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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28 충무공탄신일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김기창 그림 '단종 영정'
- 단종릉 - 장릉
2007 -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의 국장이 승하 550년 만에 거행
‘임금 단종이시여, 이제 편히 영면하소서 …’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1441~1457)의 국장이 승하 550년 만에 거행된다. 단종은 숨진 뒤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강원도 영월군은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두메산골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 한을 풀어주기 위해 오는 28일 국장을 치른다고 17일 밝혔다.
영월군은 1967년 단종과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단종제를 해마다 개최해오던 중 단종 승하 550주년을 맞은 올해 영월군민들의 뜻을 모아 단종제 기간 중에 특별행사로 단종 국장을 거행하기로 했다.
영월군과 단종제위원회는 28일의 국장 행사를 차질없이 치르기 위해 18일 오전 10시 국장 예행연습을 하는데 이번 국장은 조선 왕실 후손 등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대여(국상 때 쓰는 큰 상여)와 각종 복식, 소품 등을 준비했다.
국장은 원래 고명을 시작으로 재궁(관)을 능에 안치하는 반우에 이르기까지 총 48개의 의례를 5~6개월에 걸쳐 진행한다. 그러나 이번 국장에서는 재궁이 궁을 나서기 전 영면을 기원하는 견전, 재궁을 대여에 올리고 혼백여 등이 장지를 향해가는 발인반차, 노제, 장지(장릉)에 도착해 승천을 기원하는 죽안마(대나무와 한지를 이용해 말의 형상을 만든 것) 태우기, 제향이 끝난 뒤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반우반차 등의 행사만 거행한다.
이 가운데 죽안마 태우기는 1926년 순종 국장 이후 볼 수 없었던 장식물을 81년 만에 재현한 것으로 큰 구경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단종은 승하한 뒤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주검이 방치되던 중 당시 영월 호장이었던 충신 엄흥도에 의해 현재의 영월 장릉터에 가매장됐다. 영월/김종화 기자 /한겨레 2007-04-17
1999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22년 만에 새단장 공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대작 `최후의 만찬(Coena Domini ; Last Supper)`이 22년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1999년 4월 28일 일반에 공개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The 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의 홀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12제자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 최고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다빈치가 1494년~1498년에 걸쳐 완성한 이 그림은 수백년이 지나면서 습기와 먼지등으로 손상돼 왔으며 이에 따라 수백년간 걸쳐 수차례 작업을 했다. 그러나 보수 작업에도 불구하고 작품 색상이 어두워지고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등 오히려 훼손이 심해지자 1977년부터 전문가들을 동원,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시작해 이번에 완성을 보게됐다.
반면 복원 작업으로 원작품의 예술성이 손상을 입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비평가들은 이번 복원 작업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복원된 그림 자체의 예술성은 인정할 수 있을지라도 복원 작품에서 다빈치의 흔적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조선
1969 - 샤를 드골(De Gaulle, Charles) 프랑스 대통령 사임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De Gaulle, Charles)이 1969년 4월 28일 사임했다. 이날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그가 제안한 지방자치제 개혁과 상원 개혁안을 52.42%의 국민들이 반대한 것이 사임 이유였다. 부결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보장된 대통령직의 사임을 강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10여일전 한 TV인터뷰에서 "그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거부된다면 사임하겠다"는 공언이 그를 사임하게 했다.
상원의장 알랭포에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잠시 수행했으나 그해 6월 1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Pompidou, Georges, 1911~1974)가 프랑스 제5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890년에 태어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차 대전 때 일선 장교로 참전했다 부상당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2차 대전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직을 수행하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런던으로 망명, 그곳에서 대독항전을 독려하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했다.
1958년 6월 총리가 된 드골은 그 해 9월 28일 마침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제5공화국을 발족시켰다. 1958년과 1965년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드골은 NATO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기치로 내걸며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섰고, 캐나다에서는 퀴벡의 독립을 부추겼다. 사임 1년뒤인 1970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조선
1969 - 현충사(顯忠祠) 중건 준공
"역대 용장으로 가장 명성을 떨치신 이순신 장군의 424회 탄신일을 맞은 4월 28일에 이 분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에서 동 사의 중건준공식과 아울러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 9년(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1592년-1598년) 삼도수군 통제사로서 풍신수길이 총지휘하는 왜군을 남해 각 해상에서 포촉 섬멸하므로서 상륙한 왜군을 퇴각케하여 국운을 회복시켰다.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상 처음으로 장갑선인 거북선을 전술적으로 구사하여 적의 대함대를 공격하였음은 특색있는 전적(戰績)으로서 널리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국가 존망이 목전에 처했음에도 사색당쟁(四色黨爭)에 영일(寧日)이 없던 조신들과는 달리 국가와 민족을 구한다는 일념으로 격전장에서 선두지휘하던 그 분은 오늘날 민족의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현충사는 충남 아산군 온양에 소재하며 그의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최근 이 곳을 애국애족의 상징적인 구심점으로 삼아 조국 근대화의 대업을 성취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사당을 중건하고 경내를 새로이 단장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성역화하게 되었다.
체신부에서는 충무공의 탄신일과 현충사 중건준공을 맞아 그 분의 숭고한 정신을 길이 이어받고 흠모(欽慕)하자는 뜻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67 -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세계헤비급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가 텍사스주 휴스턴 징병국의 육군입대명령을 거부했다. 1967년 4월 28일 휴스턴 징병국에 출두한 클레이는 신체검사에서 합격했지만, `자신은 아랍 모슬림의 선교사`라며 정부가 일반 목사의 병역을 면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징병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WBA는 즉각 클레이의 타이틀을 취소하는 등 클레이의 병역거부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6월 휴스턴연방지구재판소는 클레이에게 5년의 금고와 1만달러의 벌금형을 판결했다.
한편 클레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반전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또한 클레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슬람교도로 1964년부터 사용해온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됐다. /조선
1947 - 토르 헤이에르달의 뗏목 콘티키호, 페루의 카야오 항을 떠나 항해 시작
헤이에르달은 자신의 가설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잉카 원주민들의 방식대로 뗏목을 만들어 항해에 나섰다. 1947년 4월 28일, 5명의 동료와 함께 페루에서 콘티키 호를 출범시켜 101일 만에 약 8천km 떨어진 폴리네시아 투어모투 군도에 도달한다.
콘티키박물관 /tour.bugs.co.kr /Google
The Kon-Tiki left Callao, Peru, on the afternoon of April 28, 1947. It was initially towed 50 miles out to open water by the Fleet Tug Guardian Rios of the Peruvian Navy. She then sailed roughly west carried along on the Humboldt Current. Their first sight of land was the atoll of Puka-Puka on July 30. They made brief contact with the inhabitants of Angatau Island on August 4, but were unable to land safely. Three days later, on August 7, the raft struck a reef and was eventually beached on an uninhabited islet off Raroia Island in the Tuamotu group. They had travelled a distance of around 3,770 nautical miles (c.6980 km) in 101 days, at an average speed of 1.5 knots.
http://en.wikipedia.org /Google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 부근에서 감격적인 악수를 교환함으로써 2차대전도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Mussolini, Benito, 1883~1945)가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밀라노를 탈출한다. 목적지는 스위스. 그러나 둘은 스위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탈출 이틀 만에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 근처에서 파르티잔에 체포돼 좀더 살아보려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살려만 주면 제국을 주겠다”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용서받기에는 그가 인류에 끼친 악행이 너무 컸다. 27일 약식재판을 거쳐 총살형에 처해졌고 시체는 28일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 앞에 공개됐다. 이틀 뒤에는 히틀러도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다. 무솔리니·히틀러에 앞서 4월 12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세상을 떠 2차대전의 주역 네 사람 중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2차대전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조선
1937 - 이라크의 대통령 후세인(Hussein, Saddam) 출생
후세인 [Hussein, Saddam, 1937.4.28~2006.12.30]
1979년 이라크의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하여 걸프전을 일으키지만 패배하였다. 이라크가 보유한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발발, 패배 후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다. /naver
- 'Anthropometry of the Blue Period' - 'Fungus Sculpture'
니스 출생. 누보 레알리슴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1958년 ‘허공’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고, ‘인터내셔널 클라인즈 블루’라 이름 지은 푸른 하늘, 깊은 바다의 색조를 즐겨 썼으며, 금박(金箔)·불·물·공기 등 그리스의 철학적 원소를 사용하였다.
또 페인트를 칠한 여자들의 나신(裸身)을 캔버스에 굴려 그림을 그렸고, 그 자신이 2층집에서 뛰어내리는 ‘허공의 극장’을 연출하는 등 ‘예술의 혁명’을 지향한 기행(奇行)으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1995년 1월 말까지 독일의 쾰른(루트비히 박물관)과 뒤셀도르프(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에서 열린 이브 클라인의 1차 순회전시는 그의 실험정신을 그대로 전한다. 작품활동은 불과 8년이나 그의 이념과 작업은 요셉 보이스를 비롯한 현대의 행위예술·팝아트·미니멀리즘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naver
"청색은 바다와 하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연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이브 클라인
- Zambia 10 Kwacha (Banknote)
1924 - 잠비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초대 대통령 카운다(Kaunda, Kenneth) 출생
카운다 [Kaunda, Kenneth David, 1924.4.28~ ]
잠비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백인 지배하의 로디지아-니아살란드연방에 극력 반대, 1960년 통일국가독립당(UNIP)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1964년 10월 영국으로부터 잠비아가 독립함에 따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9년 8월 구리광산의 국유화에 착수하였고, 1970년 9월 아프리카통일기구 의장이 되었다. 1971년 1월 영국연방수뇌회의에서 영국연방원칙선언 초안을 제출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무기수출 재개에 대한 항의운동의 선두에 서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다른 아프리카 신생독립국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특히 정치적 폭력사태가 일어나자 1973년 1당체제를 확립하였다. 그후 계속되는 국내의 경기침체와 정치적 ·사회적 불안 등의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1978년과 1983년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naver
1900 - 프랑스의 정치가, 공산당 지도자 토레즈(Thorez, Maurice) 출생
토레즈 [Thorez, Maurice, 1900.4.28~1964.7.11]
12세 때 북프랑스의 파드칼레현(縣)에 있는 탄광촌에서 광부가 되었으며 1919년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20년 사회당과 결별하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1929년 국민의회 의원, 모로코전쟁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1930년 당 서기장, 1934년 반(反)파시즘 인민전선의 결성에 진력하는 등 뛰어난 지략과 실전력을 발휘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 내부에서도 지도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대독저항운동에 활약하다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1943년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다. 1944년 드골의 파리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이듬해 총선거에서는 공산당이 하원의석 586석 중 153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고, 드골 내각에 국무장관으로 입각하였다.
이후 F.구앵, G.비도, P.라마디에 등 각 내각의 부총리가 되었으나 동서냉전이 격화되자 1947년 라마디에 내각에서 밀려났다. 1961년 서기장에 재선, 1964년 건강이 악화되어 서기장직을 W.로셰에게 물려주고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로 가던 중 배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저서에 《인민의 아들 Fils du Peuple》(1937) 《프랑스의 정치》(1949) 등이 있다. /naver
1897 - 중국의 군인, 정치가 예젠잉(葉劍英) 출생
예젠잉 [葉劍英(섭검영), 1897.4.28~1986.10.22]
광둥성[廣東省] 출생. 1927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장제스[蔣介石]의 반공쿠데타에 대항하여 일어난 광둥폭동에 제4교도단을 거느리고 참가하였으며, 그 후 홍콩을 거쳐 독일과 소련에 유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장시[江西]소비에트구에 들어가 홍군 제1방면군 참모장, 홍군학교 교장을 거쳐 대서천(大西遷)에 참가하였다.
1936년 시안[西安]사건 후에는 홍군 시안 판사처 주임을 지냈으며, 항일전쟁 중에는 팔로군 참모장으로서 린뱌오[林彪]를 도왔다. 중국공산당 정권수립 후에는 베이징구[北京區] 군사관제위원회 주임, 베이징 시장, 광둥 군구사령관, 광저우[廣州] 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대혁명 후에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당 정치국 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부주석 등 당 ·군 ·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며, 군사과학원 원장을 겸임하였다. 린뱌오가 실각한 후에는 군의 제1인자가 되었고, 1978년 제5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2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1983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으며, 1985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naver
1889 - 포르투갈의 정치가 살라자르(Salazar, António) 출생
살라자르 [Salazar, António de Oliveira, 1889.4.28~1970.7.27]
처음에는 성직자 교육을 받았으나 코임브라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우고 1916년 동 대학 경제학교수가 되었다. 1926년 장군 카르모나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재무장관으로 기용된 후, 1932년 수상이 되었고, 국민통일당을 조직하여 1당독재를 추진하였다. 1936년 이후의 에스파냐내란에 대해서는 프랑코측에게 유리하게 움직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영국과의 경제관계의 단절이 두려워 연합국측을 원조하였다. 전후에는 미국에 접근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였고, 1951년 대통령선거에서 로페스가 당선된 후에도 정계에의 지위를 지켰다. 국제적 대립에 편승하여 외교적 지위의 향상에 노력하다가, 1968년 뇌혈전증(腦血栓症)으로 물러났다. /nave
1878 - 미국의 성격배우 배리모어(Barrymore, Lionel) 출생
배리모어 [Barrymore, Lionel, 1878.4.28~1954.11.15]
미국의 배우 일가인 배리모어家(The Barrymores)는 영국 배우 모리스 배리모어(Maurice Barrymore, 1847~1905)와 미국 여배우 조지애너 에머 드루(Georgiana Emer Drew, 1856~93) 사이에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3남매가 특히 유명하다. 장남 라이어널(1878~1954)은 소년시절부터 무대에 서서 인기배우가 되었으나, 차츰 영화에 집중하다가 1925년 이후는 영화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누이동생 에설(1879~1959)은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을 칭송받으며 셰익스피어극과 H. 입센의 《인형의 집》에 출연하여 명성을 떨쳤다. 1928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극장(에설배리모어극장)이 뉴욕에 세워졌고, 그녀 자신의 출연으로 첫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그녀의 동생 존(1882~1942)은 처음에는 개그와 가벼운 희극에 출연하였으나, 얼마 뒤 셰익스피어극의 《햄릿》 《리처드 3세》 등 고전극의 배역을 맡았다. 존의 세 자녀 가운데 2명도 배우가 되었다. /naver
1876 - 영국 의회,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황제 칭호를 줌
1837년 6월 18세의 나이로 영국여왕이 되었다. 그런데 하노버가에서는 여자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점에서 1714년 이후 계속되던 영국 하노버의 동군연합(同君聯合)은 없어졌다. 동군연합이란 각각 별개의 두 나라가 서로 독립을 침범하지 않고 동일한 군주를 추대하여 연합해 있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몇 번 있었다. 1840년 2월에 외사촌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공가의 앨버트와 결혼하였다. 1841년에는 황태자(나중의 에드워드 7세)가 태어났고, 또 몇몇 자녀를 얻었다. 여왕은 널리 국민의 존경을 얻은 현모양처로서 행동하였고, 떨어져 있던 왕가의 평판을 회복하였다. 남편인 앨버트는 공적인 면에서도 여왕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 정당제가 혼란하였던 1840∼1850년대에 정치면에서 여왕을 보좌하는 한편으로 1851년의 런던세계박람회를 성공시키는 등 과학기술과 예술의 진흥에도 힘썼다. 1861년 앨버트가 병으로 죽자, 그 후 여왕은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피했으나, 정치에는 강한 관심을 계속해서 가졌다. 자유당의 W.E. 글래드스턴을 싫어하였고, 보수당의 B. 디즈레일리를 총애하였다. 그리고 디즈레일리의 정책을 지지하여 1876년에는 인도 여제(女帝)도 겸하였다. /yahoo
1874 - 오스트리아의 작가 크라우스(Kraus, Karl) 출생
크라우스 [Kraus, Karl, 1874.4.28~1936.6.12]
보헤미아 출생의 유대인. 빈에서 활약하였다. 잡지 《횃불 Die Fackel》(1899∼1937)을 발행하였고, 종횡무진한 기지와 통렬한 풍자로 모든 영역의 부패 ·타락상을 비판하여, 찬탄과 원한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언어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정열을 쏟았으며, 아포리즘집(集) 《선언과 반론 Sprüche und Widersprüche》(1909)과 평론집 《만리장성》(1910) 등이 있다.
일생을 바친 평론생활 배후에 있는 《시집 Worte in Versen》(9권, 1916∼1930)을 비롯한 서정시는 엄격한 어법(語法)에 의하여 고전적 품격을 나타낸다. 희곡 《인류 최후의 나날 Die letzten Tage der Menschheit》(1922)은 환상 속에 경종을 울린 반전(反戰)의 서(書)이며, 만년의 작품 《제3의 발푸르기스의 밤 Die dritte Walpurgisnacht》(1952)에는 히틀러 시대에 대결하는 분노가 엿보인다. /naver
1838 - 네덜란드의 법률가, 정치가 아세르(Asser, Tobias) 출생
아세르(아서르) [Asser,Tobias Michael Carel, 1838.4.28~1913.7.29]
암스테르담 출생. 1862∼1893년 암스테르담대학 법률학 교수를 지냈고, 1893년 국회의원, 1904년 국무상이 되었다. 국제법에 관한 몇 권의 저서가 있으며, 1911년 프리트(Fried, Alfred Hermann, 1864~1921)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naver
토비아스 아세르(Tobias Michael Carel Asser)는 네덜란드의 법학자이다. 1899년에 열린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상설중재재판소의 결성에 기여한 공로로 1911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13년 사망 전까지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의 설립을 도왔다. /위키백과
1801 - 영국의 정치가, 인도주의자 샤프츠버리(Shaftesbury, 7th Earl of) 출생
1795 -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가 스터트(Sturt, Charles) 출생
1774 - 영국의 천문학자 베일리(Bailey, Francis) 출생
1758 - 미국의 제5대 대통령 먼로(Monroe, James) 출생
1753 - 독일의 화학자, 제당기술자 아카드(Achard, Franz Karl) 출생
1686 - 뉴튼, 만유인력 법칙 발표
1667 - 시각장애와 가난에 시달린 존 밀튼이 《실낙원》의 저작권을 10 파운드에 팔다
1467 - 원각사지 십층석탑 완성
1442 -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4세(Edward IV)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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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