삯꾼과 목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였습니다.
사나운 맹수나 이리가 나타났을 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양을 버려두고 도망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위기에 처하였을 때 대처하는 삶의 자세에 따라서
삯꾼과 목자가 판가름 되며 구별됩니다.
파선한 배를 승객과 함께 버리고 도망한 선장과 선원은
양의 탈을 쓴 삯꾼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침몰하는 배를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권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였던 공적인 구조 대책은 적폐, 그 자체였습니다.
해피아 관피아의 적폐는
생명의 안전이나 구조보다 이익이 우선되었습니다.
이단 교주의 사이비 적폐는
삯을 위하여 교훈하는 거짓 선지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가지로 사이비 이단과 유사 기독교, 기복과 무속의 인본주의 신앙은
이단 교주의 사이비 적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종교적 삶으로 넘치는 부를 창출하였다면 .....
사이비의 전형인 양의 탈을 쓴 삯꾼의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수 많은 청결한 목화자들도
삯꾼과 목자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합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역의 사명은
안정된 생계 유지를 위해서 또한 사역의 사명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순전한 사역의 헌신일지라도
선한 목자의 반열에 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청결한 양심의 선한 목회의 사역일지라도
선한 목자의 반열에 이르기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경지로 요원할 따름입니다.
선한 목자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남긴 메시야의 진정한 자화상입니다.
목회의 현장은 먹사라는 세상의 조롱과 그 비판이 말해주듯
사역이 하나님을 위한 봉사, 그 사명이라기보다 종교인이라는 직업이 세상의 인식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사역의 댓가는 수고의 댓가를 얻는
사이비적인 삯꾼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의 꼴을 먹이고 양의 젖을 먹는 목자의 순전한 삶일지라도
양의 탈을 쓴 삯꾼의 멍에를 벗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선포된 말씀으로 살았던 바울은
사도적 사명의 댓가로 겉옷이나 금과 은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함께 동역하는 자의 생계와 구제 등 선한 사업을 위해 일을 하였고
복음의 은혜를 입은 성도에게 물질적인 그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의 연보를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였던 바울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손수 일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성령의 전인 벽돌은 물질이 아니라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에 연결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성전 건축이라는 헌신을 유사 기독교인들이 기뻐하는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전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뜨린 하나님은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는 로만 카톨릭의 성당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성막을 대신하여 건축할려던 성전과 오늘날 교회당 건축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습니다.
다윗의 성전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약의 뿌리이지만
오늘날 많이 좌클릭된 교회당은 본질적으로 성령의 전을 멸시하는 사단의 회가 이닌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믿음의 봉사요,
신천지가 하면 사단의 소굴이라는 생각은 궁여지책의 자기 합리화일뿐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을 성령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외식의 교회당을 위한 성도의 충성과 헌신은
스데반의 복음적인 이해로 볼 때 사이비,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이비 행각을 하나님 나라 충성으로 가르치는 양의 탈을 쓴 삯꾼 목자는
결국 세월호 침몰의 배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삯꾼과 목자의 경계는
실로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도에서 좌클릭과 우클릭의 프레임이 우리 시대의 정치 성향이라면
삯꾼과 목자의 경계는 중도가 없고 좌우 프레임도 없습니다.
다만 양의 탈을 쓴 이리와 회칠한 무덤,
그리고 표리부동한 바리새인의 외식만 있을 따름입니다.
참되고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화 있을 진저"라는 심판의 메세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따라 선포된 말씀의 삶으로 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참된 성도는
위선과 외식의 교회당이라는 성전의 프레임에 갇혀
노예적 광신을 인본주의 무속 신앙의 열정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성령의 전을 거룩한 믿음 위에 사랑으로 건축하는 성도는
진리의 복음을 따라 선포된 말씀의 삶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으로 누릴 것입니다.
사무엘과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본받는다면
삯꾼과 목자의 경계지점에서 갈등하지 않을 것입니다.
☞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삼상12:3-4)
☞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