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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천 올레길 원문보기 글쓴이: 올레지기
이 길은 선조들이 걷던 <<옛길>>이며, 현장에서 느끼고 배우는 <<‘역사교과서 길’>>입니다. 조선시대 삶이 살아있는 ①낙안읍성을 시작으로, 낙안(군)팔경을 감상할 수 있는 ②옥산(망해당)을 지나 생태하천길인 ③낙안천과 벌교천을 거닐다가 보물 제304호인 ④홍교와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⑤태백산맥문학로, 좌. 우익 이념대립속 피의 현장인 ⑥소화다리를 건너 소설 ⑦태백산맥문학관에서 마침표를 찍는 8km의 구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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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흥미를 더해주는 것은 이 길이 조선시대에서 근. 현대사까지의 역사만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낙안군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낙안군은 100여 년 전인 1908년 까지 현 순천시와 보성군 사이에 있던 행정단위입니다. 일제침탈이 이뤄지던 초기, 강제로 폐군되고 지역민들은 세 곳 (순천시/보성군/고흥군)으로 분리 병합됐는데 해방이 된 후로도 그대로 고착화 돼 한 형제가 갈린 한반도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낙안(순천시)과 벌교(보성군)는 대표적인 곳이며 특히, 마을길과 좁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집과 농토가 갈리고 마을회관과 교회가 갈려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왕래마저 끊긴 ⑧원등마을은 분단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걸어서 2시간, 자전거로 30분, 그것도 모두 평야로 이뤄져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충분히 왕래할 수 있는 곳, 더구나 전국에서 ‘유일’하게 조선시대부터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까지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역사의 길.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해도 조건이 안 돼 못 하고 있는 실정에서 조성할 경우 전국에서 유일하고 특별해,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게 될 길이 왜 등한시 되고 있을까요? 바로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연간 150만 명 온다고 하는 낙안읍성민속마을과 매년 꼬막을 먹기 위해, 태백산맥문학로(관)를 탐방하기 위해 30만 명이 찾는다는 벌교가 한 곳은 순천시며 한 곳은 보성군이기에 서로 연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과 8km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낙안읍성민속마을에서 태백산맥문학관까지의 8km, 우리천올레길 조성은 그래서 민간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행정에서 할 수 없거나 안 한다면 우리 민간에서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하천을 청소하고 철쭉을 심고 오리를 방생하고, 행정에는 망해당을 복원하고 시민공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생태하천문화축제장과 홍교문화공간 조성을 건의하면서.....
인터넷 다음에 ‘우리천올레길’이라는 카페가 개설돼 있습니다. 애정과 관심으로 이 길이 조성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카페: 우리천올레길 cafe.daum.net/wooriolleda)
① 낙안읍성(민속마을):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줍니다. ② 옥산 망해당, 시민공원: 낙안(군)팔경을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건의) ③ 낙안천, 벌교천: 생태하천 조성, 생태하천문화축제장 조성 (건의) ④ 홍교: 민족의 다리 보물 제304호 홍교문화공간 (건의) ⑤ 태백산맥문학로: 일제강점기, 이념대립의 현장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⑥ 소화다리: 의로운 벌교 주먹의 시작점, 이념대립 피의 숙청 현장 ⑦ 태백산맥문학관: 분단문학(현실)의 완결편, 통일을 생각해 봅니다. ⑧ 원등마을: 분단된 한반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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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선시대 읍성 낙안읍성민속마을
낙안읍성 동문을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여느 지방 중소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색다름이 있다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야와 자연이 인상적이었다는 정도. 하지만 성곽 안으로 발길을 옮기면 그곳엔 우리네 선조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 핏줄임을 증명하듯 모두를 탯줄로 연결했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낙안군의 치소였다.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이 가장 잘 돼 있는 곳으로 이름나 있으며 아직도 주민들이 생활하는 살아있는 민속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1397년 김빈길 장군에 의해 최초로 토성으로 완성됐고 이후 석성의 모습을 갖췄다.
1410m의 성곽 안은 700여 년의 세월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4~5백년은 족히 되는 거목들도 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초가집이었고 한 번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집들도 즐비하다. 복원했다는 동헌도 그 느낌 그대로다.
그런데 낙안읍성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 못지않게 마음으로 봐야 할 것들이 많다. 먼저 성곽 남서쪽 가장 높은 곳, 빈기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밀려드는 왜구에 맞서 성을 쌓고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지휘를 했을 김빈길 장군의 의로운 애국정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심었다는 낙안객사 뒤편의 팽나무도 의미가 깊다.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모으고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낙안읍성에 들러 3일간 머무르면서 낙안의 유지들과 국운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며 심었다는 나무,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지내고 나무를 심은 곳은 이곳이 유일한 곳인 만큼 특별하다.
낙안읍성이 현재의 눈으로 보면 평온하지만 역사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숨소리가 가팔랐던 조선시대다. 낙안읍성을 쌓은 이유가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고 200여 년이 지난 후 왜란을 준비했던 곳이며 또, 300여 년이 지난 후엔 그 왜구들에 의해 폐군됐기 때문이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② 낙안(군)팔경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옥산 망해당 시민공원
낙안읍성 남문을 나서면 멀리 뾰쪽한 산하나, 고흥의 길목을 지키는 첨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그리고 살짝 우측으로 비켜 앉은 해발 68m의 옥산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나를 유혹한다. 낙안읍성 남문에서 곧게 뻗은 직선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산, 옥산.
옥산은 순천시 낙안면 옥산마을앞에 있는 산으로 넓은 낙안평야 중앙 부근에 유일하게 솟아있는 작은 동산이다. 작고 앙증맞지만 오르면 높은 산 못지않게 확 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자신이 높아서가 아니라 주위가 낮아 나타나는 재미난 현상이다.
이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낙안읍성을 최초로 쌓은 김빈길 장군이 약 600여 년 전, 이곳에 망해당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낙안(군)팔경에 잘 나타나있다.
伯夷淸風(백이청풍) -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청명한 바람
寶嵐明月(보람명월) - 보람산(현, 제석산) 위에 떠 있는 둥근 보름달
玉山翠竹(옥산취죽) - 옥산의 새 꼬리 형태의 암록색 대나무 군락
金崗暮鍾(금강모종) - 금강암에서 해질 무렵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
澄山宿露(징산숙로) - 징광산에 피어오르는 아침 이슬
平地浮槎(평지부사) - 낙안들(가운데 흐르는 천)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뗏목
斷橋魚火(단교어화) - 단교(홍교)에서 반짝이는 고기잡이 불빛
遠浦歸帆(원포귀범) - 포구로 돌아오는 고깃배의 아스라한 모습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김빈길 장군의 망해당은 없다. 더구나 정상에는 잡초와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자라나 600여 년간 내려오는 이 고장의 자랑거리인 낙안(군)팔경도 감상할 수 없게 됐다. 역사탐방로가 이 지역의 가치를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것인 만큼 중요 지점인 옥산은 낙안(군)팔경을 감상할 수 있게 새롭게 꾸밀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망해당 복원, 시민공원 조성 건의)
③ 생태하천 길 낙안천, 벌교천
⑧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 원등마을
옥산을 내려오면 이제는 본격적인 분단된 한반도를 만나게 된다. 남과 북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임진강과 같은 낙안천을 만나게 되고 남과 북으로 나뉜 철원지역과 같은 곳인 원등마을을 지나게 된다. 한반도가 이념대립과 전쟁으로 갈렸다면 이곳은 일제의 인위적 행정구역 자르기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갈렸다.
분단으로 한반도가 졸지에 섬나라가 됐듯, 옛 낙안군이었던 낙안과 벌교 또한 폐군과 동시에 육지속의 섬마을이 되고 말았다. 옛 낙안군을 걸어보면 모두가 평지며 너나없이 같은 땅을 함께 부쳐 먹고 살고 있는데 낙안은 25km 떨어진 순천에, 벌교는 30km나 떨어진 보성에 호적을 올려놔 족보가 달라진 셈이다.
집은 순천시에 있지만 주소는 보성군에 있고 보성사람이지만 순천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 마을 공동체 생활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주소를 옮기지 못하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엄두가 나지 않아 가지 못한다. 그곳이 바로 한반도의 철원처럼 둘로 나뉜 원등마을 서너 가구의 이야기다.
그렇게 원등마을을 지나면 마을 앞에 있는 지동교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부터 벌교 홍교까지 흐르는 하천이 낙안천, 벌교천이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한쪽 둑은 순천시, 한쪽 둑은 보성군으로 임진강을 걷는 느낌이다.
그렇게 넓지 않은 하천인데 최근까지도 이곳에는 쓰레기로 골머리를 앓던 지역이다. 순천시 땅도 아닌, 보성군 땅도 아닌 그래서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아 지난 10여 년간 외지에서 건축폐기물 등을 차에 싣고 와서 버려도, 인근 주민들이 농사용 폐비닐 등을 버려도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치우는 법이 없던 장소다.
행정구역의 사각지대, 얼마나 쓰레기로 골치 아팠으면 송내교 다리 난간과 전봇대에는 누군가 부아가 치밀어 올라 써 놓은 듯한 ‘쓰레기 투기자는 고발’이라는 라카칠이 수년째 자리하고 있다. 민간에서 철쭉을 심고 오리를 방생하면서 생태하천길로 만들고 있고 생태하천문화축제장을 건의중이다.
④ 민족의 다리 보물 제304호 홍교
지동교에서 홍교까지는 약 5km 정도. 이 구간을 좀 더 설명하면 평안하고 차분한 길이다. 사색하기 좋고 명상하기 좋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하천 폭도 넓어지고 간간히 보이는 모래사장과 시원스럽게 나는 새들의 모습도 이런 기분을 부채질한다.
하천변으로 간간히 나무들이 있어 그늘을 만들어주고 굵은 모래가 섞여있어 평탄한 보행을 약속해준다. 갈대가 어른 키보다 더 높게 솟아오른 구간이 있는가 하면 이름 모를 풀들이 발목을 간질여주는 구간도 있다.
이 구간에서는 낚시꾼들의 모습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수문 근처에는 서너 명씩 그룹을 이뤄 낚시삼매경에 빠져있다. 가끔 밀짚모자를 쓴 낚시꾼을 발견할 때면 시간은 정지하고 마음은 더더욱 차분해진다.
홍교에 이르기 전에 12방천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모르는 지역민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왜냐면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피서지였기 때문이다.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 그리고 제법 깊은 수심은 여느 피서지에 뒤처지지 않았다. 여름철이면 너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은 12방천에 몸을 담군 추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흐트러진 풍경으로 남아있어 못내 아쉽다.
드디어 홍교다. 현존하는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지금도 자유롭게 사람들이 건너다니고 있는 보물 제304호인 홍교는 벌교를 상징하고 있다.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벌여줄 정도의 다리이니 남다른 의미가 있다. 소화다리가 일제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을 때 민족의 다리로 꿋꿋하게 지켜 온 홍교는 낙안천, 벌교천을 따라 걷는 길의 대미를 장식하는 상징물이다. 오리를 방생해 놓았고 홍교문화공간 조성도 건의중이다.
⑤ 일제강점기의 모습 태백산맥문학로
⑥ 이념 대립의 현장 소화다리
⑦ 완결편 태백산맥문학관, 통일을 생각해 본다
홍교를 지나 벌교읍내로 들어서면 갑자기 혼돈의 시간들이 다가온다. 모든 것이 뒤섞여 용해돼 있는 갯벌처럼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면서도 갯벌의 찰지고 끈끈한 성질이 가슴에 와 닿아 그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 바로 일제강점기와 이념대립속의 벌교 때문이다.
현재 벌교는 한창 공사 중이다. 특히, 홍교부근에서 벌교역전까지 태백산맥문학로 정비는 일제강점기와 이념대립의 모습들을 또렷하게 담아 놓을 예정이다. 금융조합 건물 앞은 새롭게 길을 다듬고 있고 남도여관(보성여관)은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맡아 보수를 하고 있다. 걸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공부다.
태백산맥문학로를 걷다가 문학관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만나는 다리가 1931년(소화6년)에 만들어진 소화다리다. 일제강점기의 울분을 주먹 하나로 달랬던 역사와 이념대립 속에 하루에도 수차례씩 사상이 다른 이들의 주검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던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강점기때 소화다리는 일본인이 주로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 한쪽 편에 진을 친 조선인들이, 건너는 일본인을 향해 매서운 주먹을 퍼 부었다. 그것이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마라’는 얘기의 시작이며 벌교 의로운 주먹의 진원지다.
이념대립이 한창이던 여순사건 때는 하룻밤 사이에도 수차례 처형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손가락 총질에 빨치산이 끌고 나가고 진압군이 끌고 나가서 피투성이가 된 채 다리 아래 갯벌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산 중턱에 자리한 소설 태백산맥문학관에 오르면 조선시대 이후 혼란속 한반도의 근 현대사를 일목요연하게 느껴 불 수 있다. 지주와 소작인과의 갈등, 외세와 결탁한 사람들과 민족을 부르짖은 사람들 사이의 증오, 이념대립속에서의 피의 복수. 그리고 분단.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우리천올레길은 태백산맥문학관에서 끝을 맺는다.
<낙안읍성>에서 조선시대를 느끼고 <홍교와 벌교읍내>에서 일제강점기의 뼈저린 교훈을 배우고 <소화다리>에서 이념대립과 갈등을 아파하고 <원등마을과 송내교>에서 자연의 소중함과 한반도 분단을 확인했다. 그리고 통일도 고민해 봤다.
불과 8km 걸었을 뿐인데 이 모든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은 특별한 여행이 분명하다. 조선시대부터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전국에서 유일한 곳. 우리천올레길. 그래서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걸어봐야 할 길로 이곳을 추천한다.
카페: 우리천올레길 ( http://cafe.daum.net/wooriolleda )
우리천올레길 문의: 서정일 ( 061-726-2525 / 017-239-0057 )
우리천아낌이(대표 정철회), 홍교회(대표 이문수)