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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주교회의 환경소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생태영성 심포지엄 준비 작업과 가톨릭노동청년회 역사 성찰 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늦게 연락 드리게 된 점 부디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 안에서 함께 걷는 기쁨을 기억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합니다.”
요한 복음 5장 17절에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가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지속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주간에는 물론 안식일에도, 낮에는 물론 밤에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안식일도 밤도 다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제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어지고 우주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의 기본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계속된다고 할 때, 당연히 오늘 이 시대에 하느님이 바라시는 생명의 질서는 어떤 것일지 질문하게 됩니다. 제가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주교회의 환경소위원회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물과 발전에 초점을 맞추어 물음을 제기하고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답을 모색하는 기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늘 시대의 징표를 예수님의 선포에 근거하여 식별하고 그것을 실천할 사명을 갖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물의 영성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본 한반도 생태 문제”라는 제목으로 마련한 생태영성 심포지엄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새겨 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이었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취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운하를 원하지 않는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대운하 계획을 가지고 그동안 우리 국민에게 많은 염려와 갈등과 소모적인 저항을 발생시켰습니다. 이런 점에서 쇠고기 수입 문제로 표출된 촛불 민심 앞에서 이대통령이 대운하 사업에 대한 국민의 뜻을 수용하여 이 사업을 철회하기로 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있습니다. 이대통령이 내놓은 대운하 공약 앞에서 우리 시민 사회가 낙담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삶에서 근본이 되는 물음들을 제기하여 시민 사회의 지혜와 합의의 수준을 고양시키는 기회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런 물음 가운데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들라면, 우리에게 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하나이고, 우리가 어떻게 발전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 다른 하나일 것입니다.
이 두 물음은 당연히 교회로서도 자신의 신앙 실천과 연관지어서 깊이 있게 응답할 가치를 갖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은 만물의 근원입니다. 물 없이는 사람을 포함하여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물, 예수 그리스도와 물, 성사와 물, 우리 민족의 생명의 질과 물 등의 관계를 성찰하여 그 결과를 우리의 신앙 실천과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또한 발전을 추구할 때도, 교회가 한결같이 지키고자 노력해 온 공동선에 근거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생명의 질을 향상시킬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하면서 우리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고양할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심포지엄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물의 민영화라든가 한반도 대운하 등 대규모 사업들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식별하고 그런 문제들을 극복할 대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비가 이 7월 한여름에 모든 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 주시기를 청하면서, 시간이 되시면 함께 하셔서 성찰을 나누고 비전을 심화하는 자리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시기를 청하겠습니다.
2008년 7월 9일
원주에서
황종렬 올림
이 심포지엄을 7월 12일에 잘 마쳤습니다. 주교회의 환경소위원회 위원장 최기산 주교님의 인사에 이어서, 총무 이동훈 신부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한순희 성심회 수녀, 김일회 인천교구 환경노동전담 신부, 저, 김지형 고려대학교 교수, 한면희 전북대학교 교수가 발제를 하였습니다. 최민석 광주대교구 장흥 본당 신부, 오경환 인천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최종수 전주교구 팔복동 본당 신부가 논평을 맡아서 충만하고 풍요로운 대화와 비전 공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 가르침에 나타난 발전관" 원고를 아래에 첨부합니다.
함께 나누어 주시면 그만큼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현대 가톨릭교회의 사회 가르침에 나타난 발전관
김일회(인천교구 환경노동사목 전담)/ 황종렬(생태영성연구원)
1. 시작하면서
교회는 지구상의 구체적인 지역과 사회를 자기의 삶의 자리로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와 자연과 사회는 필연적으로 상호 영향 관계에 들어서 있다. 하느님의 한 창조물로서 지역의 창조계는 물론 그 지역의 문화와 사상, 일상 생활, 법과 제도, 관습 등, 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로서 지역에 뿌리내리고 자기의 신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그리스도 신앙은 이미 그리스도교 역사가 서구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입증한 것처럼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와 사회의 삶의 질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교회는 이러한 영향 관계를 받아들여서 특히 레오 13세 교황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해서 사회의 중대한 문제를 성찰하고 식별할 원리와 판단할 기준,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행동 지침을 제시해 왔다. 실제로 “새로운 사태”로 번역된 <레룸 노바룸> 이래 1991년 5월에 요한 바오로 2세가 <백주년>을 반포하기까지, 그리고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교회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사회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태 윤리 등과 관련하여 진술해 온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백주년>에서 이런 관점을 계승하여 사회 관련 가르침을 “사회적 복음 메시지”로 일컬으면서, 이것을 “어떤 기술이나 단순한 이론처럼 보지 않고”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하는 기반과 기회로” 여긴다고 말한다(57항). 실제로 그동안 발표된 사회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다스림을 준거로 복음적 해석과 실천의 길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교회는 이를 통하여 군림하는 교회에서 섬기는 교회로 자신의 모습을 쇄신해 가면서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비추어 인간과 인권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책임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레룸 노바룸부터 백주년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제약과 한계는 있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자연을 포함하여 가난한 존재들의 관심과 필요, 그리고 그들의 시각을 각각의 사회 가르침에 통합하고자 진력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면 아래에서는 교회의 사회 가르침에서 발전이 어떻게 인식되고 참된 발전상이 어떻게 제시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현대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 전통
1) 가톨릭 사회 가르침의 효시로서 레룸 노바룸
유럽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한편으로는 생산의 증대와 부의 창출, 시민 생활의 풍요와 관련 학문의 발달 등을 가져왔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산업화는 레오 13세가 자신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가 지배와 종속, 착취와 궁핍, 자본의 권력화와 노동의 빈곤화로 일그러지는 사회 현상 역시 발생시켰다.
1800년대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에 투신한 요한 보스코 신부나 1900년대 초에 노동 청소년들을 하느님의 사도로 일깨운 요제프 까르댕 추기경은 이같은 사회 현실이 얼마나 참혹했고 그것이 유럽의 종교 생활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하였는가를 증거한다. 어린 까르댕이 신학교에 간 이후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을 때,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청소년 노동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인데, 이때 그는 그의 동료들에게 “꼬마 신부”라며 놀림을 받게 된다. 이것은 사제를 “자본주의의 착취를 두둔하는 앞잡이”로서, “노동자들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 고달픈 생활과 불의에 대항하는 외로운 투쟁을 등지고 떠난 사람”이라고 본 당대 유럽인들의 비판이 담긴 표현이었다.
어린 까르댕이 이런 일을 겪기 몇 년 전, 교황 레오 13세는 역사적인 <레룸 노바룸>, 곧 유럽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사태”에 응답하여 교회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자들의 상황에 관하여” 교회가 처음으로 공적으로 발표한 회칙이다. 이 회칙은 1891년 5월에 발표되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의 새로운 전통이 시작되었다.
레오 13세는 19세기말 산업화와 그 속에서 문제로 대두된 노사 문제에 복음적으로 응답하는 것을 “교회의 선익과 공공선을 수호”하기 위하여 자신이 수행할 사도적 직무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새로운 사태, 1). 그는 이 회칙 첫머리에서 자신의 사도적 응답이 요청된 사회 배경을 이렇게 진술한다:
새로운 산업의 성장과 새로운 기술의 발전, 변화된 노사 관계, 극소수의 막대한 부요와 대다수의 빈곤, 노동자들의 자기 신뢰 증가와 상호 결속의 필요성, 그 밖에 윤리의 타락이 투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같은 사태...보다도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1항).
이를테면, 유럽에서 산업화가 개시된 이래 경제적 발전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노동자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공동선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보다 침해하는 현상이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레오 교황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태>를 통하여 정의와 평화의 길을 제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한 학자가 평가하는 것처럼,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 자기 이해에서 새로운 단계를 개시시킨” 일로서, 사유 재산 제도를 인정하면서도 서구의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노동자들의 참상을 극복할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비록 개인주의적이고 시혜적인 시각에서, 그리고 반사회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착취적인 자본주의 행태에 대해서는 물론 폭력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사회 운동들에 대해서 역시 비판적으로 제시한 교회의 응답의 한 선구를 이룬다.
2) 가톨릭 사회 가르침의 계보: 100주년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시작된 현대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의 전통은 한편으로는 이 문헌에 대한 후대 교황의 공식적인 응답을 통하여 형성되어간다. 이 계열에 드는 작품이 비오 11세의 <40주년>,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70주년), 바오로 6세의 <80주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90주년)과 <100주년>이다.
또 다른 한 계열은 명시적으로 <레룸 노바룸>에 대한 공식적인 응답은 아니지만, 후대의 여러 교황과 주교대의원회의에 의하여 현대 사회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응답한 구체적 노력들을 통하여 형성되어 왔다. 요한 23세의 <지상의 평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 주교대의원회의의 <세계 정의>, 그리고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아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표한 <사회적 관심> 등이 그런 문헌들이다. 아래에서는 이 문헌들을 발표된 연대순으로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비오 11세는 <새로운 사태> 반포 40주년을 맞아서 이 회칙의 의의를 되새기고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다시금 서구 사회가 직면한 사회 문제에 응답할 계기로 삼는다. 그리하여 1931년에 <40주년>을 반포한다. 그는 여기서 자본주의의 무질서한 불의와 사회주의의 체제적 불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 정의”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가운데(74와 101항) 개인의 진정한 선익을 포함하는 동시에 개인의 선익에 대립되지 않는 형태로 공동선을 추구할 것을 요청하였다. 특히 그는 여기서 “보조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를 역설하면서, 사회 조직체의 구성원들에게 이들이 수행할 기능과 역할을 보장하고 지원하며(subsidium) 그들에게서 그러한 활동을 빼앗거나 흡수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였다(35항).
이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현대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매개한 교황 요한 23세는 <레룸 노바룸> 반포 70주년을 맞는 1961년에 회칙 <어머니요 스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부합하여야 할 현대의 사회 발전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현대의 사회 발전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응답으로 기획되었다. 그는 여기서 사유권과 함께 재산의 공공성, 곧 사회적 차원을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하여 부각시키면서 사회 안에서 재산이 보다 더 효율적으로 분배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104-121항). 이와 동시에 그는 이 문헌을 통하여 세계라고 하는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충만하고도 인격적인 참여를 고취하고 있다.
요한 23세는 다시 2년 후에 현대 세계의 전지구적 정의와 평화를 주제로 회칙을 발표하는데, <지상의 평화>가 그것이다. 그는 여기서 양심과 권위, 그리고 개인과 정치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인간의 근본 존엄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체제와 이데올로기들의 차이를 존중할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이 회칙의 말미에서 무기 경쟁이 개인과 국가로부터 사회 발전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를 박탈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불안과 공포를 겪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이어서 나온 것이 가톨릭 교회 2000년의 역사에서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전환시킨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한 핵심을 구성하는 <사목헌장>이다. 1965년 12월에 공의회를 마무리하면서 발표된 이 문헌은 현대 세계에서 교회가 시대의 표지를 읽고 여기에 부합한 형태로 자신의 사목 직무를 수행할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 문헌은 이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에 근거하여 특히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사회적 본성, 교회와 세계, 교회와 문화의 상호 관계, 경제와 정치 사회 영역에서의 정의와 평화 문제 등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수행할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문헌은 자연스럽게 현대 세계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신뢰와 존중에 입각해서 이른바 “발전”을 하느님의 다스림과 통합하여 성찰하고 응답할 토대를 마련하였다.
바티칸 공의회를 지켜 간 바오로 6세 교황은 1967년에 발표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통하여 경제력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배 현상을 주목하면서 사회 문제가 전지구적인 맥락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는 여기서 인간 존재와 발전의 상관성을 밝히고 진정한 형태의 발전은 정의와 평화를 토대로 하고 또 이 두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에게서 진정한 발전은 인권의 존중에 근거하여 사람들에게 일상 생활과 영성 차원에서 요청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조건들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21항과 “인류 전체의 공동 발전”에 관하여 다루는 여러 항, 특히 76항 등 참조). 그는 여기서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체계적으로 돕는 것을 정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진술하면서(48-49), 철저하게 평화적 문제 해결을 권고하고 설득한다. 또한 과도한 불의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가운데, 폭력적 저항이 용인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기도 하다(31-32항).
교황 바오로 6세는 <레룸 노바룸> 반포 80주년과 <어머니요 스승> 반포 10주년을 맞아서 교서를 발표하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80주년>이다. 교황은 여기서 사회 정의를 위한 교회의 관심과 투신을 상기시키면서, 그동안 세계 여러 지역 교회를 방문하면서 얻은 복음화 비전과 희망을 그리스도의 가치들에 비추어 시대적 표징을 식별해 낸 결과와 교직해 간다. 그는 여기서 사회 정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책임 의식을 새롭게 일깨우면서,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나타나는 청소년, 여성, 노동자, 이주민, 그리고 자연이 직면한 위기에 귀기울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21항). 교황은 이 문헌을 통하여 생태적 조건을 인류의 운명과 연결지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에 소개할 문헌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1971년 총회를 통하여 발표한 <세계 정의>이다. 이 문헌에서 저자들은 현대 세계에서 생명권(biosphere)의 훼손을 포함하여 다양한 유형의 폭력과 불의가 나타난다는 것을 식별하면서(19항),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계 개혁 활동에의 참여는 복음 선포의 본질적 구성 요소”라고 확인한다(6항). 이들은 교회가 세계의 정의와 평화 문제에 대해서 보다 더 능동적이고 사목적으로 응답할 책임을 자각하도록 촉구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내세주의와 초월주의에 치중한 신앙 생활을 극복하고 그 제약을 해소할 비판적 전거를 제공하고 있다.
1981년에 레룸 노바룸 반포 90주년을 맞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기념하여 회칙 <노동하는 인간>을 발표한다. 여기서 교황은 주관적 노동과 객관적 노동을 구분하고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를 구분하여 접근한다. 그에 의하면, 객관적 노동은 땅을 다스리는 과정으로서 농업과 공업 활동과 전자 기술 등을 포괄한다. 주관적 노동은 합리적 계획 하에 인간에게 고유한 인간성을 구현하고 완수하는 과정에서 수행하는 인간 활동을 말한다(5-6항). 직접 고용주는 “노동자가 일정한 조건에 따라 직접 노동 계약을 맺는 사람이거나 단체”이고, 간접 고용주는 “노동 협약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 현장에서 정당하거나 부당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을 말한다(16항). 이런 토대 위에서 교황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 원리를 설득하고자 한다. 또한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와 노동자들의 변화 무쌍한 관계에서 특히 노동조합 등의 연대와 간접 고용주의 제도적 영향 하에 노동자의 권리들이 존중받고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17, 20항 등).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시 <레룸 노바룸>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회칙 <백주년>을 공포하는데, 이 중간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987년에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아서 회칙, <사회적 관심>을 발표한다. 이 문헌은 “인간의 참다운 발전과 사회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로서 발전함”을 목표로 삼는다. 교황은 여기서 연대를 평화와 발전에 이르는 길로 일컫는다. 그는 “상호 의존의 결실”로서 연대는 필연적으로 “온갖 형태의 경제적 군사적 또는 정치적 제국주의를 포기하고 상호 불신을 협력으로 전환시키”는 투신을 요청하며,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정의의 실천 위에서 꽃피게 된다고 하였다(39항). 이를테면 바오로 6세가 평화의 다른 이름으로 보았던 발전을 연대라는 사회적 관계 틀을 통하여 평화와 정의하고 하나로 통합시켜 놓고 있다. 그는 특히 진정한 발전에 관하여 다루는 맥락에서 “생태학적 관심”을 주제화하면서(26항), 발전을 생태적 윤리 차원과 연결짓고 있다(34항).
이어서 요한 바오로 교황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100주년>을 발표한다. 교황은 여기서 먼저 <레룸 노바룸>의 기본 취지를 검토한다(1장). 이런 맥락에서 사회의 여러 계층 사이의 평화와 일치의 회복, 정당한 임금, 시민을 위한 국가의 역할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등을 역설하고 있다. 이어서 1989년 동구 사회주의 정권들이 무너진 상황에서 사회주의와 무신론이 고조되는 시대에 발표된 <레룸 노바룸>의 의의를 상기하는 가운데, 민족들의 상호 의존 관계와 상호 지원의 필요성을 진술한다(2장과 3장). 교황은 “인간이야말로 제일의 교회의 길”(53항)이라는 확신 아래 현대 사회가 나아갈 도정을 경제, 제3세계, 생태, 가정, 국가, 문화 등의 차원과 연결하여 제시하고 있다(4-5장). 그는 하느님이 계시를 통하여 설명해 주신 인간의 존엄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적 인간 이해를 교회의 사회 투신의 기초로 제시한다(53-55항).
3. 현대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에 나타난 발전관
1) 사회 정의 중심으로 구조화된 사회 가르침들
유럽 사회에서 나타난 발전 문제에 대한 응답
가톨릭 교회가 19세기 말부터 사회 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해서 성찰의 원리와 판단 기준, 그리고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전통을 형성해 왔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이 전통을 개막시킨 레오 교황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전한 발전이 성취되었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발전관을 갖고 있다. 그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변화의 근원이고 완성”이시다. 그리스도교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세계 안에서 인간 사회와 인류의 발전을 이루어 가는 신앙 공동체이다. 이 그리스도 공동체가 서구 사회에서 그동안 “도덕적인 죽음으로부터 도덕적 삶에로의 소생”을 통하여 “일찍이 전혀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더없이 완벽한 발전”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이다(20항). 그렇기 때문에 “만일 세상의 죄악을 척결하는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그리스도교적 제도로 되돌아가는 길밖에는 없”다고 말한다(20항).
그러나 이것은 개인이나 단체, 혹은 국가의 역할을 간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레오 교황은 노동조합의 역할을 진술하는 맥락에서 옛 시대부터 조합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상부상조하는 가운데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기술의 발전을 향상시켜 왔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34항). 이것은 개인 역시 다양한 사회적 투신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와 인류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을 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개인과 단체들이 문화와 생활의 발전과 변화에 따라 적응해야 할 과제 역시 직시하고 있기도 하다(같은 곳).
뿐만 아니라 레오 교황은 공동선의 관점에서 국가의 역할을 보면서, 국가의 존재 이유는 사회와 개인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국가의 통치자들은 우선 모든 법과 정치 제도들을 총괄적으로 또 균형 있게 운용하여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복리가 자연스럽게 증진되도록 국가를 다스리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23항). 그런데 정부가 이렇게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경제 사회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경제적인 차원에서 “정의의 실천, 조세 공과금의 적절한 부과와 균등한 배분, 상공업 및 농업의 발전” 등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특히 도덕적인 사회 관습, 건전한 가정 생활, 열심한 종교 생활” 등 삶의 영적인 차원을 함께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3항). 이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발전의 완성 형태가 도달하였으며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발전의 충만한 상태가 성취된다는 그리스도교 중심 발전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발전 문제의 지평 확장: 유럽에서 세계로
비오 11세는 <40주년.에서 먼저 레오 13세가 자신의 회칙, <새로운 사태>를 통하여 이룩한 노동자들의 복음화 노력의 결실 가운데 일부를 이렇게 집약한다:
노동자의 마음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불어넣기 위한 이 지속적인 노력은 동시에 그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존엄성을 크게 각성하도록 해주었다. 그들의 지위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를 분명히 인식시킴으로써, 그것은 그들에게 합법적이고 진정한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동료 중에서 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 교황의 호소에 부응하여, 선행과 자선 사업이 교회의 지도 아래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흔히 사제의 지도 아래, 새로운 단체들이 계속 증가하였으며, 그 단체들 때문에 노동자, 장인, 농부, 각종 임금 노동자들이 서로 도움과 원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11항).
각국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책임을 크게 각성하여 더욱 광범한 사회 정책을 펼 뜻을 굳혔다. ... 교황 레오 13세의 가르침을 철저히 체득한 성직자들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많은 최근의 법률들이 의회에서 표결에 부쳐지도록 최초로 제안하였고 통과된 후에도 세심한 배려로 그 집행을 촉진하고 장려하였다. 이러한 한결같은 꾸준한 노력의 성과로 전 시대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법률의 분야가 발생하였는데, 그 목표는 인간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엄성에서 생겨나는 노동자의 신성한 권리의 효과적인 보호이다. 이 법은 정신, 건강, 체력, 주거, 작업장, 임금, 위험한 일 등 한마디로 말해 임금 노동자의 모든 관심사와 특히 부녀자와 어린이의 배려에 관심을 갖는다(12항).
교황 레오 13세의 의도를 철저하게 수행하려는 열성을 가진 성직자와 많은 평신도들이 그러한 단체의 창립을 위하여 도처에서 놀라운 열성으로 헌신하였으며, 그 단체들은 그 나름대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노동자들의 집단을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다행히 자기 직종에서의 성공적 역할과 깊은 종교적 확신을 잘 결합시켰다. 즉, 그들은 현세적 권리와 이익을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수호하면서 동시에 정의에 대한 마땅한 존중과 다른 계급과 협력하기 위한 성실한 열망을 갖는 법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체적인 사회적 삶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쇄신할 길을 준비하였다(14항).
비오 11세는 이러한 의의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상황에서는 어떻게 발전적으로 사회에 체현될 수 있을까를 질문하고 그 답을 <40주년>에 담아 놓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지나고 세계 경제 공황 상태를 체험하면서 서구 식민지배 국가들과 서구 밖에서 식민지배를 당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발전이 상이하게 체험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단적으로 그는 사회의 발전이 가져오는 결과가 서구와 서구 밖의 세계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그는 레오 교황의 공동선의 향상에 복무할 발전의 의무를 서구 국가들에게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던 이른바 제3세계권에까지 확장할 비전을 언어화해 간다. 이를테면, 비오 교황은 무산자가 양산되는 국제 경제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크고 발전된 국가에서는 이제는 노동자 계급이 보편적으로 비참과 곤궁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근대적 기계와 산업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일반화되었어도, 새로운 식민지 국가와 극동의 옛 문명국에서는 재산을 빼앗긴 노동 대중이 대단히 많이 증가하였고 그들의 울부짖음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고 있다. 더구나 거대한 농촌 임금 노동자들이 있으며, 그들의 처지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고 또한 그들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장만할 수 있는’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다”(29항).
비오 교황은 이같은 빈부차를 “산업 시대”의 불공정으로 인식한다. 그런 가운데 노동자들이 “절약으로 재산을 늘리고 그것을 현명하게 관리하여, 무산자의 숙명 같은 호구지책의 위협에서 해방되고 한층 더 안락하고 안정되게 가족에 대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사회적’ 투신을 요청한다(29항).
2) 사회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발전
발전 문제에 대한 교회의 첫 체계적 응답
레룸 노바룸 반포 70주년을 맞는 1961년에 요한 23세가 <어머니요 스승>을 발표한다. 이 문헌은 교회가 사회의 발전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점에서 식별하고 건강한 발전의 길을 공식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작품이다. 요한 교황은 선임 교황들이 회칙을 발표할 때와 달라진 시대 상황을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읽어 내면서, “인간 진보의 법칙과 경제 발전의 과정을 인정하고 또 거기에 순응”할 필요성을 제기한다(63항). 그런 가운데 그는 새롭게 나타나 온 발전상을 분야별로 정리하여 제시하는데, 아래에 이를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먼저 과학과 기술과 경제 분야에서 나타난 “발전” 포인트를 원자력과 화학 합성물 생산, 생산의 자동화 등의 기술 혁신과 서비스 분야의 자동화, 농업의 근대화, 통신 특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거리 극복, 교통 발달, 우주 산업 발달 등에서 보고 있다(47항; 60항도 보라). 이어서 사회 분야에서는 사회 보장 제도와 노동자들의 의식, 교육의 확대와 이에 따른 시민들의 의식 향상, 사회 문제 각성 등과 관련하여 발전 현상을 포착하고 있다(48항).
그는 다시 정치 영역으로 관심을 돌려서 새로운 발전상을 이렇게 진술한다: “많은 나라들에서는 각계각층의 많은 시민들이 공적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오늘날 국가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경제 사회 문제에 간여하고 있다. 오늘날 식민 통치 체제를 축출한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들은 자국의 법률과 제도에 따라 독립 자치를 하고 있다. 민족들간의 상호 관계가 증대될수록 그로 인한 상호 의존성이 증가하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개별 국가의 목표나 이해를 초월하여,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문제 그리고 민족들의 상호 관계 등을 논의하며 모든 민족들의 이익을 모색하는 집회와 회의들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49항).
하지만 이것은 요한 교황이 당대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던 사회적 제약과 한계를 모른다거나 간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위에서와 같은 발전상을 적시하면서도 이와 더불어 “사회, 경제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많은 나라들”이 자국 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한계들을 이렇게 진술한다: “한편으로는 농업과 공업과 공공 서비스의 불균형, 그리고 동일한 국가의 지역간 경제 불균형, 그리고 세계적인 규모로 보아 국가간의 경제 자원의 불균형이 증대되고 있다”(48항; 62항과 70항, 94항, 123-146항 등도 보라). 그리고 바로 이렇게 달라진 시대상을 배경으로 “레오 회칙의 공적을 기리며, ... 선임자들이 전해준 가르침들을 확인하고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동시에 현대의 새롭고도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는 것이다(50항).
이런 관점에서 교황은 먼저 경제 개발과 사회 발전의 균형을 이루는 데 요청되는 사회 정의의 원리를 역설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경제 성장에는 언제나 사회 진보가 수반되어야 하고 동시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하여 국부의 증대로부터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공평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73항; 112항도 보라). 이것은 기본적으로 모든 발전이 공동선에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교황은 이와 관련하여 국가 차원에서 요청되는 사항을 이렇게 진술한다: “최대 다수 노동자의 고용, 국가 사회는 물론 노동 계층 자체의 특권층 형성 방지, 임금과 물가의 균형 유지, 최대 다수가 활용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재화와 서비스의 제공, 그리고 농업, 공업, 서비스 등 경제 분야간 불균형의 완전 제거나 최소화, 경제 성장과 공공 서비스 발전의 균형 특히 공권력의 활동을 통한 균형 도모, 과학 기술의 발전에 적응하는 생산 수단의 개선, 마지막으로 현시대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행복도 조망하는 더욱더 인간다운 삶의 번영”(79항).
교황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학과 정치와 사회 발전에 근거하여 보다 더 긴밀하게 연계된 세계 구조에 근거하여 공동선을 전지구 세계 규모에서 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것은 비오 교황이 서구의 발전을 서구 밖 세계에까지 확장할 것을 요청한 것을 좀더 철저하게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는 “경제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의 상호 관계”를 당대에 가장 중대한 문제로 본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모든 재화가 충분하고도 풍부한 나라들은 국민들이 빈곤과 기아로 뒤덮인 국내 문제에 시달리며 인간 고유의 당연한 기본권조차 누릴 수 없는 다른 나라의 곤경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고 천명한다(157항). 이에 “전세계 인류 사회의 공동선”의 관점에서 “부의 증진을 추구하는 국가간 경쟁의 불신 제거, 경제 분야의 상호 융화와 우호적이고도 유익한 협력 증진, 마지막으로 경제적 저개발 국가들의 발전을 위한 효과적인 원조 제공” 등이 요청된다는 점을 지적한다(80항; 153-185, 200-202항도 보라).
우리는 여기서 요한 교황이 세계 차원의 공동선을 국제 사회의 정의와 평화와 통합하여 좀더 집중적으로 조명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이런 필요성에 좀더 충실하게 응답하기 위하여 이 문헌을 발표하고 나서 불과 이태 후에 모든 민족들의 평화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의 마지막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아래에서 <사목헌장>과 특히 <민족들의 발전>을 통하여 이 문제를 좀더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개방성에 근거한 <사목헌장>의 발전관
요한 23세가 발표한 <어머니요 스승>은 이때까지 발표된 사회 가르침 가운데 가장 명시적으로 현대 문화와 사회 현실을 발전이라고 하는 긍정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응답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사회와 문명이 안고 있는 제약과 한계, 그 폭력 구조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자신의 노동과 지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할 능력이 발생시킬 축복의 깊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교황의 기본 관심을 반영한다. 요한 교황의 세계에 대한 개방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영성적, 사목적 기초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참으로 바티칸 공의회 회기 4년에 걸쳐서 현대 세계에 자기를 개방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세계에 신선한 비전을 선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젊어지는 축복을 구가하였다.
사목헌장은 이런 개방과 소통을 배경으로 하여 태어난, 교회의 사회 가르침의 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헌장은 무엇보다도 현대 문화의 가치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와는 물론 인간 삶의 조건 개선과 연관지어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인간이 세기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력해 온 이 거대한 노력이 그 자체로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한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명백한 일이다. 과연,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 우주를 하느님께 바쳐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 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이 명령은 또한 일상 노동에도 적용된다.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34항).
하느님의 창조가 우리의 삶의 구조와 갖는 상관성에 대한 이같은 건강한 인식이야말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회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발전관에서 핵심 전거로 작용한다. 이것은 또한 이보다 뒤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생태적 발전 인식의 신학적, 영성적 기초가 되기도 한다. 2000년의 역사를 통하여 교회는 이미 여러 문화와 소통하면서 복음을 육화하기 위하여 문화를 활용하고 완성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빛을 매개해 왔다(58항). 이것은 단순히 교회가 지역 문화에 대해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지역 사회 문화에 복음적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의 역사에서 생성되어 온 학문의 진보와 여러 문화의 발전에서 교회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44항; 62항도 보라). <사목헌장>은 하느님의 창조 계획 안에서 교회가 인류 문화와 소통함으로써 도달할 축복의 깊이를 이렇게 증언한다.
철학, 역사, 수학, 자연과학 등 여러 가지 학문에 전념하고 또한 예술에 헌신할 때, 이로써 인류 가족이 진선미에 대한 더욱 높은 개념을 가지고 보편적 가치를 지닌 판단에 도달할 수 있도록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만물을 함께 정돈하시고 땅 위에서 노시며 사람의 아들들과 함께 계시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신 놀라운 지혜에 의하여 인간은 밝게 비추어 질 것이다(57항).
<사목헌장>은 이처럼 신앙과 문화 발전의 상호 소통 가능성과 축복을 있는 그대로 수락하는 가운데 먼저 모든 인간이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참된 발전을 위하여 기여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확인한다(65항; 60항도 참조).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하느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이 꽃필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에 대한 희망이 간직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현세적 발전이 새로운 인류의 성장과 관련되어 있는 한, 사회의 발전은 하느님의 나라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가치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통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목헌장>의 기본 입장이다(39항; 38항도 참조).
이런 토대 위에서 <사목헌장>은 단적으로 “경제 발전은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점과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소수에 의하여 경제력이 지배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65항). 근본적으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하며, 각자의 소유물을 “자신에게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도록 사용”할 공유물이다(69항). “빈곤의 극을 겪고 있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타인의 재화에서 취득할 권리를” 가지며,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그대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항). 이것은 사랑의 법 안에서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로 연대하는 복음적 일치와 친교의 깊이를 증거하는데,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관점은 <민족들의 발전>에서 세대간의 연대와 공유 비전으로 승화되어 간다.
<어머니요 스승>에서 피력한 가난한 나라들의 발전 문제를 세계의 평화와 연관지어 성찰한 <사목헌장>은 나라들 사이의 불화의 원인을 “과도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 대책의 지연”에서, 그리고 “지배욕과 인간 경멸”에서 찾는다(83항). 그러므로 발전한 나라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무기를 개발하는 데 악용하면서 발전을 왜곡하고 경제적, 정치적 지배를 위한 도구로 전도시키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79-81항). 또한 정의의 실현으로서 평화(78항)를 국제 사회 안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민족들 사이의 상호 의존 관계를 구현하는 가운데 발전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 사이의 협력 비전을 제시하였다(84-86항). 이를테면, 가난한 나라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력과 재능에서 시작된다는 확신을 가질 것과 발전한 나라들의 지원과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원의 정의로운 분배, 가난한 나라들의 무역 지원, 끝으로 물질적 지원을 정신적 향상에 조화시킬 것 등을 제안하고 있다.
<민족들의 발전>에 나타난 발전관: 세대간의 연대를 통한 지속 가능한 발전 비전의 발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결한 바오로 6세는 1967년에 <민족들의 발전>이라는 회칙을 발표한다. 이것은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에 이어서 회칙이라는 권위있는 사목 행위를 통하여 발전을 복음의 시각으로 해석한 두번째 시도이며, 우리 교회가 발전에 관하여 가장 체계적으로 응답한 시도이다. 아래에서는 여기에 나타난 발전관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어머니요 스승>이 발전과 관련된 현안을 중심으로 교회의 입장을 밝히면서 사회 정의의 실현을 매개하고자 하였다면, 이 문헌은 발전에 관한 이성적 성찰과 복음적 실천을 통합하여 발전을 세계 평화에 이르는 길로 제시하고 있다. 교황은 이 회칙 첫머리에서 “민족들의 발전은 교회의 중대한 관심사”(1항)로서, 특히 가난한 나라들의 발전을 증진시키고 국가간의 사회 정의를 고취할 교회의 사명을 밝힌다(5항). 교황은 자신의 이러한 관심을 회칙의 결론부에서 다시 확인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국가들 사이에 개재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불균형이 지나치면 긴장과 불화가 생기며 드디어 평화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본인이 평화를 위해서 국제 연합을 방문하고 여행에서 돌아와 공의회 교부들에게 말한 바와 같이 “발전 도상에 있는 민족들의 처지야말로 우리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세계의 무수한 빈민들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은 더욱 진실하고 더욱 효과적이며 더욱 적극적인 것이라야 하겠다.” 우리가 빈곤과 부조리를 거슬러 싸우는 것은 결국 인간의 물질적 행복과 정신적 내지 윤리적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전인류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려는 것이다(76항).
교황은 이 회칙에서 발전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비전을 정리하여 제시하면서, 먼저 발전을 모든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내재된 열망으로 이해한다. “하느님의 계획대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발전시키도록 태어났다”는 것이다(15항; 14항도 참조). 그는 인간을 하느님께 부여받은 당신의 창조에 참여할 능력으로서 노동을 통하여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성숙시켜 갈 존재로 이해한다.
그런데 발전은 단순히 경제적 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고 진정한 발전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동시에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차원들을 포용해야 한다(14항). 만일 물질 재화를 탐하는 데서 그치는 발전이라면, 그것은 “인격의 정상을 방해할 뿐 아니라 인격 본연의 위대성에 위배”되기조차 한다. 오히려 “탐욕이란 병폐에 걸린 개인이나 국가는 도덕적으로 덜 발전하였음을 명백히 보여준다”는 것이다(19항). 이것은 발전이 경제성과 함께 윤리성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우리는 아래에서 이 주제를 좀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바오로 6세는 발전이 참된 것이기 위해서는 개인과 인류 모두의 선을 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14항; 20항도 참조). 이것은 발전이 개인 차원에서 요청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선에 부응하는 것은 물론, 민족과 지역, 그리고 종교의 경계까지 넘어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공동의 선익을 포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가 발전을 위한 연대에 참되고 유익한 진보를 촉진할 사도로서 가톨릭인들은 물론, 다른 교파와 다른 종파인까지,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포함한 모든 선의의 사람들 역시 초대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81-86항).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류의 범위는 단순히 동시대인들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포괄한다. 이를테면, 이런 유형의 전인류의 공동선 개념은 세대와 세대의 연대를 통한 발전의 지속 가능성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민족들의 발전 17항에서 바오로 교황은 발전의 공동체적 사명을 일깨우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모든 사람이 인류 사회 전체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사명을 띠고 있다. ... 우리는 전 세대의 계승자로서 동 세대 동료들의 협력으로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은 뒤에 인류 가족을 계속 융성케 할 후대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수는 없다. 전인류의 상호 유대는 한가지 사실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이익을 줄 뿐 아니라 또한 의무도 낳아 준다.
이를테면 참된 발전은 근본적으로 각 개인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존중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올 세대를 포함하여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갈망들을 이들의 삶에서 성취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 달려 있다. 이는 바오로 교황이 하느님의 창조 질서와 인류의 선대, 현대, 후대의 연대와 협력의 관점에서 적어도 비명시적인 형태로 지구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하여 나름대로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같은 세대간의 정의와 연대의 관점에서 볼 때, 바오로 6세가 발전이 인류 사회의 정의와 평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가난한 나라들의 부르짖음에 특히 부유한 민족들이 귀기울일 사명을 밝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2-3항, 48항 등 참조). 교황은 산업화를 먼저 이룬 나라들이 국가간의 연대의 틀 속에서 가난한 나라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것을 호소한다(48-49). 또한 부국들의 과도한 경제적 불의에 직면하여 한편으로는 폐쇄적인 민족주의는 극복하면서도 민족의 자결을 통하여(62-65항과 48항), 그리고 부유한 나라들의 건강한 대화와 협력을 통하여 폭력적인 관계를 극복할 것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58-61항; 43-44항 등도 참조). 바오로 6세는 이러한 전망 속에서 사회 정의와 인류의 연대를 토대로 한 발전과 이를 위한 국제적 협력이 세계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이에 교황은 결론부의 제목을 이렇게 설정한다: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이다.”
3) 진정한 발전에 대한 관심에 통합된 생태 문제
진정한 발전관의 변천
처음으로 발전을 주제로 회칙을 발표한 요한 23세부터 위에서 본 <민족들의 발전>을 발표한 바오로 6세는 물론, 오늘의 베네딕토 16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지속적으로 진정한 발전에 관하여 복음적으로 응답하고자 노력해 왔다. 요한 23세는 이미 <어머니요 스승>에서 명시적으로 “경제가 발전한 나라들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올바른 가치 체계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들은 “과학 기술과 경제의 진보를 열렬하게 추구하는 동안,” “대부분 자기 인생의 최고선으로 여길 만큼 외적 재화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176항). 이것은 요한 교황이 본 물질과 영혼 사이의 “중대한 위험”과 직결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현대의 인간들은 자연 법칙을 더 깊이 더욱 널리 탐구하여 왔다. 그들은 자연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도구를 발명하였으며, 거대하고도 참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고 또 끊임없이 이룩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 세계를 지배하고 또 이를 다른 형태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하여 영육의 힘을 소진시킬 수도 있는 위험에 빠져들고 있다(242항).
이런 비판적 발전 인식에 근거하여 요한 교황은 경제적, 과학적, 문화적 발전을 인간 존재의 최선의 목적에 통합할 필요성을 이렇게 진술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거기서 유래하는 번영 그 자체는 선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이는 또한 인류 문화 진보의 표징으로 보아야 한다고 교회는 언제나 가르쳐왔으며 또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교회는 이러한 종류의 선은 그 본질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즉 인간이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 안에서 스스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최선의 목적을 더욱 수월하게 추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의 위치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친다”(246항).
참된 발전에 대한 이같은 관심이야말로 사회 가르침의 근본 주제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레오 교황은 이미 <새로운 사태>에서 가톨릭 노동자들이 “종교 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사회 조직에 가담하든가” “종교에 바탕을 둔” 가톨릭 노동 단체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힘을 규합하고” “불의와 견딜 수 없는 탄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든가 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37항). 이것은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 영성과 갖는 관계를 질문할 것을 요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기풍은 <사목헌장>은 물론 이후에 발표된 모든 대사회 가르침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바오로 6세는 이런 관점에서 <민족들의 발전>에서 인간 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원인을 영의 단절에서 파악한다: “병의 원인은 자연 자원이 감소되었고 그나마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한 데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간의 형제적 사랑의 유대가 끊어진 데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66항).
특히 위에서 살펴본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아서 <사회적 관심>을 발표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주제를 가장 집중적으로 다룬 교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전체 7장으로 구성된 이 문헌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진정한 인간 발전”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는 여기서 발전이 자동적이고 무한정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27항). 그런 가운데 현대 세계에는 “용납할 수 없는 저개발”과 “용납 못할 초발전”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주시한다(28항; 14항과 31항도 보라). 저개발은 “어린이와 성인과 노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빈곤의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현실(13항)의 경제 사회적 원인이 되어 형언하기 어려운 참상을 낳는 것으로 인식된다. 여기에 반해서 교황이 말하는 “초발전”이란 다음과 같은 사회 현실을 가리킨다.
초발전이란 일정한 사회 집단을 위해 온갖 물질 재화를 지나칠 정도로 확보해 주는 것으로 성립되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자칫하면 ‘소유’의 노예, 즉각적인 충족의 노예로 만든다. ... 이것이 이른바 ‘소비’의 문명 또는 ‘소비주의’라고 하는 것으로, 버리고 낭비하는 것으로 소일하게 만든다(28항).
이런 초발전 소비 문명이 낳는 결과를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이미 소유하고 있지만 더 좋은 무엇에 의해서 그 지위를 빼앗긴 물건이 있다면 그냥 처분해 버리고 그 물건이 영구적인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나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려에 넣지 않는다. ... 광고의 홍수와 끊임없이 쏟아지고 유혹하는 상품의 홍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 한, 인간은 소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욕망이 더욱 커진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기에 이르고, 인간의 깊은 염원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고 아마도 오히려 질식되어 감을 느끼게 된다”(28항).
이를 극복할 진정한 발전은 요한 바오로 2세에게서 개인과 사회, 그리고 민족 내부와 국제 관계 차원에서 경제적인 동시에 인간적이고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차원들을 포괄하며 세대간의 연대 차원까지도 포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33항).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앞에서 검토해 온 작업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따로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발전과 생태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자각
그런데 진정한 발전 의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위에서 본 <사회적 관심>에서 매우 중요한 발전 현상을 만나게 된다. 앞서 <민족들의 발전>의 발전관을 검토할 때, 바오로 6세가 하느님의 인류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지구의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하여 나름대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여전히 인간 중심으로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을 뿐, 아직 생태 문제나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관심을 명시적으로 주제화하여 다룬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진정한 발전을 성찰하는 이 맥락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분명하게 이른바 “생태적 관심”을 천명한다(26항).
교황은 진실한 발전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위에 기반을 둔 사랑의 문명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33항). 그러면서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우주 만물이 존중받아야 할 이유를 개발의 윤리적인 차원과 연관지어 세 가지 관점에서 검토한다(34항). 그는 창조물이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기회에 우리가 그동안 자연과 맺어온 관계를 “주의 깊게 반성”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첫째,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 동물, 식물, 자연 요소들 - 다양한 종류의 사물을 인간이 자기 원대로만, 자기의 경제적인 필요에만 의거하여 사용할 수는 없으며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자각”을 요청한다. 이런 자각 위에서 이제는 “각 사물의 본성과 그것이 질서 있는 체제, 정확하게 말해서 ‘우주’에서 차지하는 상호 연관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른바 “자연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며 자연물 가운데는 “재생이 안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마치 절대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또 절대 지배권을 가진 것처럼 사용”할 경우 “그것들의 이용도를 위태롭게 만들며, 현세대에게만 아니라 다음에 올 세대에까지 그 이용 가능성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산업화의 결과로서, 이른바 발전한 나라들이 전세계적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게 환경의 오염이 조성되고 그것은 주민의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개발과 발전을 시도하는 데 요청되는 도덕적 기준을 창조 질서와 동시대 인간 사회, 세대와 세대 사이, 그리고 인간과 다른 창조물 사이에 설정할 필요가 절박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황은 창세기 2장 17절의 금령을 전거로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지배는 절대권이 아니며, 따라서 ‘선용하든 남용하든 자유다’라는 말을 못할 뿐더러, 사물을 자기 좋을 대로 처분한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리어 이것은 우리에게 “자연계를 대할 적에 그 생태학적인 법칙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법칙에 귀속됨을 분명하게 보여주”며, “이를 위반할 적에는 반드시 징벌이 따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위에 오른 바로 다음해에 첫 사도적 권고, <인간의 구원자>를 내면서, 구원과 창조를 통합하여 바라보도록 이끄는 가운데, 하느님의 창조계의 신음에 귀 기울이며 이렇게 묻는다:
20세기에 사는 우리야말로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과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 사도의 웅변적인 말씀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별히 금세기에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영역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거창한 진보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보이고 있지 않은가? 급속한 공업화 분야에서 빚어지는 자연 환경 오염의 위협이라든가, 끊임없이 거듭거듭 발생하는 무력 충돌이라든가, 원자탄, 수소탄, 중성자탄과 이와 유사한 무기들의 사용으로 자멸할지도 모르는 전망 등 몇 가지 현상들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새 시대를 맞는 세계, 우주 여행의 세계, 과학과 기술 공학적으로 일찍이 없었던 성과를 달성한 세계는 동시에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세계,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세계가 아닐까? (8항)
교황은 하느님의 자녀가 온 창조계의 신음에 응답하여 자연과의 관계에서 수행할 역할을 이렇게 피력한다: “창조주의 뜻은 인간이 현명하고 기품있는 ‘주인’이자 ‘보호자’로서 자연과 통교(通交)하는 것이지 ‘착취자’나 ‘파괴자’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15항).
교황은 <백주년>에서 인간이 이렇게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이유를 “소유와 향락”에 대한 집착에서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간학적 오류”와도 연결짓는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는 가운데, 자신의 “노동이 언제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물들의 원초적 선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는 것이다(백주년 37).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며”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고 자연을 다스리기보다는 학대”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같은 과신과 자연에 대한 의존성에 대한 무감각에 기인하는 것이다(같은 곳).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포용하는 형태로 발전관을 제시하기까지 선임 교황들의 의식화 과정이 없지 않았다. 예컨대, 바오로 6세는 <팔십주년>에서 자연 파괴 현상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면서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킨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갑자기 의식하게 되었다. 스스로 자연을 불법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파괴할 위험에 직면하고 인간 스스로가 도리어 이런 타락의 희생물이 될 위험도 없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의 타락과 폐물, 새로운 질병과 전면적 파괴력 등과 같은 물질적 환경의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체계마저도 이제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여서 감당할 수도 없는 내일의 생활 조건을 스스로 장만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이것은 전인류 가족에 관계되는 광범한 사회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새로운 전망에 관심을 모으고, 이제 공동 운명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나누어져야 하겠다(21항).
자연의 훼손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같은 해에 발표된 <세계정의>에서도 나타난다. 이 문헌의 저자들은 이같은 현상이 나타난 원인을 좀더 명시적으로 산업화와 소비주의와 연결지어 파악하면서 그 파국적 미래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자본주의 국가이건 사회주의 국가이건, 부강한 국가들의 천연 자원과 에너지에 대한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그 대량 소비의 결과로 끔찍한 폐기물이 대기와 해양을 더럽히고 있으므로 지상 생명 유지에 필수 요소인 공기와 물이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파괴되고 있다. 이 같은 대량 소비와 오염 현상을 그대로 증대되게 방치한다면 공해는 전인류에 미치게 될 것이다”(11항).
이런 가운데 이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공해 문제를 유발한 선진국들이 앞장서서 정의롭게 그 회복을 꾀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선진국들의 물질적 욕구가 다른 국가들을 빈곤에 떨어뜨리고 혹은 지구상의 생명체를 전멸시킬 수 있는 오늘의 한경 속에서, 선진국들이 요구되는 물질을 증가시키려는 권리를 과연 어느 정도 주장할 것인지는 예측을 불허한다. 이미 부요해진 나라들은 대량소비를 억제하고 한층 검소한 생활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인류의 공동 유산인 물질과 생명을 인류 전체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누려야 할 절대적 정의의 요청에 따라, 이 유산을 파괴하지 말아야 하겠기 때문이다(64항).
1970년대를 전후하여 이렇게 보다 더 명시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하느님의 창조 세계 전체와 발전의 상관성에 대한 성찰은, 위에서 본 것처럼,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역동적으로 개진되어 갔다. 그리하여 교황은 <사회적 관심>과 <백주년> 이외에도 여러 기회에 현대 사회가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해결해야 할 생태 문제에 관하여 신앙인은 물론 전세계 공동체에게 진술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으로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을 맞이하여 발표한 메시지, “하느님 창조자와의 평화, 온 창조물과의 평화”를 들 수 있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대륙별 주교대의원회의에 대한 응답에서 끊임없이 지역 사회의 특성에 부합한 형태를 견지하고자 하는 가운데 인류 사회의 진정한 평화와 발전을 지역 사회의 생태 문제와 연관지어 성찰하고 그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교황은 2001년에 발표한 교서 <새천년기>에서도 생태 문제를 이 시대의 위기 가운데 하나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고(51항), 2002년 6월에는 그리스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와 생태 윤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하기도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를 계승하여 교황위에 오른 베네딕토 16세는 아직 회칙이나 교서와 같은 권위있는 방식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현대의 생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지속시켜 가고 있다. 예컨대, 베네딕토 교황은 2007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인간 생태학”과 “사회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자연 생태학”이라는 개념과 연결하여 세계 평화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 지지 관계를 지향하며 “평화 생태학”을 주창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교황은 복음적 생태 비전을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서 비롯하는 평화의 원천이자 동력으로 자리잡게 하면서, 인간의 존엄과 자연 존중, 인간 관계로서 사회의 건강한 존립을 이루어 갈 인간 사회의 기본 과제를 지시한다. 또한 2008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를 통해서는 “하나의 공동의 집”이라는 관점에서 인류 사회가 지구를 함께 돌볼 책임과 사명을 일깨우고 있다.
4. 맺는 글: 하느님의 창조 중심의 발전관을 그리면서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 전통을 개관하고, 이 전통의 핵심을 구성하는 문헌들을 중심으로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발전관을 개관하였다. 이어서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과정을 따르면서 100여년의 역사 중에서 시대별로 형성된 발전관의 독특성을 살펴보았고, 끝으로 진정한 발전관을 검토하는 맥락에서 20세기 후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생태적 발전 비전을 돌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일정하게 드러났다고 보는데, 현재까지 교회가 최고의 권위를 통하여 발표한 문헌들에 담긴 비전을 놓고 볼 때, 우리 교회는 인간 중심 발전론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황들은 무엇보다도 인간 중심 사회 정의와 평화의 틀에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바라본다. 이같은 현상은 특히 19세기말의 레오 13세와 20세기 초에 40주년을 발표한 비오 11세에게서 좀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다가 요한 23세와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고 나서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면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명시적으로 발전관에 수용되는 가운데 인간 중심 사고가 도전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 가르침에서는 설령 생태계의 문제를 발전에 통합하여 접근하는 경우에도 첫째, 인간을 창조의 중심에 놓고 접근하면서, 둘째, 하느님의 창조물이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로 인식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그 결과 일정하게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할 필요와 그렇게 할 의지를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인간 중심으로 세상 만물을 바라보고 인류의 발전을 기획하며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 행위는 하느님의 계획과 이끄심 안에서만 비로소 가장 충만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발전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것이고, 인간은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발전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발전은 인간 중심이 아니고 하느님 중심이며, 하느님의 사랑 중심이고 하느님의 역사(役事) 중심이다. 이 중심을 우리의 신학과 영성과 사목에서 바로 찾을 때, 그동안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창조사를 구세사와 떼어놓고 그리고 다시 구세사 중심으로 신앙 실천을 기획하며 그 구세사도 사람 중심으로 “구인사(救人史)화하였던 한계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지속되는 창조의 역사를 우주를 포함한 진정한 구‘세’사(救世史)와 통합하여 창조로서 구원과 구원으로서 창조를 회통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틀 안에서는 창조 만물과 인간의 관계도 더 이상 단순히 인간 중심으로 기획되는 데서 그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 중심으로,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의 미션 중심으로 그 관계를 재구조화를 펼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창조 만물은 단순히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단계에서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심지어는 인간 없이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께 찬미가 되고 영광이 될 수 있는 존재로 바로 인식되기에 이를 것이다. 그것들 역시 이미 하느님의 명에 따라 생명을 얻고 존재를 얻어 이 세상에 한 실체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창조 만물이 사람에게 선물인 것은 인간이 그것들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것들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다 더 건강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달라진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를 우리로 있게 하는 그 창조 만물이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보다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저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과 위대하심을 함께 찬양하며 그분 안에서 함께 춤출 생태적 동반자를 창조 만물 안에서 아름답게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