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88만원세대 새판짜기"라고 부르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난잡한 서술 방식, '카더라' 식의 불분명한 근거 제시 같은 우석훈 박사 특유의 글쓰기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책이 가리키는 방향 자체가 의아하다. "학자"가 썼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책이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의아함을 말하기에 앞서 내용을 요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1) 군인 영웅 시대와는 달리, 20대들은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2)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추해서 못 참겠다."라는 20대들의 "미학적 반감"이다. MB정부의 행태는 추하다.
앞선 꼰대들은 "자기가 쌓은 경험"만으로 "세상을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3) "수성 기간이 길면 아첨과 보신에 능한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지금은 공성 시대다.
4) 공성을 위해서도 진을 짜는 것이 필요하다. 20대 시민단체, 기초의원 선거 출마, 알바 노조를 제시한다.
5) 권리 선언문을 만들어보자.
우선, 20대에게 발견된다는 "미학적 반감"이라는 것이 희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미학적 반감"이란 건, 책 말미에 첨부된 대학생의 글에서 "20대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지적된 "쿨함"과 더 쉽게 연결되지 않을까? 어떤 조직이든, 두셋이 모이더라도 잡무가 발생한다. 연락하고, 약속을 잡고, 관계를 조정하고, 회의록을 작성하고..등등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누군가는 떠맡아야 한다. 귀찮고 꾸질꾸질해보이는 이런 일들보다는, 차라리 좀 외롭더라도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 소비자로 사는 게 훨씬 쿨해보인다. 세상 모든 일들을 차갑게 냉소하는 태도 역시 얼마나 섹시한가.
20대들에게서 이명박의 지지율이 낮은 이유에 "미학적 반감"이 큰 작용을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희망적인가? 시장논리의 과잉 속에서 과독점이 불러오는 역설적인 획일화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이라면 어느정도 희망적일 것이다. 이 골목이나 저 골목이나 별다른 차이없이 같은 가게가 배치되는 우리 시대가 미학적으로도 후졌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꽤 많다. 강압적이면서도 편협하게 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도 미학적으로 훌륭해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20대들의 "미학적 반감"이라는 것이 과연 그러한 성격의 반감인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대통령의 외모와 말투와 같은 면에 꽂힌 것이 아닐까? 나중에 외모가 출중한 대통령이 '디자인'같은 것을 들고 나왔을 때는 과연 희망의 근거로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석훈이 제시한 혁명의 방법론이 '희망의 근거'보다는 그나마 낫다. 냉소가 만연한 시대에 "그래도 이런 건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며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허술함 투성이다.
당장, 만명을 조직해서 20대 시민단체를 만든다는 구상부터가 그렇다. 저자는 20대들이 서로 불신하며 유리알처럼 모이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소위 '당사자 운동'이란 걸 할 단체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달에 얼마씩 모아서 활동가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형태라면 어느 정도 이상의 신뢰라는 기반이 필요하다. 닭이 먼저여야 할까, 달걀이 먼저여야 할까?
만일 몇몇의 영웅적인 헌신 덕분에 20대 단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고 치자.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우석훈 박사는 권리선언문을 낭독하자고 할 것이다. 그 뒤에는 주거권, 노동권, 교육권, 보건권이라는 이른바 '4대권리'에 천착하여 활동하면 된다. 하지만 20대는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비록 비슷한 고민을 하더라도 필요 정도의 차이는 상당할 것이다. 주거권과 보건권이 그나마 아우를 수 있는 범위가 크지만, 오히려 너무 커서 굳이 20대끼리 할 필요를 느끼기 어렵다. 노조와 관련된 언급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굳이 20대끼리 해야할 근거가 너무도 약하다. 차라리 기존 시민단체에 가입해서 20대 동아리를 조직하거나, '20대 문제' 분과를 제안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노조 역시, 새로운 '알바 노조'같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일 정력을 차라리 기존 노조의 변화에 쓰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미국 노조가 운영하는 Union Summer같은 형식의 양성프로그램으로 노조-대학생 간 친밀성을 높이는 한편 민주노총이 비정규노동과 예비 노동자들의 이익에 더욱 관심을 갖도록 압박하는 편이 여러모로 현실적이지 않을까?
이런 제안에 대해 우석훈 박사는 "그건 당사자 운동이 아니다."라고 반론할지 모른다. 이 책에서 우석훈은 '대리인 운동'과 '당사자 운동'을 구분한 뒤에,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는 것이 시대 변화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대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진짜 이유는 대리인 운동에서 당사자 운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배경이 될 만한 적절한 이론들을 갖지 못한 데서 생긴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학생운동에서 등록금 문제 등의 의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 비교적 최근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일면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 운동'이라는 것과 '대리인 운동'이라는 것이 칼로 무 베듯 분명히 나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등록금 문제만 하더라도, 각 학교 재정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의 교육 재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면 재정이 집중된 4대강 사업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이 운동을 '당사자 운동'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대리인 운동'이라고 불러야 할까? 국방 예산을 감축하기 위한 운동은? 한미 FTA 반대 운동은? 게다가 대학을 졸업했다고 가정했을 때,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기간이 길어도 6~7년 남짓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과연 당사자끼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문도 든다.
희망의 근거로 "미학적 반감"을 제시하고, "일단 만명만 모여보자"는 식의 허술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히피적 반문화의 한계 위에 놓여 있다. 기회가 될 때마다 68혁명의 로망을 언급하던 우석훈 박사의 책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는 <혁명을 팝니다>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반문화 운동'이 "거짓 반란일 뿐"이라며 힐난했다.
이들에 따르면 '반문화 운동'은 기존 좌파들이 진지하게 대안을 만들고자 고민했던 "사회규범, 법률, 관료조직 등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 중 많은 것들을 불신"하도록 하여 역설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 책은, 이러한 비순응적 개인들이 도리어 그들이 공격했던 소비사회의 훌륭한 소비자가 되기 쉽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68혁명이 어떻게 "육화된 신자유주의"를 만드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석훈은 "구좌파", "386" 등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를 공격하면서도 서구의 베이비부머 세대의 '반문화 운동'에 찬사를 보내는 셈인데, "생각대로해 그게 답이야"라는 모 대기업의 광고를 볼 때마다 후자의 한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상상하는 것, 이것은 비단 혁명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본의 욕망이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자신을 무한 확장하는 우리 시대에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운동의 한계를 "꼰대들이 편협해서"라는 식으로 "보고 싶은대로"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현실과 대안에 대한 분석은 언제나 냉철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또 한 번의 반복된 과거를 재현하거나 더 큰 냉소주의라는 역풍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우리는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한계를 딛고, 우리 사회와 세계의 운동이 남긴 한계와 결실들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을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첫댓글 약간 이의 있삼. 긴 글을 쓸 상황은 아닌고로... 나중에;;;;
이런식의 논리는 무를 자르기 앞서 단지 무를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자를까하는 고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일단 이 책에 의의는 무를 잘라보자에 있는건데..
'당사자 운동'과 '대리인 운동'은 무 잘리듯 예쁘게 잘리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석훈 박사가 무를 자르자고 했다고 "일단 잘라보자!"고 하는 것은 일방적 추종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우석훈 박사가 추종하는 바를 따르자.가 아니라 20대가 생각 하지 못햇던 바를 '혁명'이라는 무리한 단어로 라도 일깨워서 자신의 권익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게 하자. 라고 바라 보는게 더 낳지 않을까요? 또한 무잘리듯 예쁘게 잘리지않는 당사자 운동이기에 그 운동을 함으로써 대리인 운동 또한 일어날 수 있도록 하자 라고 바라 볼 수도 있습니다. '20대에게 지향해야되는 바를 제시한다.' 가 이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