게 ‘사망’이라는 진단서를 발부하고, 죽은 자들의 무능함에 대하여 성경은 수도 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타락과 죽음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 대해서 알미니안이나 세미 펠라기안은 그저 과장법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성경을 통해 진단한 인간은 “형이상학적 결핍의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인간은 무엇인가 부족한 존재”라는 의미다. “인간은 타락으로 사망한 존재라서 스스로 하나님께 구조요청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칼빈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더구나 그들은 “인간이 타락으로 상처를 입었어도 자력으로 얼마든지 하나님께 구조요청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벨직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은 아주 성경적 입장에서 “선을 행함에 있어서 인간은 무능력하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도르트 신조‘(Confession of Dort) 역시 “(타락한) 모든 인간들은 구원의 합당한 선에 대해서 무능력하다”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저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과 동일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연인의 선의 무능력에 대하여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고 한다. 육신에 속한 사람의 세 가지 특성을 알아두자, 첫째,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둘째,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는다. 셋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깨달을 수도 없다. 이것을 성경의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사도행전 16장의 ‘루디아’가 아주 적절한 경우일 것이다. 루디아는 바울 사도가 빌립보의 강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례를 일컬어 “총명이 수건에 가려져 진리를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고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적을 행하셨지만 깨닫지 못하는 것을 힐난하시면서도,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고 하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2:14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깨달을 수도 없고, 선을 선택할 수도 없다. 만일 누군가가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 없다면, 선을 소망하거나 선택할 수도 없다는 논리는 자동적으로 성립이 된다. 그는 선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인간은 타락으로 인한 전적 무능력을 부정한다. 그들은 “자연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할 수도 있고, 깨달을 수도 있고, 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인간은 죄로 인해 완전히 죽은 존재가 아니라, 죄로 인해 상처는 입었지만 자력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수도 없이 타락한 인간의 무능력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전적 타락의 교리에 반발하고 있다. “그들의 반발은 얼마간 성경을 잘못 이해해서”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의 반발을 전적으로 성경에 대한 무지로 보기에는 석연치 못한 그 무언가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교리에서 에덴에서 사람을 유혹하던 사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단은 “너희의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알미니안들의 교리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에게 제한당하고, 인간의 능력은 최대한 끌어올려서 하나님의 능력과 견주는 수준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 사단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 반역을 꾀하는 것이다.
신학을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그 빛 아래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유추하는 방법이다. 전자를 정통 보수신학 방법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보적 신학방법이라고 말들을 한다. 이 두 가지 신학의 방법들은 같은 성경계시를 기반으로 하지만, 상이한 신학적 결론에 도달한다. 신학의 기반을 누구에서 시작하는가가 신학의 질을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사상은 하나님 중심적 사고체계로, 세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지만, 알미니안이나 펠라기안은 인간중심적 체계라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려한다. 이 두 가지의 신학사상은 서로에게 상이한 입장을 달리기도 하지만, 또 각기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칼빈주의 사상은 철저하게 성경 중심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영광을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드린다. 죽어서 냄새가 풀풀 나는 무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나사로처럼 살려주셨다. 그 무덤의 영역은 우리의 능력이 0.000%도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일뿐이다. 스스로 살아나거나,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는 없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이 죄인인 사실도 전혀 알 수도 없거니와, 그 죄의 결과를 당연한 보응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다시 말하거니와, 인간의 능력을 극도로 높여서 구원의 능력을 하나님과 나누어가지려는 그 어떤 시도도 사단적인 것임을 우리는 밝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에 밝은 눈을 가지고 이런 무리들의 시도를 철저하게 깨뜨려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